생수의 보고

데이비드 에이 베드나 장로
십이사도 정원회

 
청년 성인을 위한 교회 교육 기구 노변의 모임 • 2007년 2월 4일 ・ 브리검 영 대학교

데이비드 에이 베드나 장로베드나 자매와 저는 오늘밤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세계를 여행하며, 특히 여러분과 같이 충실한 젊은이들과 함께 모여, 여러분에게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저녁 우리가 함께 예배하며 하나가 되어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가르침을 구할 때, 성신의 도움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교성 43:16참조)

간단한 질문을 함으로써 시작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물질이나 물건은 무엇입니까? 언뜻 생각하기에 금이나 기름 또는 다이아몬드가 가장 가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구 상에 있는 그 어떤 광물이나 금속, 보석 또는 용제보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물입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물은 생명을 지속시켜 줍니다. 물은 우리에게 알려진 온갖 생명체와 관련되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매개체입니다. 우리 몸의 약 2/3가 물입니다. 사람은 음식 없이는 여러 날이나 몇 주씩 살 수 있지만, 물 없이는 보통 삼사 일만에 죽습니다. 세계적으로 인구 밀도가 높은 대부분의 지역들은 담수의 근원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합니다. 간단히 말해, 깨끗한 물이 없거나 그것을 알맞게 공급받을 수 없다면, 생물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생수

모든 생명을 유지해 주는 물의 긴요한 역할을 볼 때, 구주께서 사용하신 “생수”란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설명된 바와 같이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여행할 때 사마리아를 통과했습니다. 그들은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러 야곱의 우물에 잠시 멈췄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7-11,13-14)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생수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물이 육신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하듯 구주와 그분의 교리, 원리 및 의식은 영생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는 매일 그분의 생수가 필요하며 영적인 성장과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 충분한 생수의 공급이 필요합니다.

경전은 생수의 보고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담겨 있는 경전은 우리가 손쉽게 이용할 수 있고 충분히 오랫동안 마실 수 있는 생수의 보고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거룩한 경전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상고하여 흡족히 취함으로써 “생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에게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필멸의 여정 동안 영적인 지시와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경전, 즉 귀중한 생수의 보고를 순수하고 안전하게 보호할 성스러운 청지기 직분을 갖고 있습니다.(교성 42:56 참조) 1970~1980년대에 걸쳐 교회는 경전에 방대한 주석과 전후 참조 그리고 추가 보조 자료와 지도 및 정보를 수록하는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경전을 내놓았습니다.

1980년대 초에 개정된 경전이 교회 회원들에게 처음 소개되었을 때, 보이드 케이 패커 장로님은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이 경전들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뜻에 따르려고 하는 충실한 기독교인의 후세대들이 배출될 것입니다.”

“구세대는 이러한 경전 없이도 양육되었지만 또 한 세대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Conference Report, 1982년 10월, 75쪽; 또는 “경전”, 성도의 벗, 1983년 1월호, 82쪽)

패커 장로님이 그렇게 말씀하신지 24년이 흘렀습니다. 그분이 언급하신 바로 그 세대가 오늘밤 전세계에 있는 교회 건물에 앉아 있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에 관해 말씀했으며 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여러분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경전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패커 장로님의 다음 말씀에 귀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계시는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 열려 전해질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손 안에 요셉과 유다의 막대기가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성취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복음을 학문적으로 발전시킬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간증을 갖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를 널리 알리고 옹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경전”, 성도의 벗, 1983년 1월호, 82쪽)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경전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지속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생수의 보고에서 흡족히 마셔야 할 책임도 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전 그 어느 세대보다도 이 젊은 세대가 경전에 더욱 몰두하고 선지자들의 말씀에 대해 더욱 깊은 지식을 지니며, 계시된 말씀을 통해 해답을 찾으려 하는 더 큰 마음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협착하고 좁은 길, 즉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적용하고, 더 많이 경험해야 하는 긴 여정이 있습니다.

보고인 경전에서 생수를 얻음

저는 이제 여러분과 함께 보고인 경전에서 생수를 얻는 세 가지 기본 방법을 검토하고자 합니다. 즉 (1)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2) 주제(topic)에 따라 경전을 공부하며, (3) 상관 관계와 패턴 및 주제(theme)를 상고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들은 우리의 영적인 갈증을 충족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며, 이는 우리가 각자의 경전을 펴서 읽고, 공부하고, 상고하여 성신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입니다.

한 권의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우리는 중요한 이야기들과 복음 교리 및 영원한 원리들을 연관시켜 생각해 보게 되고, 결국 생수가 우리의 삶 속으로 흘러 들어올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이 방법으로 우리는 경전의 주요 인물들과 사건 및 가르침들을 순서와 시간, 전후 관계에 따라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경전을 읽는다면 한 권의 경전을 전체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생수를 얻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첫 번째 방법입니다.

주제에 따라 경전을 공부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 다음에 진행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몰몬경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리와 실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 되며, 또한 찾으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구주를 믿는 신앙이란 무엇인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복음의 첫째되는 원리인가?

구속주를 믿는 신앙은 왜, 그리고 어떻게 회개로 이끄는가?

속죄는 내 자신의 제한된 능력과 힘으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상의 일들을 할 수 있도록 나를 어떻게 강화하는가?

그러한 질문에 초점을 맞추어 주제에 따라 공부하고, 경전 안내서를 참고하면 우리는 경전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 들어 탐구하여 더욱 풍부한 영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생수가 우리 삶에 흘러 들어오는 비율을 증가시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과 주제에 따라 공부하는 것은 모두 보고인 경전에서 생수를 얻는 세 번째 기본 방법의 전제 조건입니다. 한 권의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은 기본적인 지식의 폭을 넓혀 주고 주제에 따라 공부하는 것으로 지식의 깊이를 더하게 됩니다. 상관 관계와 패턴 및 주제를 상고하며 경전을 공부하는 일은 앞서 말한 두 가지 방법을 접목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우리의 영적인 지식의 바탕 위에 더하여 구원의 계획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이해를 넓히게 됩니다. 제 판단으로는 상관 관계와 패턴 및 주제를 찾기 위해 열심히 경전을 상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흡족히 취한다”라는 뜻과 어느 정도 통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방법은 영적인 보고의 문을 열고, 그분의 영을 통해 우리의 이해를 넓히며, 거룩한 경전에 대한 깊은 감사와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했던 영적인 결심을 낳습니다. 이렇게 경전을 상고하는 것은 우리가 구속주의 반석 위에 자신을 세우고 이 후기의 휘몰아치는 악의 바람에 맞설 수 있도록 해줍니다.

저는 아주 중요한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먼저 정식 교육을 아주 많이 받은 사람만이 제가 말씀드린 방법들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육 정도에 상관없이 진리를 성실히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방법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고도의 학습 보조 자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며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지식에 의존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단지 배우고자 하는 진지한 소망과 성신의 동반, 그리고 거룩한 경전과 활발하고 탐구적인 정신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경전을 상고해야 합니다. 우리가 공표하는 계시를 상고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리를 밝혀 주시도록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전념하여 구한다면 주님은 그분의 성령의 권능으로써 여러분에게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직접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가르침, 1976년, 11쪽)

영으로부터 배울 수 있도록 항상 자신을 합당하게 유지하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마태복음 7:7 참조), 영적인 보고의 문이 우리에게 열리고 생수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참되다는 것을 증거하고 간증하며 약속드립니다.

상관 관계와 패턴과 주제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제가 간단히 설명하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상관 관계

상관 관계란 생각이나 사람 또는 사물이나 사건 사이에 연결된 고리나 관련을 말하며 경전은 다양한 상관 관계들로 가득합니다. 영원하신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모사이야서 15:1~9참조), 자비와 은혜의 관계(니파이 후서 9:8 참조), 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의 관계(시편 24:4 참조),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의 관계(제3니파이 9:20 참조), 밀과 가라지의 관계(교성 101:65 참조), 지식과 예지의 관계(교성 130:18~19 참조), 의롭게 되는 것과 성결하게 되는 것의 관계(교성 20:30~31 참조), 양과 염소의 관계(마태복음 25:32~33 참조), 불멸과 영생의 관계(모세서 1:39 참조), 그리고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다른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유사점과 차이점, 즉 상관 관계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파악하고 배우고 숙고하는 것은 생수의 주요 근원이 되며 영감에 찬 통찰과 감춰진 지식의 보물을 찾게 해 줍니다.

각각의 표준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여러 주제들을 공부하면서 저는 “깨달음”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마음과 관련되어 표현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몰몬경의 두 구절이 이러한 상관 관계를 설명해 줍니다.

“너희가 깨닫고자 너희 마음을 기울이지 아니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지혜롭지 못하였느니라” (모사이야서 12:27)

“또 무리가 듣고 증거하니, 그들의 마음이 열려 예수께서 기도하신 말씀을 그들이 그 마음깨닫더라” (제 3 니파이 19:33)

저는 이 구절과 다른 많은 구절에서 깨달음이란 근본적으로 마음과 연결된다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깨닫기 위해 생각을 기울이라고 분명하게 권고 받지 않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정보를 얻고 평가하여 타당한 결론과 판단에 이르기 위해 분명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분별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반면에 경전은 우리에게 논리와 “육신의 팔”(교성 1:19)만으로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에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경전에서 사용된 깨달음이란 단순히 지능이나 인식에 의한 이해로만 간주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깨달음이란 우리의 생각 속에서 알고 있던 사실이 성신의 증거에 의해 우리 마음속에 진실로 확인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은사인 계시는 가장 일반적으로 생각과 느낌이 성신에 의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전해질 때 일어납니다. (교성 8:2~3; 100:5~8 참조) 간증과 확신이 우리의 머리에서 마음으로 움직일 때, 우리는 더 이상 단순히 정보나 지식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고 마음의 큰 변화를 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후 깨달음은 계시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은사이며, 개종의 전제 조건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원리들에 따라 더욱 일관성 있게 살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마음과 깨달음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통찰은 제가 복음을 배우고 공부하는 방법을 정하는 데, 그리고 베드나 자매와 제가 자녀들과 손자녀들을 가르치는 데, 또한 신권 형제로서 봉사하는 데에 크고 훌륭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패턴

패턴이란 반복적으로 무엇인가를 하거나 만드는 데 지침으로 사용될 수 있는 계획이나 모형, 또는 표준입니다. 경전은 영적인 패턴들로 가득합니다. 일반적으로 경전상의 패턴은 상관 관계보다 훨씬 더 광범위 합니다. 교리와 성약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고(교성 50:13~29 참조), 속임을 피하고(교성 52:14,18~19참조), 성전을 짓고(교성 115:14~16 참조), 도시를 세우며(교성 94 참조), 신권 정원회와 고등 평의회를 조직하는(교성 102:12 참조) 등 다른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한 패턴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경전상의 패턴을 식별하고 연구하는 것은 생수를 얻는 또 다른 중요한 근원이며 우리가 주님의 지혜와 생각을 좀더 잘 알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교성 95:13 참조)

저는 교리와 성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또한 주제별로 공부하면서 발견한 하나의 패턴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그것은 선교사들의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 대답하신 수많은 구절들에서 찾은 것입니다. 1831년에 있었던 많은 일들 중에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름 받은 여러 장로들이 어떻게 선교 사업을 시작해야 하며 어떤 방식과 길로 가야 하는지 알고자 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통해 주신 계시에서 주님은 이러한 형제들에게 물 또는 육지로 갈 수 있고(교성 61:22참조), 필요한 교통수단을 구입하거나 만들 수 있고(교성 60:5참조), 모두 함께 하거나 둘씩 짝을 지을 수도 있으며(교성 62:5참조), 여러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각각 권고하셨습니다.(교성 80:3참조) 이러한 계시들은 형제들이 “너희 보기에 좋을 대로” (교성 60:5;교성 62:5) 또는 “그들의 판단에 따라 그들에게 알려지는 대로” (교성61:22) 결정하도록 뚜렷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각각의 경우에 구주께서는 “내게는 상관없나니” (교성 60:5; 교성61:22; 교성 62:5; 교성63:40; 교성 80: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상관없나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놀라울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구주께서 선교사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관심이 없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선 순위와 옳은 일에 초점을 두는 중요성, 즉 이 경우에는 지명된 임지에 도착하고 선교 사업을 시작하는 일에 대해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을 행사해야 했고, 좋은 판단력과 영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고 그들의 여행의 목적인 임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의 길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근본적인 것은 그들이 행하도록 부름받은 사업이었고, 그들이 어떻게 임지에 도착하는가는 중요하긴 했으나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저의 삶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얼마나 훌륭한 패턴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개인적으로 아시며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발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우리가 의롭고 지혜로우며 영감에 찬 판단을 내림으로써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하십니다. 구속주께서는 결코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인도와 지시를 받기 위해 간구해야 하며, 늘 성신을 동반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시나 도움을 구하는 우리의 간구에 대한 응답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낙담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응답들이 한꺼번에 오는 일은 거의 드뭅니다. 모든 응답이 즉각적으로 와서, 신앙과 행함과 연구와 끈기의 대가 없이 주어진다면 우리의 발전은 지연되고 우리의 판단력은 약해질 것 입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패턴은 그러한 초기 선교사들에게 주어진 다음과 같은 지시에서 간결하게 설명됩니다.

“만일 너희 가운데 누가 말이나 노새나 마차를 타기 원하면 나 주는 그가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의 손에서 이를 받을진대, 그가 이 축복을 받는 것을 기꺼워하느니라.”

“이러한 일은 판단과 영의 지시에 따라 행하도록 너희에게 맡기노라.”

“보라, 왕국은 너희 것이니라. 그리고 보라 또 보라, 나는 충실한 자와 항상 함께 있느니라. 참으로 그러하도다. 아멘.” (교성 62:7~9)

이 구절에 나오는 이야기의 주요 핵심은 말도 아니고 노새도 아니며 마차도 아닌 바로 감사하는 마음과 판단력과 충실함에 있습니다. 이 패턴의 기본적인 요소들에 주목해 주십시오. (1)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 (2) 판단과 영의 지시에 따름, (3) 구주는 충실한 자와 항상 함께 하심입니다. 영감에 찬 의로운 판단을 위해 이 단순한 패턴을 따를 때 우리에게 찾아올 지시와 확신과 새로움과 힘을 여러분은 느낄 수 있습니까? 진실로 경전상의 패턴은 생수의 귀한 근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두고, 또는 맘에 들거나 그렇지 않은 것을 두고 판단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보통으로 가장 힘든 선택은 좋은 것과 좋은 것을 두고 선택하는 일입니다. 이 구절에 나와 있는 말과 노새와 마차는 똑같이 선교사들의 여행에 효과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처럼 여러분과 저도 인생의 다양한 시기에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하나 이상의 만족스러운 기회나 선택들을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경전에서 이러한 패턴을 찾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헌신적인 제자로서의 길, 성약을 존중하고 계명을 지키는 일과 같은 필수 사항을 우리 삶에 최우선으로 여긴다면 하늘 나라로 돌아가는 길을 추구할 때 우리는 영감을 받고 강한 판단력을 갖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필수 사항을 우선으로 여길 때 우리는 “그릇 갈 수 없”습니다. (교성 80:3)

주제

주제란 옷감 속에 잘 짜인 실올처럼 책 속에 있는 지배적이고 반복적이며 통일된 성질이나 생각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경전상의 주제는 패턴이나 상관 관계보다 훨씬 더 광범위합니다. 사실상 주제는 패턴과 상관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이나 내용을 제공합니다. 경전상의 주제를 찾고 파악하는 과정은 우리를 구원의 근본적인 교리와 원리, 즉 성신의 확실한 증거들을 불러오는 영원한 진리(요한 1서 5:6참조)로 이끕니다. 보고인 경전에서 생수를 얻기 위한 이런 방법은 가장 힘들고 수고스럽기는 하지만 가장 큰 교화와 영적인 거듭남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경전은 강력한 주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몰몬경은 이 경륜의 시대에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모든 나라에 자기를 나타내신다는 것을 확신시키”(몰몬경 표제지)기 위해 나왔습니다. 몰몬경에 반복되는 중심 주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와, 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되”(모로나이서 10:32)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경전의 가르침과 경고, 권고와 구절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주요,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몰몬경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중요한 주제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만일 사람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진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양육하시며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그들이 그가 명하신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해 주시는도다.” (니파이전서 17:3).

“그리스도를 믿는 굳건함을 지니고 힘써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느니라.” (니파이후서 31:20)

“사람이 존재함은 기쁨을 갖기 위함이니라.” (니파이후서 2:25)

“주의 능력 안에서 당신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앨마서 20:4)

“간악함은 결코 행복이 아니었느니라.” (앨마서 41:10)

여러분이 웃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경전의 주제를 찾기 위해 사용하는 저의 단순한 방법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같은 방법을 사용하라고 주장하거나 추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방법들로 똑같은 효과를 봅니다. 저는 그저 제게 잘 맞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에 저는 부탁받은 말씀을 준비하면서 집합의 영과 목적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최근 연차 대회에서 러셀 엠 넬슨 장로님이 말씀하신 집합의 원리에 대해(“흩어진 이스라엘의 집합” 리아호나, 2006년 11월호, 79~81쪽) 계속 공부하고 깊이 생각해 보던 참이었고, 그 주제는 제가 지명 받은 말씀의 성격과 꼭 맞는 것이었습니다.((The Spirit and Purposes of Gathering, BYU--Idaho Devotional, October 31, 2006)

저는 집합에 관해 경전에서 배울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표준 경전에서 어떤 형태로든 “집합”이란 말이 포함된 구절들을 전부 찾아 복사했습니다. 그런 후 저는 상관 관계와 패턴과 주제를 찾으면서 각각의 구절들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저는 경전을 읽기 시작하면서 제가 찾는 것들에 대한 선입관을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신의 도움을 얻기 위해 기도를 하고 단순하게 읽기 시작했습니다.

집합에 관한 구절들을 복습하며 저는 유사한 구절이나 요점을 색연필로 표시했습니다. 경전을 다 읽었을 때, 어떤 구절들은 빨간색으로, 어떤 것들은 초록색으로, 또 어떤 것들은 다른 색깔들로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웃을지도 모르는 부분이 바로 여깁니다. 저는 복사한 구절들을 가위로 오려낸 후 색깔 별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빨간색으로 표시된 구절 한 뭉치, 초록색으로 표시된 구절 한 뭉치 등 색깔 별로 분류된 구절 뭉치들이 나왔습니다. 저는 각각의 뭉치들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누며 구절들을 분류했습니다. 저는 일 학년 학생처럼 가위로 오리고 여러 뭉치로 나누는 일들을 아주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이 일이 끝난 후 저는 집합의 원리에 대해 아주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그 큰 뭉치들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경전에는 최소한 세 가지의 주요한 집합의 양상, 즉 집합의 목적, 집합의 종류장소, 집합의 축복 이 설명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집합의 몇몇 기본적인 목적들이 경배하기 위함이며(모사이야서 18:25참조), 권고와 지시를 받기 위함이고(모사이야서 18:7 참조),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며(교성 101:63~64참조), 방어와 보호를 받기 위함(교성 101:64-65참조)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집합의 종류장소에 관한 공부를 통해서 저는 우리가 영원한 가족으로(모사이야서2:5참조), 회복된 교회로(교성 101:64~65참조), 시온의 스테이크로(교성109:59참조), 거룩한 성전으로(앨마 25:5~6참조), 두 개의 거대한 중심지, 즉 옛 예루살렘(이더서 13:11 참조)과 시온의 도시 또는 새 예루살렘으로(신앙개조 1:10; 교성 42:9 참조) 집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교화(에베소서 4:12~13참조)와 보존(모세서 7:61참조)과 강화(교성 82:14참조) 등이 집합의 축복 중 일부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이 때가 찬 경륜의 시대, 만물의 회복에 필수적인 부분인 집합의 영에 대해 훨씬 깊은 감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 집합에 관해 제가 배운 것들을 지금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목적은 경전의 주제를 찾는 한 가지 방법을 보여드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축복들

우리가 경전을 읽고, 공부하고, 상고함으로써 받을 수 있는 지식과 이해, 계시와 영적인 기쁨의 축복은 아주 훌륭한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흡족히 취하”(니파이후서 31:20)는 것은 유익하고 감동적이며 즐겁습니다. 그 선한 말씀으로 “내 영혼을 크게 하기 시작함이라. 참으로 이것은 나의 이해력을 밝혀 주기 시작하나니, 참으로 이것은 내게 기쁨을 주기 시작하는도다 하리라”(앨마서 32:28) “보라, 그의 말이 기록되어 너희 앞에 있은즉, 그러므로 그것을 상고하라.”(제3니파이 20:11) 그리고 그것들은 “[여러분]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요한복음 4:14) 될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개인적으로 경전을 읽고, 공부하고, 상고하며 저는 자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교리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저의 54년 동안의 필멸의 삶에 어떠한 사건 또는 지식이나 영향도 속죄의 교리에 관해 반복적으로 읽고 깊이 공부하고 그것의 상관 관계와 패턴과 주제를 찾는 일보다 더 큰 영향을 준 것은 없었습니다. 이 핵심적인 구원의 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같이 제 영혼을 적시었고 저의 생각과 말과 행실에(모사이야서 4:30참조) 영향을 주었으며 저에게는 문자 그대로 생수의 샘이 되었습니다.

리하이의 시현

경전을 읽고 공부하고 상고하는 것의 중요성은 리하이의 생명나무 시현 속에 나타난 몇 가지 요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부친 리하이는 그 나무와 열매를 얻기 위해 협착하고 좁은 길을 따라 앞으로 밀고 나오는 여러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각 무리의 사람들은 회개와 물의 침례라는 문을 통해 그 길에 들어섰고 성신의 은사를 받았습니다.(니파이후서 31:17~20참조) 생명나무는 그 시현의 핵심이었고 니파이전서 11장에 분명히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합니다. 또한 나무 열매는 구주의 속죄를 통해 오는 축복의 상징물입니다. 흥미롭게도 만인을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도록 인도하는 몰몬경의 주된 주제가 리하이의 시현의 핵심입니다. 특히 눈에 띄는 사항은 나무로 이끄는 쇠막대입니다.(니파이전서 8:19참조) 쇠막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니파이전서 8장 21~23에서 우리는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에 이제 막 들어서서 나아가기 시작한 한 무리의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을 상징하는 어둠의 안개(니파이전서 12:17참조)가 일자 그들은 길을 잃고 방황하며 멀어지다가 잃어버려졌습니다.

이 구절들 중에 쇠막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구주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가리키는 하늘의 나침반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이 무리가 어느 정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영적인 확신을 보이며 그 길에 들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결국 그들은 악마의 유혹으로 인해 길을 벗어나 잃어버려졌습니다.

24~28절을 읽어보면 두 번째 무리의 사람들이 생명나무에 이르는 협착하고 좁은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 사람들은 쇠막대를 꼭 붙든 채 밀고 나아가 어둠의 안개를 지나가더니 마침내 나아와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무리의 사람들은 크고 넓은 건물 안에 있는 자들로부터 조롱을 받자 부끄러워하더니 금단의 길로 떨어져 나가서는 잃어버려졌습니다. 이 무리들이 쇠막대를 꼭 붙잡았다고 묘사되어 있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무리가 신앙과 결의를 갖고 앞으로 밀고 나아왔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들은 또한 쇠막대라는 축복을 더 받았고 그들은 그것을 꼭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핍박과 고난에 부딪히자 그들은 금단의 길로 떨어져 잃어버려졌습니다. 신앙과 결의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도 이 무리는 잃어버려졌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가끔씩 경전을 읽거나 공부했거나 상고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쇠막대를 꼭 붙들었다는 것은 제가 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쉬지 않고 규칙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끔씩 짧고 굵게 하는 불규칙한 공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30절을 읽어 보면 세 번째 무리의 사람들은 쇠막대를 계속하여 굳게 잡은 채 앞으로 밀고 나아오더니 드디어 나아와 엎드러져서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이 구절의 주요 부분은 쇠막대를 계속해서 굳게 잡은 채 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 무리도 신앙과 확신을 갖고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방황하고 금단의 길에 떨어졌다거나 잃어버려졌다는 표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마도 이 무리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꾸준히 계속해서 읽고 공부하며 상고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세 번째 무리를 멸망에서 구한 것은 끊임없는 생수의 공급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무리에 동참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에 그들이 내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께서 보신 바 나무로 인도하는 쇠막대는 무엇을 뜻하느냐?”

“이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굳게 붙들 자들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하겠고, 유혹이나 대적의 불화살도 그들을 이겨 눈멀게 하여 멸망으로 이끌어 내지 못할 것이니이다 라고 하였느니라.” (니파이전서 15:23-24).

그렇다면 쇠막대를 꼭 붙잡는 것과 굳게 붙잡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쇠막대를 굳게 붙잡는 것은 오늘밤 우리가 논의한 생수를 얻는 세 가지 방법을 모두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관성 있게 사용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 이렇게 되었나니 나는 나의 부친이 보신 쇠막대가 생수의 근원, 곧 생명나무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았나니”(니파이전서 11:25)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주제에 따라 경전을 공부하고, 상관 관계와 패턴 그리고 주제를 상고하는 것과 같은 각 방법은 교화와 유익을 주며 구주의 생수를 간헐적으로 공급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세 가지 방법을 모두 규칙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변함없는 생수의 흐름을 가져다 주며, 이것은 쇠막대를 굳게 붙잡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매일 일상 활동을 통해 여러분과 저는 우리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의 상당량을 잃습니다. 물을 필요로 하는 몸의 세포 때문에 우리는 목말라하며, 매일 우리 몸에 물을 보충해야 합니다. 가끔씩만 물을 보충하고 그 사이 오랜 시간 동안 탈수 상태로 지낸다는 것은 사실상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영적인 갈증은 생수가 필요합니다. 변함없는 생수의 흐름은 산발적인 흡수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쇠막대를 굳게 잡기 위해 여러분과 저는 매일 경전을 읽고 공부하며 상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쇠막대를 꼭 붙잡고만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생수의 근원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 각자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질문들입니다.

오늘밤 모임을 마치면서 우리는 다 함께 찬송가 “쇠막대”를 부르겠습니다. 진실로 의인이 부르는 이 노래는 간절하고 마음을 울리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교성 25:12참조) 이 찬송가가 가르치는 교훈들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기를 간구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의 힘에 대해, 그리고 말씀이라고 묘사되어 있는 그분을 증거합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아버지의 아들이고 저는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쇠막대를 굳게 잡을 때 그분의 생수로 인도된다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그분의 종으로서 저는 쇠막대를 굳게 잡으려는 여러분의 소망과 능력이 증가되고, 구주를 믿는 여러분의 신앙이 증가되며, 그 신앙으로 두려움이 사라지고, 생수의 보고인 경전으로부터 흡족히 마셔서 그분을 알게 되도록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다음 가사를 항상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유혹 권세 이르러
내 갈 길 막히나
막대기에 의지하면
주 도와 주시리
(찬송가, 170장)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