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올슨 에프 휘트니(1855~1931), 리아호나 2003년 12월호, 1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The Divinity of Jesus Christ

  올슨 에프 휘트니는 1855년 7월 1일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에 의해 1906년 4월 9일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 성임되었다. 휘트니 장로는 75세를 일기로 1931년 5월 16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사망했다. 이 글은 1925년 6월 7일 열린 상호향상회 50주년 기념 대회의 일요일 저녁 모임에서 한 말씀에서 발췌한 것이다.

   올슨 에프 휘트니 장로(1855~1931)
   
십이사도 정원회

  (올슨 에프 휘트니(1855~1931),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리아호나 2003 12월호, 12)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조차도 구속주의 성스러운 특성과 사명을 의심하고 있는 때에 아직도“세상에서 믿음” [누가복음 18:8],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인류의 구세주로, 그리고“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 또 예임된 사자로 믿는 신앙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축하하고 기뻐할 만한 이유가 됩니다.

이러한 확신을 굳게 갖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후기 성도들이 있습니다. … 그리고 오늘 밤 우리는 시온의 청남 청녀들의 표어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개인적인 간증을 지킨다”라는 말이 새겨진 깃발을 휘날리고 있습니다.

 

간증은 어떻게 오는가

그러한 간증은 오직 한 가지 방법, 즉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옵니다. 책이 그것을 줄 수 없습니다. 학교도 그것을 줄 수 없습니다. 어떤 인간적인 권세도 그것을 줄 수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사로서 높은 곳에서 오는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계시에 의해 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수석 사도에게“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태복음 16:15~17)

그것이 베드로가 지닌 간증의 기초였으며, 그것은 비슷한 특성을 가진 모든 참된 간증의 기초입니다. 그것들 모두는 같은 토대 위에 있습니다.

간증은 증거를 의미하며, 그것은 여러 가지 것들, 즉 복음의 다양한 은사라는 열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꿈, 시현, 예언, 방언과 그 해석, 병 고침, 그리고 성스러운 영의 나타남 등, 이 모든 것들이 그 범주 안에 포함됩니다.

 

가장 확실한 증거

그러나 모든 간증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강하게 확신을 주는 것은 구세주께서 떠나신 후에 그분이 그들과 함께 머무르게 하고, 과거의 일들을 기억나게 하며, 과거, 현재, 그리고 장래의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면서 다가올 일들을 그들에게 보여 주겠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보혜사, 즉 성신의 권세로 복음을 배우고 이해하는 영혼의 능력입니다.

 

가장 위대한 은사

그런 영에 의해, 오직 그에 의해서만 사람은 하나님, 그리고 그분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분들을] 알고 또 그 지식을 가지고 일관되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모든 은사들 가운데 가장 큰 그 은사를 얻는 방법을 아는 것 이상으로 더 큰 일이, 육신으로 있는 동안 사람에게 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사람은 자신을 알아야 하고,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 여기로 보낸 분께서 자신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 필멸의 생을 마치면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위대한 내세에서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꼭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이러한 지식, 곧 사람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지식의 근원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에 신성하신 존재 이셨듯 현재에도 신성하신 분이라는 간증이 옵니다. …

 

시대를 이어온 간증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욥기 19:25], 의로운 욥이 격심한 시련과 고난을 인내하며 영혼의 깊은 곳에서 분출했던 이런 당당한 외침은 10,000명 아니 10,000명의 10,000배 이상 되는 충실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가슴에서 메아리치고 있으며, 그들의 영감 받은 간증은 아담의 시대부터 조셉 스미스의 시대까지 이어져 전해오면서 반복되어 왔습니다. 성스러운 경전은 수많은 기적과 이적에 의해 입증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간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스러운 삶과 죽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기적도 행하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시 말해 물 위를 걸으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악마를 내쫓으시고,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주시고, 다리 저는 사람을 걷게 하시는 등의, 초자연적이라고 여기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그분의 신성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있는 행위나 처신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적을 용서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고 가르치시며“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던]”(사도행전 10:38) 그분의 생애보다 더욱 신성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죽음의 고통을 겪으시며 십자가 위에 달리시는 동안 자신을 죽이는 살인자들을 위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심으로써 하나님다운 크나큰 관대함의 모범을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무엇이 그보다 더 신성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 외에 어느 누가 그러한 시간에 그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요한복음 15:13] 그러나 자신의 친구들뿐 아니라 적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었던 그분이 여기 계십니다. 어떤 필멸의 인간도 그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 친구뿐 아니라 원수를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그 행동 하나만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명 위에 신성이라는 도장을 찍기에 충분합니다.

 

알고 있는 사람들

십이사도는 그분의 특별한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위치만으로도 그들은 그분께서 자신이 어떠한 분이라고 주장하셨는지를 의심의 여지없이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부활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나오시기까지는 이 지구에 부활이 없었습니다. 그분은“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린도전서 15:20]가 되셨습니다.

사도들은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알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나가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셨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저희의 견해이며 확신입니다.”그러한 말이 죄로 완악해진 세대에게 어떤 감동을 주겠습니까? 그들의 경우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알아야 했고 또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보았고 그분에게서 들었으며, 심지어는 그분이 참으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도록 그분을 만져 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사명에 따른 독특한 특성으로 인해 이러한 지식을 지니는 것은 그들의 권리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사도들이 그분에 관해 증거하는 것을 믿도록 요구 받습니다. …

 

믿음과 지식

표적을 구하는 것은 불순한 성향을 나타내는 가증한 일입니다. 사람이 지상에 존재하는 위대한 목적 가운데 하나인 영적인 발전은 신앙의 행사에 의해 오기 때문에 보지 않고 믿을 때 축복을 받습니다. 반면에 지식은 신앙을 삼킴으로써 신앙의 행사를 방해하고 나아가 그러한 발전을 가로막습니다. 물론“지식은 힘입니다.”그리고 모든 것은 적절한 때에 알려져야 합니다. 그러나 섣부른 지식, 즉 '그릇된 시각으로 아는 것'은 발전과 행복에 치명적입니다.

사도들의 경우는 예외였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아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그 강력한 간증에 필수적인 힘과 권세를 실어주기 위해서도 그런 지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높은 곳에서 오는 권세

그러나 그들의 경우에서조차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고 그에 대해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귀로 듣는 것 이상의, 손으로 만지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했습니다. 부활 이전에도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성스러운 계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십이사도들도 똑같은 방법에 의해 같은 지식을 받을 자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명에 대한 자격을 갖추게 하기 위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 이외에도 어떤 것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나타나심 이후에 그리고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가셔서“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5]고 명령하신 이후에, 그들이“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누가복음 24:49] 예루살렘에 머물라는 명을 그분에게서 받았다는 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순종했고, 그 능력은 그들에게 왔습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으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2~4)

사도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갖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그런 의식을 집행하는 성스러운 권능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침례를 받아 깨끗하게 된 모든 사람들에게 그와 똑같은 능력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들도 성신을 받고 계속된 순종에 의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후기의 간증

고대에 있었던 일은 이 정도에서 끝내겠습니다. 이제 현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9세기 초반에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께서 자신들을 나타내셨던 대상이었고, 또 영원한 복음을 고대의 모든 은사들과 축복들과 함께 가장 위대한 후기의 경륜의 시대의 초입에 회복시키는 도구였던 조셉 스미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시드니 리그돈과 함께 보고 영원한 세계의 영광을 바라보았던 조셉 스미스, 커틀랜드 성전에 있는 연단의 벽 위에 서 계신 여호와,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올리버 카우드리와 함께 보았던 조셉 스미스, 이 사업의 기초를 놓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선지자 조셉 스미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해 강력한 간증 이상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충실한 성도들이 그런 간증으로 인해 기뻐했고 또 기뻐하고 있으며, 성신의 권세를 통해 모든 것이 그들에게 확인되었습니다.

 

선교 임지에서

참으로 중요한 이 주제의 수많은 증거들에 저의 작은 증거를 더해 드리고 싶습니다. 50여 년 전에 저는 젊은 선교사로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었습니다. 저는 진리에 대한 간증을 간구하고 있었으나, 막상 선교 사업에는 그다지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교 사업에 경험이 많았던 제 동반자가 부지런히 지침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저를 나무라며 말했습니다. “장로님은 교회 서적들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장로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것이지, 신문 기사를 쓰려고 온 게 아닙니다.” 그런 말을 들은 것은 제가 당시에 그런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옳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만, 제가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점에 스스로 매혹되어 있었고 또 스물한 살의 청년으로서 선교 임지로 가라는 부름을 받아들이면서 포기했던 [연극]을 제외한 그 어떤 다른 직업보다도 글쓰기를 좋아했기에 여전히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어느 날 밤 저는 꿈을 꾸었는데, 그것을 꿈이라고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아무튼 저는 구세주의 고통의 증인으로서 겟세마네 동산에 있었습니다. 제가 여기 계신 회중을 분명하게 보듯이 저는 그렇게 그분을 보았습니다. 저는 바로 앞에 있는 나무 뒤에 서서 저를 보이지 않고서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제 오른편에 있던 작은 쪽문으로 오셨습니다. 세 명의 사도들에게 무릎 꿇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 곳을 떠나 다른 편으로 건너가셔서 그분 또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기도와 똑같았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태복음 26:36~44; 마가복음 14:32~41; 누가복음 22:42 [참조])

그분께서 기도하실 때 저를 향한 그분의 얼굴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그 광경에 너무도 감동된 나머지 저 또한 그분의 크나큰 슬픔에 동참하여 순수한 연민으로 울었습니다. 제 온 마음이 그분에게로 다가섰습니다. 저는 온 영혼을 다해 그분을 사랑했고 그분과 함께 있기를 갈망했기에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곧 그분은 일어나셔서 무릎 꿇고 있다가 이내 잠들어 버린 사도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분은 조용히 그들을 흔들어 깨우시고는 최소한의 분노나 꾸짖음도 없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무라시며 한 시간이라도 함께 깨어 있을 수는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곳에서 그분은 그분의 예민한 영혼을 괴롭히는 모든 남자, 여자, 어린이의 고통과 함께 세상의 죄의 짐을 자신의 어깨 위에 지셨습니다. 그들은 그 짧은 한 시간 동안도 그분과 함께 깨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셔서 그분은 다시 기도하셨으며 그리고 또다시 사도들이 있는 곳으로 가셔서 자고 있는 그들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분은 다시 그들을 깨워서 훈계하신 후 돌아오셔서 전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저는 그분의 얼굴, 형태, 움직임 등 그분의 모습을 완전히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기품 있는 풍채와 당당한 모습을 지니셨습니다. 몇몇 화가들이 그렸던 것처럼 약하고 남자답지 못한 모습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계신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었지만, 어린아이처럼 온유하고 마음이 낮은 분이셨습니다.

잠시 후 모든 상황이 한꺼번에 변한 듯 했습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광경은 똑같았습니다. 앞에서 있었던 상황과는 달리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였으며, 그 세 사도들과 함께 구세주께서는 이제 제 왼편에 있던 한 무리 속에 계셨습니다. 그들은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나무 뒤에서 뛰쳐 나가 그분의 발 아래 엎드리고는 무릎 주위를 꽉 껴안고 저도 같이 데리고 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저는 그분께서 몸을 굽혀 저를 일으켜 세워 주시고 껴안아 주시던 그 친절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생생하고, 너무도 현실 같아서 저는 그분의 품안에서 정말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그런 후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내 아들아. 이들은 그들의 일을 끝냈으니 나와 함께 갈 수 있다만 너는 머물러 너의 일을 끝내야 하느니라.” 그래도 저는 여전히 그분께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분의 키가 저보다 크셨기 때문에 그분의 얼굴을 응시하며, 저는 정말 진지하게 그분께 간구했습니다. “그럼, 마지막 날에 주님께 나오게 될 것이라고 제게 약속해 주십시오.”그분은 기분 좋게, 부드럽게 웃으시며 대답하셨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네 자신에게 달려 있느니라.” 저는 목메인 채 깨어났고 때는 아침이었습니다.

 

이야기의 교훈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제가 꿈 이야기를 동반자(에이 엠 머서 장로)에게 들려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제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분명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저는 제가 사도가 되거나 교회에서 그 어떤 다른 직분을 맡게 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일은 그 당시에는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잠을 자고 있던 사도들이 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어떤 한 가지 일을 하라는 성스러운 지명을 받았음에도 다른 일을 하는 어느 남자나 여자처럼 제 임무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영 회장의 권고

그 시간 이후 모든 것이 변해 저는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글 쓰는 일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고향 신문에 제가 기고했던 몇 편의 글을 보신 브리감 영 회장님 [1801~1877]께서“글 쓰는 은사”가 저의 재능이라고 하시며“지상에 진리와 의를 세우기 위해”장래에 활용할 수 있도록 그것을 계발하라고 충고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분이 제게 주신 마지막 권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분은 그 해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당시 오하이오 주에서 선교사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글쓰기를 계속했지만 그것은 교회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부차적인 일이었습니다.

 

연사의 간증

그 후 성스러운 계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꿈이나 시현이나 여러 가지 것이 결합된 다른 나타냄보다 더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밝히신 촛불, 즉 성신의 은사에 의해 저는 그 당시까지 제가 결코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고, 결코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전에는 결코 그만큼 사랑하지 못했을 정도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저의 영혼은 만족하게 되었고, 저의 기쁨은 충만했는데, 이는 제가 진리에 대한 간증을 얻었으며 또 오늘날까지 그것이 제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구속주께서 살아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욥조차도 그것을 좀더 잘 알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를 갖고 있으며, 이것이 제가 오늘 밤 우리가 수호하는 표어를 휘날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개인적인 간증을 지니고 또 전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이유입니다.

(올슨 에프 휘트니(1855~1931),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리아호나 2003년 12월호, 12)

Improvement Era, 1926년 1월호, 219~2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