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한 가지": 그리스도에 대한 더 큰 신앙을 지닌 여성이 됨, 패트리시아 티 홀런드, Ensign 1987년 10월★]

"필요한 한 가지":그리스도에 대한 더 큰 신앙을 지닌 여성이 됨
“One Thing Needful”:Becoming Women of Greater Faith in Christ

    패트리시아 티 홀런드 자매

   (필요한 한 가지: 그리스도에 대한 더 큰 신앙을 지닌 여성이 됨, 패트리시아 티 홀런드 자매, 이전 본부 청녀 회장단, Ensign, 1987 10월호, 26~33)

1986 4월 본부 청녀 회장단으로부터 해임된 직후 저는 이스라엘에서 일주일을 보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의 2년은 저에게 대단히 어렵고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 과업에서 성공할 충분한 시간을 가진 훌륭한 어머니가 되는 것이 항상 저의 첫째되는 우선 순위였으므로, 저는 한 명의 초등학생, 한 명의 고등학생,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는 아들의 훌륭한 어머니가 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저는 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바쁜 대학 총장의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사무실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만큼 본부 회장단의 보좌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원칙들을 수립하고 프로그램들을 시작하는 중요한 과정에서 저는 제가 충분히 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약간 더 빨리 달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저의 2년 임기의 끝 무렵에 저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계속 체중이 줄고 있었고 잘 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 남편과 아이들은 제가 그들을 돌보려고 애썼던 것과 같이 저를 돌보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모든 것을 더 잘 관리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계속해서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사랑에 넘치는 총관리 역원들이 지켜보고 계셨고 사랑에 찬 해임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저의 봉사 기간이 끝난 것을 감사했지만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렇게도 사랑하게 된 여성들과의 교제 기회의 상실 때문에, 고백컨대, 약간의 자아 상실까지 느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요구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저는 누구였고 저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인생은 이 모든 것만큼 힘들어야 합니까? 서로 경쟁하는 것 같은 저의 몇 가지 임무에 있어서 저는 얼마나 성공적이었습니까? 아니면 제가 그 모든 것들을 망쳐놓았나요? 저의 해임 후의 며칠은 거의 그 이전의 몇 주만큼이나 힘들었습니다. … 저는 더 견딜 힘이 없었습니다. 저의 연료 탱크는 고갈되고 있었고, 어디에서든 주유소를 찾을 확신이 없었습니다.

불과 몇 주 후에 저의 남편이 제가 말씀드린 예루살렘에서의 그 지명을 받았고, 그 임무로 여행하는 총관리 역원들께서 저에게 남편과 동행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갑시다. 당신은 생명수와 생명의 떡의 구주의 땅에서 회복할 수 있어요.” 몹시 지쳐 있었지만, 저는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병고치는 휴식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혹은 적어도 희망하면서 짐을 쌌습니다.

청명하게 맑고 아름다운 화창한 날에 갈릴리 바다를 굽어보면서 누가복음 10장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 쪽의 말씀 대신에 저는 이런 말씀을 제 마음으로 보고 제 가슴으로 듣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패트야, 패트야, 패트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런 다음 “그러나 한 가지(단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는 말씀을 읽을 때 순수하고 개인적인 계시의 힘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누가복음 10:38~42 참조)

이스라엘의 5월의 태양은 너무나 밝게 빛나기 때문에 마치 세상의 꼭대기에 앉아있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나는 그때 여호수아를 위해 “태양이 머물러 있었던” 아얄론 골짜기에서 막 돌아온 길이었으며, 참으로 그 날 나를 위해서도 태양이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하며 앉아 있는 동안 그 때와 똑같이 태양의 치유해 주는 광선이 따뜻한 액체처럼 제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와서 저의 근심하는 영혼을 쉬게 하고 평온하게 하고 위로해 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저의 인생에 대해 좀더 높은 차원의 관점으로 승화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에게 이렇게 속삭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일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느니라. 정말로 필요한 단 한 가지는 네 눈이 계속해서 태양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니라. 내 아이야. 갑자기 저는 지극히 평화로운 느낌이 들었으며 저의 생활이 첫 시작부터 항상 그의 손 안에 있어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눈 앞에 평화롭게 누워 있는 그 바다는 태풍에 흔들리고 위험한 적이 많았습니다. 제가 해야 할 것이라고는 저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그의 손을 꼭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함께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숙고해야 할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여성으로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으로부터 더 큰 신앙의 여성이 되는 것으로 도약합니까? 한 마음의 틀이 분명히 다른 마음의 틀을 부정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신앙과 두려움은 오랫동안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염려하게 만드는 것들 중의 몇 가지 것을 생각해 봅시다.

 

저는 네 개의 와드에서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봉사했습니다. 이 와드 중의 둘은 독신 여성을 위한 와드였고, 둘은 젊은 어머니들이 많은 와드였습니다. 제가 독신 자매들과 함께 앉아서 상담하는 동안 그들이 자신의 외로움과 실망의 느낌을 저에게 설명하는 동안 저의 가슴이 종종 아팠습니다. 그들은 결혼과 가정 생활을 그렇게 강조하는 교회에서 자신들의 삶은 아무런 의미나 목적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그들의 독신 상태가 그들 자신의 잘못이며, 때로는 심지어 이기적인 욕망 때문이라고 암시하는 말들을 듣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평화와 목적-자신의 생활을 바칠 진정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간절히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어머니들도 그에 못지 않은 염려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점점 더 어려운 세계에서 자녀를 키우려고 애쓰지만, 그들이 항상 생존하기 위한 벼랑 끝에 몰려 있기 때문에 가치 있는 사람처럼 느낄 충분한 시간이나 수단이나 자유를 결코 갖지 못하는 그 어려움들을 저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봉급을 인상해 줄 사람도 없었고 그들의 남편 이외에는 (그들도 그렇게 한 것을 기억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는) 잘한 일에 대해 칭찬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피곤했습니다. 이 젊은 어머니들과 관련하여 제가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는 한 가지는 그들은 항상 피곤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자신이 재정적으로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모든 다른 면에서 자기 가정의 유일한 부양자가 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직면한 그 시련을 이해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명백히 몇 가지 면에서 그들의 상황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여성들이 염려하는 것들을 들으면서 제가 얻은 것은 미혼이든, 기혼이든, 이혼했든, 미망인이든, 주부이든, 전문가이든 간에 단 한 명의 여성도 혹은 여성의 단 한 집단도 모든 염려를 독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겪어야 할 많은 시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엄청난 축복도 있다는 것을 덧붙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각 특권들과 축복들이 있고 두려움과 시련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외람되게 보일지 모르지만, 세계의 역사상 과거 어느 때에도 후기 성도 여성들을 포함하여, 여성들이 그들의 염려에 있어서 오늘날과 같이 더 큰 복잡성에 직면한 적은 결코 없었다는 것을 상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여성 운동이 어머니 이브 이래로 또 그 이전부터 우리가 소유해 온 한 가지 복음 원리, 즉 선택할 권리인 선택의지에 대해 더욱 잘 이해하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선택의지의 문제에서 우리가 직면해 온 가장 불행한 부작용 중의 하나는 오늘날 점점 더 다양해지는 여성들의 생활 방식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불확실해지고 서로에게 더 불안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 동안 우리를 지탱해 주고 우리에게 힘을 주어온 공동체 의식과 자매애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쟁은 늘어나고 서로에 대한 관대함은 줄어드는 것같이 보입니다.

과일과 야채를 통조림으로 만들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은 궁핍한 시기에 그리고 우리의 불확실한 경제 속에서는 거의 어느 때나 그들에게 도움이 될 한 가지 기술을 개발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복숭아를 사는 사람들이나, 35가지 방식으로 요리할 수 있는 주끼니(서양 호박)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단순히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어떤 다른 목적에 사용하겠다는 의식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제 인생의 3/4 동안 저는 바느질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저는 바느질을 할 수 있고 꼭 필요하면 바느질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싫어합니다. 지난 25년 혹은 30년 동안 상호부조회 모임에서 “할 수 있는 체 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여섯 명의 어린 소녀들이 비슷한 복장을 한 어머니 앞에서 무리지어 들어오면서 손으로 바느질한 똑같은 옷을 입고 교회로 걸어 들어올 때-모두 에이프런을 달고 레이스를 달고 리본을 달고 스커트의 단을 달고-그들에게 미소지으려고 노력하면서 제가 느낀 부담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제 태도가 유덕하고 사랑할 만하고 듣기 좋으며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느질에 대한 저의 반감에 대해선 솔직합니다.

저는 그런 날들 이래로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약간 성장했습니다. 저는 지금 자신의 자녀를 위해 바느질을 할 수 있는 어머니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또 제가 바느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의식을 느끼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요점은 우리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서로를 혹은 우리 자신을 그렇게 가혹하게 판단하는 것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꿀단지도 우리에게서 사랑과 자매애를 빼앗아가는 반목 상태를 지닐 만큼의 가치는 없습니다.

명백히 주님께서는 우리를 각기 다른 개성뿐 아니라 각기 다른 정도의 에너지, 관심, 건강, 재능, 기회를 가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의와 충실한 헌신의 생활을 하는 데 전념하는 한 우리는 이런 신성한 차이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무서워하고 그렇게 위협 받고 불안하게 느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정 받기 위해 우리 자신의 정확한 복제물을 찾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를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많지만 우리의 단합을 위해서는 한 가지만이 필요한데,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감정 이입과 동정입니다.

 

저는 베티 프라이던이 사회를 뒤흔들었던 책, ‘여성 신비’를 출판한 바로 그 해인 1963년에 결혼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 온화한 1940년대와 50년대의 추억들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여러분에게 친근하고 여러분에게 역할 모델이 되어 준 이웃들을 위해 준비된 생활 방식을 따르는 것이 훨씬 편안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잘못이 없는데 결국 혼자가 되고, 일을 해야 했고, 혹은 결손 가정에서 시달리게 된 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점점 더 복잡한 세상에서 그 이전의 모델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우리는 심지어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덜해지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이십 세기 후반부처럼 여성들이 자신의 가치에 대해 가혹하고 비판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적은 없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거의 광적으로 개인적인 목적 의식과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으며, 많은 후기 성도 여성들도 자신의 여성됨에 대한 영원한 통찰과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사탄이 되어 사회를 파괴시키기를 원한다면 우선 여성에 대한 대규모 공격부터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극도로 분노케 하고 산란케 하여 언제나 여성의 고유한 특성으로 알려져 온 평온하게 하는 힘과 평정을 결코 찾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 것입니다.

사탄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해서 실제로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과 하나님께서 주신 독특한 잠재 능력을 달성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오히려 초인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 스스로 느끼도록 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 모든 것을-명예, , 가족, 즐거움을, 그리고 그것을 항상-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축복을 덜 받은 것이며 인생의 경주에서 이등 시민이라고 속입니다. 하나의 성으로서 우리는 고전하고 있고 우리의 가족도 고전하고 있고, 우리의 사회도 고전하고 있습니다. 마약, 십대 임신, 이혼, 가정 폭력, 자살은 현대가 기대하는 완벽한 여성이 되기 위한 시도에서 끝없이 늘어나는 부작용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중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전하며 고통 받고 있고, 자신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힘보다 더 빨리 달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진단서에도 나오지 않는 새로운 스트레스 관련 병들을 앓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엡스타인 바르 바이러스가 1980년대의 질병으로서 우리의 인기있는 의학 용어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환자들은 미열, 관절통, 때로는 목구멍 통증으로 고통 받지만 그들은 독감에 걸린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극도로 지치고 허약하고 쇠약하지만 에이즈는 아니다. 그들은 종종 혼동되고 건망증이 있지만 치매는 아니다. 많은 환자들이 자살 충동을 느끼지만 임상적인 우울증은 아니다. 여성 환자가 남성 환자의 약 3배이며, 스트레스가 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적이며, 높은 성취욕을 가진 사람들이다.(뉴스위크, 1986년 10월 27일, 105)

 

우리는 완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동안에도 불완전을 극복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 여권주의자 서적들, 좌담회 사회자들, 혹은 전체 언론 문화가 우리에게 상품을 의도적으로 속여 팔도록, 더 정확히 말해서, 없는 상품을 속여 팔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정체성과 자기 존중심에 대한 모색에 있어서 너무나 궤도를 벗어나서 완전한 몸매나 학위나 전문적인 지위나 심지어 절대적인 어머니로서의 성공에서 그것이 발견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외적인 것에 치중한 나머지 우리의 진정한 내적이고 영원한 자아는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 그들을 위해 연기하는 것에 너무나 신경을 쓴 나머지 우리의 독특함 즉 가치와 개성을 지닌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겁먹고 불안해져서 우리 이웃들의 다양성과 개성, 그리고 문제점들에 대해 관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불안을 안고 있는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고 삶을 지탱해 주는 그 핵심으로부터 붕괴되는 동안 무력하기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요동하”는(에베소서 4:14) 돛이나 키가 없는 바다의 배와 같습니다. 그 결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심하게 멀미를 하게 됩니다

어떤 바람이 불든지 “침착하게 키를 잡아라”는 일등 항해사의 의기양양한 함성과 함께 우리의 배를 항해하게 해 주는 그 확실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아끼고 전통적으로 알려진 여성 내부의 평온함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육체적인 선입관, 초능력적인 여성의 성취들, 끝없는 인기 경쟁으로부터 떠나서, 인생의 시련과 필연적인 다양성에 균형을 잡아주는 우리의 존재 그 자체 내의 단합으로 돌아감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굳건한 발판과 영혼의 평정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와 신앙은 다르지만 제가 좋아하는 저서를 쓴 그 여성의 이름은 앤 모로 린드버그입니다. 그녀는 우리 시대의 여성의 절망과 전반적인 고통에 대해 이렇게 언급합니다.

“여권 운동가들은 충분히 멀리 내다보지 못했다. 그들은 행동 규칙을 정하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그 특권들을 요구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여성은 여전히 무엇을 찾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배고픔과 욕구들을 알지만 무엇이 그것들을 충족시켜 줄지는 아직 모른다. 우리는 모은 자유 시간으로 자신의 창조의 샘을 다시 채우기보다는 고갈시키는 경향이 더 많다. 우리는 손에 든 주전자로 정원이 아니라 밭에 물을 주려고 시도한다. 우리는 위원회들과 여러 가지 주의와 주장에 무차별적으로 몰입한다. 영을 먹일 방법을 몰라서 우리는 그것의 요구를 혼란으로 덮으려고 시도한다. 그 바퀴의 축인 중심을 진정시키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 더 많은 원심 분리 활동을 첨가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를 더욱더 균형을 잃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지난 세대에 기계적으로는 얻었지만 영적으로는 잃었다.

시대가 어떻든지 “여성의 문제는 여전히 어떻게 영혼을 먹이느냐이다.라고 그녀는 덧붙여 말합니다.(바다로부터의 선물, 뉴욕: 판데온 출판사, 1975, 51~52)

 

벤슨 회장님은 최근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건강이 영에 영향을 미침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주님은 결코 지혜의 말씀을 계시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세속적인 계명도 결코 주시지 않으셨습니다.우리의 육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훌륭하게 균형 잡히신 분이시므로 우리는 어쩌면 균형을 잘 잡을 때 그분에게 그만큼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영혼의 단합 즉 우리의 “중심의 평정”은 어떤 노력이라도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자신의 영혼 속에 내재해 있는 그 영광스러운 가능성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1)는 그 신성한 약속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바깥 껍질인 인간의 육신과, 이 육신이 움직이는 허약하고 너무도 변덕스러운 세상에, 너무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이 우리 내부에 있다는 것을 잊습니다.

 

제가 여러 해 전에 읽은 어떤 것으로부터 만들어낸 한 비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내적인 힘과 영적인 성장의 점검에 있어서 그 당시의 저에게 도움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도움이 됩니다.

그 비유는 아름답게 새겨졌지만 매우 단단히 잠궈진 상자 속에 놓여진 한 영혼, 모든 훌륭함을 다 갖춘 인간의 영혼에 관한 비유입니다. 가장 깊은 상자의 내부에서, 위엄 속에서 통치하시고 우리의 영혼에 빛을 비춰주시는 분은 하나님의 살아 계신 아들인 우리의 여호와, 우리의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 다음 이 상자는 더 큰 다른 것 안에 놓여지고 잠겨져 있는데, 그런 식으로 계속되어 다섯 개, 아름답게 새겨져 있지만 매우 단단히 잠겨진 상자들이, 그것들을 열기에 충분히 솜씨 있고 현명한 여인을 기다립니다. 주님과 자유로운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그 열쇠를 찾고 이 상자의 내용물들을 열어야 합니다. 성공하게 되면 그녀 자신의 영혼의 아름다움과 신성함, 하나님의 딸로서의 그녀의 은사들과 은혜가 그녀에게 계시될 것입니다.

 

저에게는 기도가 그 첫 상자의 열쇠입니다. 무릎을 꿇고 우리의 과제들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고, 그런 다음 일어나서 그 첫 번째 자물쇠가 이제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위적인 기적으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한 빛과 영원한 확실성들을 모색하려 한다면, 고대의 사람들이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고 여인이므로 성숙함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긴박한 기도와, 열렬한 기도를 묘사하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되는 말들은 씨름하다, 호소하다, 울부짖다, 굶주리다 입니다. 어떤 면에서, 기도는 우리가 행할 가장 힘든 일일지도 모르며 어쩌면 그래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적인 소유물들과 명예와 지위에 너무나 몰두해서 우리의 영혼에 대한 모색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게 되는 것을 막는 중요한 보호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노스처럼 신앙으로 기도하고 자신의 잠재적인 신성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사람은 두 번째 상자로 인도됩니다. 여기에서는 우리의 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같이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기록된 가르침들을 위해 경전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분명히 이 교회의 모든 여성은 배우고 성장하고 발전할 거룩한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연마되지 않은 다양한 재능의 집합체로서, 우리는 이런 은사를 파묻거나 우리의 빛을 숨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지라면 우리가 배우는 것은, 특히 경전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우리를 그분을 향해 뻗어나가게 합니다.

그분은“생명수”와“생명의 떡”같은 거룩한 영향력에 대한 많은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저는 만일 제 자신의 발전이 정지된다면, 그것은 매일 그분의 거룩한 경전을 먹고 마시지 않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영양 실조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한 순간만 주목하여 밤낮으로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침대 머리맡과 손가방 안에 경전을 두지 않았더라면 저를 완전히 파괴했을 도전들이 저의 생애에 있었습니다. 경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저의 아들이 천사의 끈이라고 묘사한 해의 왕국의 정맥 주사이며, 저를 위한 신성한 영양 주사 같았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해방시키는 데 있어서 그와 같은 성공의 시초에는 특히 우리가 세 번째 상자에 접근할 때 루시퍼가 더욱 초조해집니다. 그는 우리가 진실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신을 잃어버려야 한다는, 대단히 중요하고 근본적인 원리를 배우려는 찰나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과 자신을 사랑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지난 십 년 동안 사탄은 모든 인간이 그들의 거의 모든 에너지를 낭만적인 사랑이나 물질에 대한 사랑이나 과도한 자기애의 추구에 바치도록 유혹해 왔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적절한 자기애와 자아 존중이 다른 사람을 우선하는 것에 대한 약속된 보상이라는 것을 잊습니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누가복음 17:33) 세 번째 상자는 사랑의 열쇠에게만 열립니다.

사랑으로 진정한 성장과 순수한 통찰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네 번째 상자의 뚜껑은 거의 침투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불행히도 마음 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들은 종종 여기에서 돌아섭니다. 가는 것은 너무 어렵고 자물쇠는 너무 튼튼한 것같이 보입니다. 이것은 자아 평가를 위한 시간입니다. 우리 자신을 실제의 자신 그대로 보는 것은 종종 고통을 가져오지만 우리는 참된 겸손, 회개, 새로워지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마태복음 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약점을 극복하는 동안 자신에 대해 인내심을 가져야 하며, 우리 내부의 선한 모든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내부의 자아를 강화시켜 주고 우리를 외적인 칭송에 더 적게 의존하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공개적인 칭송에 관심을 더 적게 기울일 때 공개적인 반대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경쟁과 질투와 시기는 이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구주처럼 우리의 진정한 욕구가 우리 자매들 사이에서 최소의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우리의 여성 사회에 존재하게 될 그 강력한 영을 상상해 보십시오. 여기에서의 보상은 너무나 심오한 힘과 조용한 신앙의 승리이어서 우리는 심지어 더 밝은 영역으로 옮겨집니다. 따라서 다른 것들과는 달리 네 번째 상자는 상한 심령이 깨지듯이 깨져서 열립니다. 우리는 지구의 깨진 틈으로부터 자라서 피는 꽃과 같이 다시 태어납니다.

다섯 번째 상자를 여는 저의 느낌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 위해, 우리 영혼의 아름다움을 성전의 거룩함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유행과 지위와 직업이 무시되는 곳인, 이 세상의 환경이 아닌 그 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정박시켜 줄 평화와 고요함과 평정을 발견할 기회를 갖게 되는데, 이는 그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렛의 형제처럼 그 거룩한 존재의 중심지로 장막을 뚫고 들어갈 용기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이더서 3:6~9 참조) 있는, 정오의 태양보다 더 눈부신 밝음을 마지막 상자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온전함 즉, 거룩함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다섯 번째 상자의 입구에서 말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거룩함.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 저는 여러분이 거룩하고, 신성이 여러분 안에 거하면서 발견되고 해방되고 확대되고 입증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저는 우리 교회 내의 여성들이 자신을 알려고 그렇게 애쓰는 이유는 신성한 여성 역할 모델이 없기 때문이라고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어머니가 계시다고 믿습니다. 연차 대회에서 하신 스펜서 더블류 킴볼 회장님의 말씀을 인용하겠습니다.

“우리는 교리가 담긴 찬송-“오 높은 영광 보좌”(찬송가 139)를 부를 때 어머니의 최고의 정숙을 알 수 있으며 하늘에 계신 어머니의 여왕다운 우아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어머니가 우리를 이 곳에 오게 하였다는 것을 알고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생활할 때, 하나님 어머니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력이 그보다 더 적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성도의 벗, 1978 10월호, 6)

저는 하늘의 우리 어머니께서 왜 우리에게 베일로 가려 있는가라는 의문을 결코 제기한 적이 없는데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 주제에 대해 그분이 해오신 것만큼 적게 계시하시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를 갖고 계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는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본성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지식을 표현하고, 그것을 우리의 젊은 자매들과 딸들에게 가르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힘든 후일의 혼란을 헤쳐 나가도록 그들의 신앙을 강화시켜 주고 그들을 돕는 것은 우리의 신성한 의무입니다. 몇 가지 예를 지적하겠습니다.

주님은 청사진 없이 이 외롭고 황량한 세상에 우리를 두시지 않았습니다. 교리와 성약 52편에서 우리는“너희가 속지 아니하도록 모든 일에 규범을 주노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읽습니다.(14) 그분은 분명히 우리 여성들을 그 약속에 포함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성경, 몰몬경, 교리와 성약 및 값진 진주를 통해 여러 가지 규범을 주셨고, 또 성전 의식을 통해서도 여러 가지 규범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규범에 대해 연구하는 동안 계속해서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는 이런 특별한 말씀을 바로 이런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을 선택하셨을까?”우리는 그분이 자신의 영원한 방식들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비유, 상징, 우화, 은유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고뇌를 너무나 잘 비유하는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확대해서 이 경험에 있어서의 사라의 고뇌에 대해서도 질문합니까?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고 언제나 더 깊은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비유와 상징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흐나 모차르트 곡에서 발견할 그런 것들과 같은 주제들과 동기들을 찾아보아야 하며,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한 가지 명백한 패턴은 성경과 몰몬경이 모두 가족 갈등을 포함하여 가족을 주제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이것이 단지 그 특정한 부모나 그 특정한 자녀들의 이야기 이상의 것으로서 가족에 대한 영원한 어떤 것을 상징한다고 믿어 왔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모두 기혼이든, 미혼이든, 자녀가 있든 없든,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아담과 이브 같은 어떤 것, 가인과 아벨 같은 어떤 것을 봅니다. 기혼이든 미혼이든 자녀가 있든 없든 우리는 모두 리하이, 새라이아, 레이맨, 니파이, , 나오미, 에스더, 힐라맨의 아들들, 이스마엘의 딸들의 느낌을 다소나마 갖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양육하면서 보여 준 것은 부모로서의 헌신의 유형이며 그림자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한 유형과 그림자, 즉 우리 자신의 필멸의 상태의 기쁨과 슬픔의 예표입니다. 저에게는 이 모든 것이 더 높은 원리들과 진리들의 상징물들, 기혼이든 미혼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가족이 있든 없든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기 위해 신중하게 선택된 상징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명백히 성전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단어들과 상징물들의 조심스런 선택에 대해 몇 달 전에 그 곳에서 경험했던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어떤 것도 성전 밖에서 부적절하게 말해지지 않도록 저의 단어들을 신중하게 선택했습니다. 저의 인용문들은 출판된 경전으로부터 발췌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연의 일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연의 일치는 하나님께서 익명으로 남아 있기로 선택하시는 작은 기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제가 성전에서 기다리는 동안 한 할아버지 옆에 앉았는데 그분은 예상치 않게, 그러나 상냥하게 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창조의 분명한 모습을 원한다면 아브라함서 4장을 읽으세요.” 제가 아브라함서를 펼치기 시작했을 때 저는 우연히 모세서 3 5절을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내가 말한 만물이 지면에 육에 속하기 이전에 나 주 하나님이 그것들을 영적으로 창조하였음이니라. 또 하나의 예표의 메시지-필멸의 상태의 창조물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영적인 패턴. 그런 다음 저는 아브라함서 4장을 주의깊게 읽고 그 기회를 이용해 예비 의식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제 마음 속에서 그렇다는 것을 항상 알아온 어떤 것, 즉 남성과 여성은 신권의 여러 가지 축복의 공동 상속자이며 비록 남성들이 그것을 집행하는 더 큰 짐을 지고 있지만 여성에게는 그들의 신권 관련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더 큰 계시의 빛을 받고 그 곳을 떠났습니다.

그런 다음 엔다우먼트 의식에 참석하는 동안 만일 내가 여호와이고 지상의 자녀들에게 그들의 역할과 임무에 대한 단 하나의 단순하지만 강력한 상징적인 예를 준다면 얼마나 많이 주고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지 자문해 보았습니다. 저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패턴과 유형을 찾기 위해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아브라함서 4 27절을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들께서 내려가 자기들의 형상대로 사람을 조직하시되, 하나님들의 형상대로 그들이 그를 지으시고,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니라.그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즉 그들 자신의 형상대로 남성을 만들고 그리고 여성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과의 중요한 대화에서 아담은 그 여인을 이브라고 부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왜 그는 그녀를 이브라고 부릅니까? 그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되기 때문입니다.(창세기 3:20; 모세서 4:26)

자녀를 낳지 않은 많은 미혼 여성이나 기혼 여성의 현실적인 고통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모성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원한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한 가능성, 즉 다양한 환경 속에서의 우리의 단합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브는 자녀를 낳기 수 년, 수십 년, 어쩌면 수 세기 전에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신분을 부여 받았습니다. 에덴 동산의 완전함이 필멸의 생의 투쟁보다 앞섰던 것과 같이 그녀의 어머니로서의 자격도 그녀가 어머니되는 것보다 먼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어머니가 매우 신중하게 선택된 단어 중의 하나, 수많은 의미를 지닌 그 풍부한 단어 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그 단어가 우리를 분열시키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 자녀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거룩한 본성에 대한 으뜸되는 선언임을 온 마음을 다해 믿습니다.

저는 단 세 자녀밖에 없으며 더 많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흐느껴 울어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 가운데 자녀가 전혀 없는 분도 울었을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때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주제 자체에 분노해 왔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모성을 위해 저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어떤 여성들은 자녀를 낳고 키우지만 결코 그들의 “어머니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은 평생 동안 “어머니 역할을 하지만” 결코 자녀를 낳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기혼이든 미혼이든 가임이든 불임이든 모두 이브의 딸들입니다. 우리는 신과 여신이 되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서로 또 우리를 따라 오는 사람들을 위해 그 거룩한 패턴 곧 모성의 모형을 어느 정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있든 우리의 손길을 뻗치고 안고 들어올리고 양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고립된 상태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혼을 강화시키고 분열의 상처를 감싸 주는 자매들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성으로서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 각 개인을 위한 사명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갈릴리 언덕에서 배운 것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의롭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다스리시며,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서 부드럽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돌봐 주시리라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우리의 다양성과 개성 속에서도 저의 기도는 우리가 단합되는 것,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예임된 사명을 찾는 데 있어서 단합되는 것, “왕국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 왕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라고 묻는 데 있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가 저의 창조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습니까? 저는 어떠한 상황과 도전과 신앙 가운데서도 제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완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그분의 선지자, 그분의 교회,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우리 자신의 거룩한 창조에 대한 신앙으로-우리가 화평스럽게 되고 너무나 많은 것들에 대한 우리의 걱정과 근심을 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심지어 어두운 곳에서도 비치는 그 빛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기를 기원합니다.

(필요한 한 가지: 그리스도에 대한 더 큰 신앙을 지닌 여성이 됨, 패트리시아 티 홀런드 자매, 이전 본부 청녀 회장단, Ensign, 1987 10월호, 2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