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이혼", 스펜서 더블류 킴볼 회장, BYU, 1976년 9월 7일★]

결혼과 이혼
Marriage and Divorce

  스펜서 더블류 킴볼 회장

  (결혼과 이혼, 스펜서 더블류 킴볼 회장, 1976년 9월 7일, BYU)

 시온의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죄와 악행, 성적인 부도덕과 그것이 지닌 추악한 많은 접근에 관해 경고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루시퍼가 서서히 접근하는 과정의 하나로 복장과 행동에서 품위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권고를 주의 깊게 들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또한 그것들을 소홀히 한 분들께는 다시 경고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애무를 비롯하여 젊은 남녀들이 때때로 빠져 드는 왜곡된 행동들의 함정에 관해 젊은이들에게 경고하며,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또한 합당성의 울타리를 넘어갔을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노력해 왔으며, 그들에게 용서를 가져다줄 수 있는 완전한 회개의 길을 설명드렸습니다.

저는 종교가 다른 사람들간의 결혼이 갖는 많은 위험성에 대해 젊은이들에게 경고해 왔으며 제가 지닌 온 힘을 다해 교회 밖에서 결혼할 때, 오는 슬픔과 환멸, 그리고 믿음을 지닌 사람이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했을 때 불가피하게 겪게 되는 불행한 상황을 피하도록 경고했습니다. 교회가 시간과 노력과 금전적인 면에서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들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영성이 깊어지는 것은 결혼 후에 그리고 가족이 생길 때 공고해지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결혼에는 자연적으로 불화가 따르게 됩니다. 그 밖에 다른 많은 이유들이 교회 내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데, 남편과 아내는 공통된 배경, 공통된 이상과 표준, 공통된 신앙과 소망과 목적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도 그 결혼은 의로운 상태로 성전에 들어가서 영원하게 맺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가족 생활에 대해서도 몇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주제는 새로운 것도 아니고 이목이 집중될 만한 것도 아니지만, 목숨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결혼은 모든 생활과 관련이 있으며 가족 생활은 우리 존재의 근간입니다.

 

결혼의 행복과 불행

이혼이라는 추악한 악이 우리 사회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우리 조부모께서는 거의 모르고 계셨고 또 우리 부모들에게도 흔하지 않았던 이 암적인 상황이 우리 시대에 너무도 흔하게 되어 거의 모든 가족이 이 파멸적인 책동으로 인해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행복한 가정을 풍비박산내고 생의 좌절과 생각의 왜곡을 통해 신앙을 파괴하는 주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명예롭고 행복하고 성공적인 결혼 생활은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목표임에 틀림 없습니다. 의도적으로나 부주의하게 그것에 포함된 진지한 의미를 회피하는 사람은 정상적이지 않을 뿐더러 자기 자신을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분풀이로 결혼하거나 재산을 위해 결혼하거나 실연에 대한 반발로 결혼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얼마나 삐뚤어진 것입니까!

결혼은 아마 모든 결정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오래도록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그것이 직접적인 행복뿐 아니라 영원한 기쁨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관련된 두 사람에게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 특히 그들의 자녀와 그 자녀의 자녀를 통해 여러 세대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부모 없이 성장하고 있는 어린이들의 수를 생각해 보면 정말로 걱정스럽습니다. 설사 두 부모가 있다 하더라도 어느 한 쪽의 힘만으로는 정말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결정 가운데 현세와 영원을 위한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 만큼은 잘못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가장 신중하게 계획하고 생각하고 기도하며 금식해야 합니다. 참된 결혼은 정신적인 면뿐만 아니라 마음에서도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감정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을 내리게 해서도 안 됩니다. 금식과 기도, 그리고 진지한 사고에 의해 강화된 마음과 가슴이야말로 결혼 생활에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결혼 생활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날로 증가하고 있는 이혼율이 나타내듯 그것은 단순하지도 않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다음 숫자는 [1976년 이전에] 솔트레이크 카운티에서 나온 것인데, 아마 다른 곳도 비슷할 것입니다. 한 달 동안에 832쌍이 결혼을 했으며 414쌍이 이혼을 했습니다. 그것은 결혼 숫자의 반에 해당합니다. 364쌍이 성전 결혼을 했으며, 그 성전 결혼 가운데서 약 10퍼센트만이 이혼으로 헤어졌습니다. 이 숫자는 그나마 평균보다는 나은 것이지만, 성전 결혼 후에 이혼한다는 점에 애석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한편 이러한 조사를 통해 성전 결혼의 약 90퍼센트가 확고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밝혀져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같은 인종적 배경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고, 경제적 및 사회적 그리고 교육적 배경이 비슷한 사람(이러한 것이 절대적 필요 사항은 아니지만 권장되는 바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은 종교적 배경을 지닌 사람과 결혼할 것을 우리는 권고하고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배우자 선택에도 불구하고 악마는 여전히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며 가정 파괴와 좌절에 찬 삶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가장 근접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격의 불일치”라는 이유로 결혼 생활을 끝내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했다가 그것을 포기하고”, 이혼과 재혼을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너무도 많은 쇼와 소설과 너무도 많은 사회 스캔들을 접하고 있습니다.

이혼 그 자체가 전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지만 해결책으로서 이혼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 세대의 심각한 죄입니다. 어떤 프로그램이나 형태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 옳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결혼 생활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쉬울 수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희생, 나눔, 그리고 커다란 비이기심이 필요합니다.

많은 텔레비전 방송극과 소설이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결혼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내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거의 우리 모두는 가까운 친구들이나 친척들 가운데서 이혼을 보았기 때문에, 이혼이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단지 탈출이며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단순히 결혼 의식의 집행이 행복과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전등처럼 단지 버튼만 누르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의 상태이며 마음속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며 대가 없이 취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을 편안하고, 화려하고, 항상 흥분되고 매력적인 생활로 생각하지만 참된 결혼 생활은 그것 이상의 행복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고, 봉사하며, 나누고, 희생하고, 비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데서 옵니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자라 온 두 사람은 결혼 의식이 끝나면 곧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환상이나 공상에 젖은 삶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제 환상의 구름 속에서 빠져 나와 현실의 땅에 발을 굳건히 디뎌야 합니다. 책임을 져야 하고 새로운 의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몇 가지 개인의 자유를 포기해야 하며, 여러 가지 면에서 이기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전에는 드러나지 않았거나 발견되지 않았던 배우자의 약점들을 결혼 후에 곧바로 알게 됩니다. 구애 기간에는 한결같이 크게 보였던 덕성들이 이제 상대적으로 점점 작아지고, 아주 하찮게 보였던 약점들은 점점 커집니다. 그 때가 이해하는 마음을 갖고, 자신을 평가하며, 올바른 상식과 이성으로 계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그 동안 갖고 있던 습관들이 이제 드러납니다. 배우자가 인색한 사람이거나 낭비벽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게으른 사람이거나 근면한 사람일 수도 있으며, 신앙이 깊은 사람이거나 신앙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배우자가 친절하고 협조적인 사람이거나, 조급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거나, 자기 중심적이거나 소극적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인척 문제가 점차 표면화 되고 배우자와 그들의 관계가 다시 확대됩니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지 않고, 결혼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을 맡고 싶지 않은 생각도 종종 듭니다. 절약하느라 넉넉한 삶을 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으며, 젊은이들은 종종“최신 유행”을 너무도 따르고 싶어합니다. 때로는 재정적으로 필요한 변화를 거부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젊은 아내들은 성공한 아버지 슬하의 가정에서 누렸던 과거의 모든 사치들을 그들의 가정에서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종종 요구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결혼 후에도 일을 계속하여 그 넉넉한 삶을 위한 수입에 일조하기를 너무도 바랍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의무가 있는 가정을 떠나 직업이나 사업에 관련된 일을 추구함으로써 안정된 재정 상태를 이루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가족 생활을 위해 그것을 포기하기가 어려울 정도가 됩니다. 그러다 보면 두 배우자가 일을 하게 됨으로써 협조보다는 경쟁이 가족 안에 발생합니다. 피곤에 지친 두 근로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그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나름대로의 자부심과 보다 커진 독립의 기회가 있다 보니 오해가 일어납니다. 작은 마찰이 피라미드를 쌓듯이 쌓여 기념탑처럼 커집니다. 빈번하게 배우자들은 죄스런 마음으로 새로운 연애나 과거의 연애로 돌아가 결국에는 피할 수 없게 보이는 단절이 이혼과 함께, 마음의 고통과 함께, 괴로움과 함께, 환멸감과 함께 항상 상처를 남기며 찾아옵니다.

결혼 생활이 어렵고, 사이가 나쁘거나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긴 하지만, 참되고, 지속적인 행복을 가져다주며, 사람의 마음이 느낄 수 있는 것 이상의 더 좋은 환희와 큰 기쁨을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모든 부부, 모든 사람 안에 있습니다. “영혼의 짝”은 허구이며 환상입니다. 모든 젊은 남자와 여자는 부지런히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장 호흡이 잘 맞고 아름다운 짝을 찾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두 사람이 기꺼이 그 값을 치르기만 한다면 누구나 행복하고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확실히 영위할 수 있습니다.

모든 부부에게 행복하고 영원한 결혼 생활을 보장해 줄 결코 실패하지 않는 공식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공식이 그러하듯, 주요한 요소가 빠지거나, 줄어들거나 제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애 이전의 선택만큼이나 결혼 이후에도 지속적인 구애가 중요하지만 결혼 생활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결혼 생활의 성공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합리적인 표준을 기초로 하여 시작된 결혼 생활에서는 어느 배우자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이 지니고 있는 힘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 결혼을 파괴하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나 단체가 좋든 나쁘든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재정적, 사회적, 정치적 및 다른 상황들 역시 서로 관련이 있습니다만, 결혼 생활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항상, 두 배우자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결심을 하고 비이기적이고 의롭기만 하다면 항상 성공적이고 행복한 결혼 생활이 가능합니다.

그 공식은 간단합니다. 관련 요소들은 몇 개 되지 않지만 서로를 극대화시킵니다.

첫째로 결혼에 대한 적절한 접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각 개인에게 중요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 완전이라고 하는 정상에 가능한 한 가깝게 이른 배우자를 심사 숙고하여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두 당사자는 성공적인 공동의 삶을 위해 스스로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성전의 제단으로 가야 합니다.

둘째로 커다란 비이기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잊고 낮추어 가족 생활과 그것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가족의 유익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지속적인 구애와 애정 표현, 친절, 그리고 사랑을 살아 있게 하고 키우기 위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정의된 대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온전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적절하게 잘 섞고 지속적으로 기능을 하도록 할 때, 불행이 닥치거나 오해가 계속되거나 별거를 하게 되는 경우는 정말로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아마 이혼을 다루는 변호사들이 다른 분야로 그 일을 바꾸고 이혼 법정도 폐쇄될 것입니다.

 

결혼 생활에서의 비이기심

결혼 제단으로 다가서는 두 사람은 그들이 바라는 결혼 생활을 얻기 위해서는, 결혼이 모든 것을 보장하는 법적인 행위만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도리어 그것은 희생, 나눔, 나아가 어떤 개인적인 자유의 감소와 길고도 어려운 절약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녀들로 인한 재정적인 짐, 봉사의 짐, 돌보고 걱정하는 짐인 동시에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깊고도 달콤한 정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결혼 이전에 각자는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오가며, 좋아 보이는 대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조정하며,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결정을 내립니다. 연인들은 서약을 맺기 전에 작고 새로운 가족의 유익이 유익에 항상 우선해야 한다는 점을 문자 그대로 충분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각 당사자는 “나” 그리고 “나의”라는 말을 버리고 “우리”그리고 “우리의”라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모든 결정은 그 결정으로 인해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내려져야 합니다. 아내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점에서, 그 결정이 부모, 자녀, 가정, 그리고 그들의 영적인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염려하게 될 것입니다. 남편의 직업 선택, 그의 사회 생활, 친구들, 그의 모든 관심사는 그가 단지 가족의 일부임을 고려하여, 가족 전체를 염두에 두고 결정해야 합니다.

모든 이혼은 결혼 서약에 대한 일방 또는 쌍방의 이기심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편안함, 편리함, 자유, 사치, 혹은 안락함에 대해 생각합니다. 때로 불행, 불만, 이기적인 배우자에 대해 끝도 없이 늘어놓는 불평은 결국 심각한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지기까지 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너무나 잘못된 일을 하면서도 정당성을 느낄 정도까지 벗어나기도 합니다. 물론 죄를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때때로 아내 또는 남편이 무시되고 학대 받고 또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게 된 나머지 거듭해서 실수를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잘못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한 배우자가 완전함과 황금률의 잣대로 자주 자신을 분석해 보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측정해 본다면, 그리고 각 배우자가 상대방이 갖고 있는 차이점들을 고쳐 나가기 시작하기보다 그러한 분석에서 발견하게 되는 모든 차이점들에서 자신을 고쳐 나가기 시작한다면, 그 때에는 변화와 행복이라는 결과가 올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있는 구주의 비유를 기억해야 할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결혼한 사람들 중에 많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덕성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이 지닌 장점에 대해 과장하고 그것들을 배우자가 지닌 약점들과 대비시켜 저울질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는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하고 내가 지닌 것의 십일조를 내고 있어”라고 말합니다.(누가복음 18:12 참조)

모든 마찰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불행이 있는 곳에서 각자는 원인 또는 그 원인의 일부가 자신에게서 비롯되지는 않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결혼 생활이 항상 평탄하고 순조로울 수는 없지만 커다란 평화일 수는 있습니다. 부부가 빈곤하고, 병을 앓고, 실망을 하고, 실패를 하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그들에게서 그 평화를 빼앗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기심이 들어오지 않는 한, 결혼 생활은 성공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비이기심을 지닌다면, 어려움과 문제들은 부부로 하여금 깨뜨릴 수 없는 단합을 이루게 할 것입니다.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 이혼이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빈곤, 실패, 실망 등 이러한 것들이 부부를 서로 묶어 주었습니다. 번영이 파괴시킬 수 있는 관계를 역경은 굳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기심에 기초를 둔 결혼 생활은 거의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부나 명성이나 사회적 지위를 보고 결혼한 사람은 틀림없이 실망합니다. 허영심과 자만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결혼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과시하기 위해 결혼한 사람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행복을 주고받기 위해, 봉사를 주고받기 위해, 두 사람의 이익은 물론 자연히 오게 되는 가족의 이익을 위해 결혼한 사람은 결혼 생활이 행복한 것이 될 훌륭한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혼을 담당하는 변호사를 찾아서 그들의 결혼을 끝내지는 않더라도, 결혼을 활력이 없고, 보잘것없고 또 값싸게 내버려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숭배와 예배의 보좌에서 떨어져서 단지 가정에 함께 거하며, 식탁에 함께 앉고, 쉽게 나눌 수 없는 어떤 것들을 함께 소유하는 정도의 낮은 상태에 있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어려움으로 이르는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결혼 생활이 다시 아름답고, 달콤하고, 커질 수 있도록 그들의 구애를 다시 평가해 보고 새롭게 하며, 자신들의 애정을 표현하고, 친절함에 감사를 표하고, 자신들의 배려를 키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사랑은 꽃과 같으며, 신체와 같이 지속적으로 영양을 필요로 합니다. 육신에게 자주 영양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곧 약하게 되어 죽을 것입니다. 영양분과 물이 없다면 아름다운 꽃은 시들어 죽습니다. 또한 사랑도 마찬가지여서 사랑과 존중하는 마음, 칭찬, 감사의 표현, 그리고 비이기적인 배려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먹이지 않는다면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비이기심은 분명히 성공적인 결혼 생활의 또다른 요인을 만듭니다. 만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유익과 편안함, 그리고 행복을 영원히 구한다면, 그 구애 관계에서 존재하고 또 결혼 관계에서 단단히 굳어진 사랑은 강력한 관계로 성장할 것입니다. 많은 부부들이 그들의 결혼 생활을 활기 없게 내버려두고 또 그들의 사랑을 오래된 빵처럼 차갑게 놓아 두거나, 흔해 빠진 농담이나 식은 국물처럼 되게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랑에 가장 중요한 음식은 배려, 친절함, 사려 깊음, 관심, 애정 표현, 감사로 껴안음, 칭찬, 자부심, 동반자 정신, 신뢰, 신앙, 협력 관계, 동등함, 그리고 상호 의존 등입니다.

결혼 생활에서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속적으로 준수해야 합니다. 독신이건 결혼했건 간에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이 의롭지 않는 한 행복하지 않습니다. 일시적인 만족과 순간적으로 위장된 상황은 있을 수 있으나 항구적이고 완전한 행복은 오직 깨끗함과 합당함을 통해 올 수 있습니다. 깊은 종교적 확신을 가지고 일정한 종교 생활을 하던 사람은 저활동 상태에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양심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며, 그런 경우에 결혼 생활은 이미 위험에 빠진 것입니다. 찔림을 받은 양심은 생활을 거의 참을 수 없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저활동 상태, 특히 양당사자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활동일 경우 결혼 생활에 치명적입니다.

종교적 차이는 모든 차이 중에서도 가장 큰 시련을 가져다주고 또 가장 풀기 어려운 과제입니다.

 

결혼 제도의 신성함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사회의 풍습이 아닙니다. 합당하고 성공적인 결혼 생활이 없다면, 사람은 결코 승영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결혼하는 것이 옳고 합당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참되고 사려 깊고 명석한 후기 성도가 되겠다는 결심이, 그 길에 방해물들이 놓여지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세심하게 계획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심각한 실수를 하는 순간 그 길에 장애물을 놓게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을 제거하지 못해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인 영생과 하나님처럼 되기 위한 길을 막아 버릴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삶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또 자신들의 삶보다도 서로를 사랑하며, 함께 힘을 합하여 자신들의 기초적인 구조물인 복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면, 그들은 분명 위대한 행복을 갖게 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자주 거룩한 성전에 가고,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며, 손을 잡고 교회 모임에 참석하며, 정신적 및 신체적인 면에서 자신들의 삶을 완전하고 순결하게 지킨다면, 그들의 온전한 생각과 소망, 그리고 사랑은 오직 한 사람, 그 동반자에게 모든 중심을 두게 되며, 두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함께 일하게 되어 행복이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결혼 생활에는 다른 결합이 있습니다.

“네 온 마음을 다하여 네 아내를 사랑하여 그와 결합하고 다른 아무와도 결합하지 말지니라.[교리와 성약 42:22]

이것은 “온 마음을 다하여 남편을 사랑하여 결합하며 다른 아무 남자와도 결합하지 말라.는 것과 완전히 같은 의미입니다. 자주 사람들은 그 아버지와 그 어머니, 그리고 친구들과 계속해서 결합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어머니들은 과거에 자녀들에게 갖고 있던 영향력을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남편뿐 아니라 아내도 조언과 권고를 얻기 위해, 그리고 마음을 털어놓기 위해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돌아가는데, 사실은 거의 모든 일에서 결합은 남편과 아내와 해야 하며 모든 애정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는 은밀한 비밀로 그리고 사생활로 지켜야 합니다.

부부들은 양가 집안의 가정과 별도로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자신들만의 가정을 즉시 꾸미는 것이 좋습니다. 가정은 매우 수수하고 소바할 수도 있으나 그래도 독립적인 거처입니다. 여러분의 결혼 생활은 아내나 남편의 일가 친척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합니다. 다른 때보다도 여러분은 그들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권고를 소중히 여깁니다. 여러분은 그들과의 관계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마땅히 권고를 주어야 할 사람들에게서 권고를 받은 후에는 바로 여러분 자신의 결정과 여러분 자신의 기도를 통한 고려에 의해 여러분 자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결합한다는 것이 단지 같은 가정에 같이 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로 결합하며, 함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즉 … 둘이 한 몸을 이룸은 적법한 일이니, 이 모든 것은 땅이 그 창조의 목적에 부응하게 하려 함이요,

“또 세상이 지음을 받기 전의 사람의 창조에 따라 그 수로 가득 차게 하려 함이니라.[교리와 성약 49:16~17]

우리 자신의 기록도 우리를 기쁘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기록은 31,037건의 결혼 가운데서, 단지 14,169건의 결혼만이 영원을 위해 성전에서 행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6퍼센트입니다. 7,556명의 회원들이 교회 밖에서 결혼했습니다. 이런 결과는 우리를 무척이나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24퍼센트에 해당되는 숫자로 이것은 약 9,000명 또는 30퍼센트가 명백하게 자신들과 그 후손에 대해 별 생각도 없이, 그들에게 영생의 열쇠를 주는 성전 밖에서 결혼했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모르는 것입니까, 아니면 관심이 없는 것입니까?

물론 교회 및 성전 밖에서 결혼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언급한 조사 결과는 일곱 명의 비회원 배우자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개종하여 교회로 들어온다는 점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손실입니다. 많은 경우에 침례 받지 않은 배우자를 잃어버리는 것일뿐더러 그들의 자녀들과 나아가 때로는 다른 배우자까지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 이후에 교회에 들어온 몇몇 분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찬사를 드리며 그분들을 존경하지만 형세는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위의 자료에 따르면, 거의 6,500건에 이르는 새로운 결혼에서 결국엔 두 당사자들이 교회에 들어와 가족을 온전하게 결합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점이 우리를 매우 슬프게 합니다. 사람들이 결혼 생활에서 동등하지 않은 멍에를 짊어진다면 가족을 위한 주님의 프로그램을 충만하게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성전 결혼을 위해 진지하고도 강한 결심을 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런 결심은 기쁨과 행복이 수반되는 영원한 결혼이라는 풍성한 약속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며, 그분은 여러분을 너무나 믿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분이 계획하신 길에서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전에서 몇가지 성구를 인용하고 싶습니다.

“해의 왕국에 들어오는 각 사람에게는 흰 돌 하나가 주어지나니, 그 위에 새 이름이 쓰여 있으며, 그것을 받는 자 외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그 새 이름은 열쇠가 되는 말이니라.[교리와 성약 130:11]

결혼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결혼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온전한 정상인이 아닙니다. 이 점을 기억하십시오.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린도전서 11:11]

어떤 사람도(해의 왕국의 결혼에 관한) 이 성약을 거부할 수 없으며, 거부하고서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해의 영광 안에는 세 하늘 곧 세 등급이 있느니라.

“가장 높은 것을 얻기 위하여서는 사람이 신권의 이 반차[새롭고도 영원한 결혼 성약을 의미함]에 들어가야 하느니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면, 그는 그것을 얻을 수 없느니라.

“그가 다른 곳에는 들어갈 수 있으려니와, 그것이 그의 왕국의 끝이니, 그는 증식할 수 없느니라.[교리와 성약 131:1~4]

“보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새롭고도 영원한 성약을 계시함이니, 만일 너희가 그 성약을 지키지 아니하면, 너희는 정죄를 받느니라.[교리와 성약 132:4]

정죄 받는다는 말은 발전이 멈춘다는 뜻입니다.

다음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에 관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새롭고도 영원한 성약에 관하여 말하건대, 이는 나의 영광의 충만함을 위하여 제정되었나니, 그 충만함을 받는 자는 그 율법을 반드시 그리고 마땅히 지켜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장가들거나 시집가는 일이 없고, 다만 하늘에서 천사로 임명되나니, 이 천사들은 섬기는 종들로서, 훨씬 더 크고 뛰어난 영원한 영광의 무게에 합당한 자들을 위하여 섬기는 자들이니라.

“이는 이들 천사는 나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은 커질 수 없고 모든 영원에 걸쳐 승영함이 없이 구원 받은 상태로 따로 떨어져 홀로 있게 되나니, 이후로는 신이 아니요, 다만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의 천사니라.[교리와 성약 132:6, 16~17]

 

끝으로 한 가지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받은 것은 무엇이든지 모든 것을 계시와 계명에 의해, 나의 말에 의하여 받았고 자기의 승영에 들어가 자기 보좌에 앉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아브라함의 일을 하라. 너희는 나의 율법에 들어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교리와 성약 132:29, 32]

 

형제 자매 여러분,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대하며 어느 누구도 그것에 관해 주님과 논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이 땅을 만드셨습니다. 사람도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프로그램을 만드셨으며, 우리는 이 중요한 일들에 관해 그분과 논쟁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지적이거나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무엇이 옳고 참된지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들에 관해 생각해 볼 것을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학생 여러분, 여러분의 결혼이 올바른지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의 생활이 올바른지 확인하십시오. 결혼 생활에서 여러분의 역할을 합당하게 이행하고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이혼이 너무나 많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상당히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족 안에서 조그만 위기가 있거나 조그만 말다툼이 있자마자, 이혼에 관해 이야기하고 변호사에게 달려가서 상담을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길이 아닙니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의 문제를 조정하고 우리의 결혼 생활을 계속되게 하고 달콤하고 복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결혼 이전에나 결혼 이후에 어떤 결정에 직면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축복해 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여러분 각 사람에게 그분의 축복이 임하기를 간구드리며, 이 교회가 참되고 신성하다는 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증 드립니다. 아멘.

(결혼과 이혼, 스펜서 더블류 킴볼 회장, 1976년 9월 7일, BY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