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유산

 

소개

이 책의 주요 메시지는 설립 이후부터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에서 가르쳐 온 메시지이다. 이 경륜의 시대의 첫번째 선지자인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 종교의 근본 원리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 곧 그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간증이며, 우리 종교에 대한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이 원리에 부수되는 것입니다.”1

조셉 스미스를 이은 모든 선지자는 구주의 거룩한 사명에 관해 개인적인 간증을 덧붙여 왔다. 제일회장단은 이렇게 밝혔다.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전하도록 부름 받고 성임 받은 사람들인 우리는 그분이 거의 2천년 전 그 부활절 아침에 부활하셨으며, 그분이 오늘날에도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그분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영광되고 불사 불멸하는 육신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은 구주이며,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십니다.”2

수백 만의 충실한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한 분이시라는 간증을 해 왔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지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왕국인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를 세우는 데 필요한 희생을 할 수 있었다. 교회의 설립에 관한 이야기는 곧 신앙과 헌신과 기쁨의 이야기이다. 또한 현대의 세상에 하나님의 진리들을 가르친 살아 계신 선지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사회적, 경제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음을 갈구했고 그것을 발견하자 마자 구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 어떤 희생이든 기꺼이 감내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용감한 성도들은 수많은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계속 전진해 나아가는 가운데, 가장 암울한 시기에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사랑에 대한 기쁨을 증거했다. 그들은 신앙과 용기와 순종과 희생의 유산을 남겼다.

신앙의 유산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후기성도들은 그들의 조국에서 현대의 개척자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들은 그 곳에서 새로운 도전과 기회로 가득한 시대에 신앙과 용기를 갖고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의 이야기들이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각자 여러 세대가 이어받게 될 유산을 남길 수 있는 기회들이 있다. 바로 이 유산을 통해 앞으로의 세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생활하고 그 복음을 함께 나누는 기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 살다 가신 분들의 신앙에 대해 더 많이 배움으로써 구주에 대해 증거하고 그분의 왕국을 세우는 일을 돕는 데 있어서 같은 마음으로 참여했던 분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들로서 보다 의롭게 생활하겠다는 결심을 할 수도 있다.

 

 


첫번째 시현

 

회복의 필요성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망한 후, 신권의 권세와 많은 복음 진리들이 지상에서 거두어졌으며, 이에 따라 대배도라고 하는 오랜 영적인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선지자 아모스는 이미 이러한 영적인 암흑 상태인 배도를 예견하고 주님께서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아모스 8:11)라고 하신 때가 이를 것이라고 선언했다. 오랜 배도 기간 동안, 많은 정직한 사람들은 충만한 복음 진리를 찾으려고 했으나 찾지 못했다. 많은 종파의 성직자들은 서로 다른 내용을 가르치면서 사람들에게 참여하도록 권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직한 의도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충만한 진리나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복음과 신권의 권세가 언젠가 지상에 회복될 것이며, 이후로 다시는 거두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비로운 약속을 주셨다. 19세기가 시작하면서 그분의 약속은 거의 성취되어가고, 배도의 긴 밤이 끝나게 될 순간이 다가왔다.

 

어린 조셉 스미스의 용기

1800년대 초, 조셉 스미스와 루시 맥 스미스의 가족은 미국 햄프셔 주 레바논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힘든 노동으로 근근이 생활해 가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다섯째 자녀인 조셉 스미스 2세는 일곱 살 때에 뉴 잉글랜드 지역에서 3천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던 전염병인 장티푸스 질환을 앓았으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건강이 회복되고 있는 동안에 왼쪽 다리 뼈의 골수에 심한 감염이 되어 3주 이상이나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지속되었다.

그 지방의 외과 의사는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으나, 조셉의 어머니의 완강한 거부로 다른 의사를 불러오게 되었다. 인근의 다트마우스 대학의 내과 의사인 네이던 스미스가 뼈 조직의 일부를 절개해 내는 비교적 새로우면서도 극한 고통을 수반하는 치료법을 사용해서 다리를 고쳐 보기로 했다. 의사는 이 소년을 묶기 위해 끈을 가져 왔으나 조셉은 끈으로 묶지 않고 견디어 보겠다며 반대했다. 또 그는 그 상황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마취제 역할을 해줄 브랜디를 한 잔 마시라는 의사의 권유도 거절하고 그저 수술을 받는 동안 팔만 잡아 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조셉은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수술을 잘 견뎌냈으며, 당시 그 지역에서 가장 지식이 많은 내과 의사 중 한 사람이었던 스미스 박사는 조셉의 다리를 구할 수 있었다. 조셉은 수술 받기 전까지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렸으나 이제는 아무런 통증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조셉이 수술을 받은 후, 스미스 가족은 버몬트 주 노르위치로 이사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3년 연속 농작물의 흉작으로 고통을 겪다가 뉴욕 주 팔마이라로 이사했다.

 

첫번째 시현

청소년이 된 조셉 스미스는 가족을 도와 토지를 개간하고 바윗돌들을 나르는 등 다른 많은 일을 했다. 그의 어머니인 루시는 소년 조셉이 매사를 신중하게 생각하는 편이었으며, 종종 자신의 불멸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곤 했다고 적고 있다. 그는 특별히 팔마이라 지역에서 전도하고 있는 모든 교회들 가운데 어떤 교회가 올바른 교회인가를 놓고 고민하곤 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대 혼란기에 있어서 나의 마음은 진지한 반성과 커다란 불안감에 사로잡혔었습니다. 나의 감정은 이에 대하여 깊고 예리한 관심을 가졌었으나 나는 이 모든 종파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회 있는 대로 그들의 집회에 참석하였으며 때가 지남에 따라 감리교파에 마음을 두고 어느 정도 이에 가입하고 싶었으나 혼란과 서로 다른 종파간의 분쟁이 너무도 컸으므로 나 같은 세상 일에 미숙한 소년에게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내가 이들 종교가들이 일으킨 커다란 혼란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하루는 야고보서 1장 5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성경의 어느 구절도 이 때의 이 글처럼 나의 마음속에 힘있게 임한 일은 없었습니다. 참으로 강한 힘이 나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닫고 이것을 여러 번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자가 있다면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내 지혜보다 더 깊은 지혜 없이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여러 교파의 교사들이 같은 성경 구절을 여러 가지로 각각 다르게 해석하여 그 결과 성경에 의해서 의문을 해결하려는 신념을 가질 수 없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나는 암흑과 혼돈 속에 머무르든가 야고보가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께 간구하든가의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조셉 스미스 - 역사 2:8, 11~13)

1820년의 어느 아름다운 봄날 아침, 조셉 스미스는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숲 속에 혼자 들어가 무릎을 꿇고 마음에 갖고 있던 소망을 하나님께 의뢰하며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렇게 기도하자마자 나는 어떤 힘에 의하여 완전히 사로잡혔으며 놀라운 힘에 압도되어 저항력을 잃고 혀가 굳어 버려서 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캄캄한 어두움이 나를 둘러 쌓았으며, 한동안은 내가 이대로 곧 죽어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조셉 스미스 - 역사 2:15)

모든 의의 적대자인 사탄은 조셉이 매우 위대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파멸시키려고 했으나, 조셉은 그의 모든 힘을 기울여 하나님께 의지하였으며 즉시 구원되었다.

“바로 이 때 매우 놀라운 순간 나의 머리 바로 위에 햇빛보다 더 밝은 빛 기둥을 보았으며, 그 빛기둥은 머리 위로 점점 내려와 드디어 그 빛은 나를 비쳤습니다.

“이 빛기둥이 나타나자마자 나는 나를 결박했던 힘으로부터 풀려났음을 깨달았으며, 그 빛이 내 위에 머물렀을 때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찬란함과 영광을 지닌 두 분이 내 위 공중에 서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나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다른 한 분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하셨습니다.”(조셉 스미스 - 역사 2:16~17)

조셉은 정신이 들자마자 어느 교파가 옳으며 어느 곳에 가입해야 할지를 주님께 여쭈었다. 주님은 “아무 교파에도 속하지 말라.… 모든 교파가 다 그르며 그들의 신조는 하나님 앞에 가증하… 도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척하나 그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하셨다.(조셉 스미스 - 역사 2:19) 주님은 또한 조셉에게 더 많은 것을 말씀해 주셨다.

시현이 끝난 후 조셉은 자신이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점차 기운을 회복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1820년, 그날 아침의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만 해도, 조셉 스미스는 선지자가 이 지상에 다시 존재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뉴욕 주 서부의 한 비천한 집안의 소년이었던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상에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회복하는 기이한 업적을 수행하도록 택함 받게 된 것이었다. 그는 거룩한 두 분을 보았으며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속성에 관해 증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날 아침은 참으로 그 어느 때보다 화창한 날이었으며, 빛이 숲 속을 가득 채웠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14세된 소년을 선지자로 부르셨다.

 

 


교회의 기초를 세움

 

몰몬경의 출현

 

천사 모로나이의 방문

첫번째 시현을 본 지 3년이 지난 1823년 9월 21일 저녁, 조셉 스미스는 주님께 자신의 어린 시절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가운데 더 지시를 해주실 것을 간청했다. 주님은 그에게 지시를 해줄 하늘의 사자를 보내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조셉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 분은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내게 보내진 천사 모로나이임을 밝히고 하나님께서 내게 시키실 일이 있다는 것을 전하였으며 나의 이름이 온 나라와 민족과 방언의 백성들에게 좋게도 전하여 지고 나쁘게도 전하여 지며 온 나라와 민족과 방언의 백성들의 입에 좋게도 오르내리며 나쁘게도 오르내리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분은 이 대륙에 먼저 살았던 백성들의 기사와 그들이 어디서 왔는가에 관한 기사가 금판에 기록된 책이 묻혀 있다고 전하면서 이 책에 구주께서 친히 고대 주님들에게 전하신 바 온전한 복음이 또한 적혀 있다고 하였습니다.” (조셉 스미스 - 역사 2:33~34)

모로나이는 이 고대의 기록에 마지막으로 글을 쓴 선지자로서 주님의 지시로 쿠모라 언덕에 그 기록을 묻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우림과 둠밈도 함께 묻었는데, 이 우림과 둠밈은 고대의 선지자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조셉도 기록을 번역할 때 사용했었다.

천사 모로나이는 조셉에게 근처에 있는 언덕으로 가라고 지시했으며, 말일의 주님의 사업에 관한 많은 중요한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조셉에게 기록된 판들을 갖게 되더라도 주님께서 특별히 명하시기 전에는 아무에게도 보여 주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모로나이는 그날 밤 동안에 두 차례 더 조셉에게 돌아왔으며 다음 날에도 한 차례 방문했다. 그는 매번 중요한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했으며 다른 내용도 더 이야기해 주었다.

천사가 방문한 다음 날, 조셉은 지시 받은 대로 쿠모라 언덕으로 갔다. 그는 이 때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 언덕 꼭대기에서 서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 바위 밑에 금판이 돌 상자 속에 담겨 묻혀 있었습니다. 이 돌은 두꺼웠고 중앙 부분으로 올수록 두껍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얇게 되어 있어서 그 중앙은 땅 위로 들어나 있지만 둘레는 모두 흙에 묻혀 있었습니다.

“나는 덮인 흙을 파헤쳐 내고 지렛대를 하나 얻어다가 돌 밑에 넣은 다음 조금 힘을 들여 그 돌을 옮겨 놓았고 그 안에는 정말로 천사가 이야기한 금판과 우림과 둠밈 그리고 가슴판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조셉 스미스 - 역사 2:51~52)

천사 모로나이가 나타나서 조셉에게 1년 후 같은 시각에 그 언덕으로 오되, 그 판들을 받을 시기가 될 때까지 매년 그렇게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모로나이는 방문할 때마다 주님이 어떤 일을 하실 것이며 그분의 왕국이 어떤 모양으로 이루어질 것인가에 관하여 더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조셉 스미스 - 역사 2:27~54 참조)

 

번역 작업

4년 간의 준비기를 거친 뒤인 1827년 9월 22일, 모로나이는 선지자 조셉에게 금판을 주고 번역을 시작하라고 말했다. 그 해 초에 조셉과 결혼했던 에머 헤일은 그날 조셉을 동반해서 함께 갔다가 남편이 판을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쿠모라 언덕 기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 선지자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중요한 보조자가 되었으며 얼마 안되는 기간 동안이긴 했지만 몰몬경 번역 업무의 서기로 일했다.

그 지방의 폭도들이 계속해서 끈질기게 금판을 훔치려고 했기 때문에 조셉과 에머는 뉴욕 주 만체스터에 있는 집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만체스터에서 남동쪽으로 약 120마일 가량 떨어진 펜실바니아 주 하모니에 살고 있던 에머의 아버지 아이삭 헤일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 곳에서 조셉은 판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조셉에게는 곧 마틴 해리스라는 친구가 생겼는데, 그는 유복한 농부였으며 그의 서기가 되었다.

마틴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올바른 일이라는 것을 그의 가족들에게 입증하기 위해 이미 번역된 116페이지의 자료를 집으로 가져 가서 보여 주면 안되겠느냐고 조셉에게 물었다. 조셉은 주님께 허가해 주실 것을 청했으나 주님은 안된다고 대답하셨다. 마틴은 다시 조셉에게 기도해 줄 것을 간청했으며, 이에 조셉은 마지못해 두 차례 더 청원하고 난 뒤 마지막으로 허락을 받았다. 마틴은 특정인에게만 그 원고를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자신의 약속을 어기고 말았으며, 결국 그가 가져 갔던 116페이지의 원고를 누군가가 훔쳐가 버렸다. 이 분실 사건으로 조셉은 매우 비통한 슬픔을 겪었다.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그의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울부짖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나는 죄를 짓고 말았구나.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게 한 것은 나야. 하나님이 주신 첫번째 응답에 만족했어야 했어.”1

조셉이 진실로 회개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금판 및 우림과 둠밈을 거두어 가신 지 얼마 후에 그를 용서하여 주셨으며, 그는 다시 번역을 시작했다. 주님은 그에게 현세의 역사가 포함된 분실 부분을 재번역하지 말라고 지시하셨다. 대신 조셉은 선지자 니파이가 작성한 것으로서 동시대를 다루고 있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더 위대한 예언과 다른 거룩한 기록들을 담고 있는 다른 판을 번역해야 했다. 주님은 116페이지 분량이 분실될 것을 예견하시고 니파이에게 이 역사에 대해 다시 기록하도록 영감을 주셨던 것이다.(니파이전서 9장, 교리와 성약 10:38~45 참조, 또한 이 시기에 받은 교리와 성약 3편과 10편도 참조)

이 때 조셉은 학교의 젊은 교사로서 주님의 인도를 받아 선지자의 집으로 온 올리버 카우드리의 도움을 받는 축복을 누렸다. 올리버는 1829년 4월 7일부터 서기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 위대한 때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가슴에 한량없는 감사를 일깨워 주신 하늘의 영감이 명하시는 바를 들으며 앉아 있었던 그 날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나날이었다.”(조셉 스미스 - 역사 2:71 각주)

올리버는 또 이렇게 기술했다. “그 책은 참된 책이다.… 선지자가 불러 주면 내가 직접 그 내용을 기록했다. 여기에는 영원 불변한 복음이 포함되어 있으며, 요한이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천사가 오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 계시를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는 구원의 원리가 담겨 있다. 만일 여러분이 그 빛을 따라 걷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2

작업을 하던 중에 조셉과 올리버는 기록을 번역하느라 몰두했기 때문에 음식이나 돈이 모두 떨어지게 되었다. 심지어는 꼭 필요한 필기 도구마저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선지자의 전 고용주이자 친구인 조셉 나이트 1세가 그들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조셉 나이트는 그의 가장 시의 적절했던 도움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고등어 한 통과 줄이 그어진 글 쓸 종이 약간을 샀다.… 20말 정도의 곡식과 10말 정도의 감자도 샀다.” 그런 다음 그는 하모니에 있는 그 두 사람을 방문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조셉과 올리버는 부족한 식량과 재료를 구입할 돈을 벌기 위해 일할 곳을 찾아 나섰으나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러한 것들을 갖고 기다리는 나를 보았다. 그들은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몹시 기뻐했다.… 그런 뒤 그들은 또 작업을 하러 갔다. 이제 그들에게는 번역이 모두 끝날 때까지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충분히 있었다.”3

선지자 조셉이 이 의로운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다. “시온의 아들들은 단 한 사람만 남게 된다 해도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충실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이름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4

박해가 점점 심해졌기 때문에 조셉과 올리버는 하모니를 떠나서 뉴욕 주 페이에트에 있는 피터 휘트머의 농장에 머무르며 1829년 6월에 번역 작업을 마쳤다. 그처럼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한 작업을 완료했다는 것은 참으로 현대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정식 교육이라고는 별로 받은 적이 없는 조셉 스미스가 2개월이 약간 넘는 정도의 실제 작업 기간 동안에 기록을 번역해서 구술했는데도 수정할 곳이 거의 없었다. 이 책은 본질적으로 그가 번역했을 때 그대로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으며, 전세계 수백 만 명의 사람들에게 간증의 원천이 되었다. 조셉 스미스는 주님께서 말일의 성도들을 축복하시기 위해 고대 선지자들의 기록을 세상에 나타낼 목적으로 손수 쓰신 유능한 도구였다.

 

몰몬경의 증인들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페이에트에 있는 동안, 주님은 올리버 카우드리와 데이비드 휘트머와 마틴 해리스가 금판을 보도록 허락 받은 세 명의 특별한 증인이 될 것이라고 계시해 주셨다.(니파이후서 27:12, 이더서 5:2~4, 교리와 성약 17편) 그들은 조셉과 함께 이 고대 기록의 기원과 진실성에 관해 증거할 수 있었다.

데이비드 휘트머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근처 숲 속으로 들어가 통나무에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조셉도 기도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일어나서 다시 통나무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의 위에서 빛이 내려와 꽤 오랫동안 우리를 둘러쌌다. 그리고 천사가 우리 앞에 서 있었다.” 이 천사는 모로나이였다. 데이비드는 그가 “하얀 옷을 입고 이야기했으며 나의 이름을 부르더니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했다. 우리 앞에 탁자가 놓여졌고 그 위에 기록들이 놓여졌다. 몰몬경에서 번역된 니파이 백성들에 관한 기록과 놋쇠판과 방향구와 레이밴의 검과 다른 판들이 있었다.”5 이 네 사람이 이러한 것들을 보고 있는 동안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음성을 들었다. “이 여러 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번역되었느니라. 너희들이 본 번역은 정확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명하노니 너희가 지금 보고 들은 것을 간증할지어다.”6

이 사건이 있은 직후 조셉 스미스는 추가로 여덟 증인들에게 금판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뉴욕 주 만체스터에 있는 스미스 가족의 집 근처, 은밀한 장소에서 직접 금판을 만져보기까지 했다.

 

몰몬경으로 전도함

번역하는 일이 끝나자 선지자는 팔마이라의 에그버트 비 그랜딘 출판사와 몰몬경 출판에 대한 계약을 맺었다. 마틴 해리스는 몰몬경 5천 부를 출판하는 데 3,000달러를 지불하기로 하고 그랜딘 씨와 저당권 설정을 했다.

몰몬경 초판이 1830년 3월 26일, 이 비 그랜딘 서점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선을 보였다. 새로 출판된 몰몬경을 사용한 최초의 선교사 중에는 사뮤엘 스미스가 있었다. 그는 1830년 4월에 뉴욕 주 멘든 시내에 있던 톰린슨 여관을 방문했다. 그는 그 곳에서 브리감 영의 동생인 파인해스 영이라는 젊은이에게 몰몬경 한 권을 팔았다.

그는 6월에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 이번에는 뉴욕 주 블룸필드에 거주하는 존 피 그린의 집에 몰몬경 한 권을 두었다. 존은 브리감 영의 여동생인 로다 영과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 다음에는 브리감의 아버지인 존 영이 몰몬경을 접했으며, 그는 그 책을 집으로 가져가 끝까지 모두 읽었다. 그는 “이 책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책이며, 성경을 포함해 [내]가 본 어떤 것보다 오류가 없는 책이다.”7라고 말했다.

브리감 영은 가족 및 선교사들에 의해 몰몬경의 내용을 읽어 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철저하게 조사할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그 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기까지 2년 동안 그 문제를 꼼꼼하게 검토했다. 나는 그것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거나 손가락으로 만져 보는 등 오감으로 무엇이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모든 것들을 증명해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8

브리감 영은 1832년 4월 14일에 침례를 받았다. 침례와 확인을 받은 다음의 일에 대해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구주의 말씀에 따라 겸손하고 순진 무구한 영을 느꼈다. 이 영을 통해 나는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9 그는 후에 사도가 되었으며, 결국에는 교회의 제2대 회장이 되었다.

 

아론 신권과 멜기세덱 신권의 회복

천사 모로나이는 1823년 9월에 쿠모라 언덕에서 조셉 스미스를 만났을 때, 그에게 신권의 권능이 지상에 회복될 것이라는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는데, 이 가르침 중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도 포함되어 있었다. “[금판이] 번역되면 주님께서 몇 사람에게 거룩한 신권을 주실 것이요, 이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물로써 침례를 베풀게 되리니, 이러한 연후에 이들은 손을 얹고 성신을 부여하는 권세를 갖게 되리라.”10

1829년 봄, 조셉은 이 천사가 한 말의 일부분을 실현시키는 데 참여했다. 그는 올리버 카우드리와 함께 몰몬경 번역 작업을 하던 중에 죄사함을 위한 침례에 관해 언급된 부분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5월 15일에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이 주제에 관한 지식을 더 주실 것을 간구했다. 사스케하나 강 둑에서 기도를 하는 동안, 하늘의 사자가 그들을 방문했다. 그는 자신을 신약 시대의 침례 요한이라고 소개하고, 조셉과 올리버의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이렇게 말했다. “나와 같은 일에 종사하는 종들아, 나는 너희에게 메시야의 이름으로 아론 신권을 부여하노라. 이는 천사의 성역, 회개의 복음, 죄 사함을 위한 침수로써의 침례를 베푸는 열쇠를 가지고 있느니라.”(교리와 성약 13:1)

이렇게 성임 받고 난 뒤 조셉과 올리버는 침례 요한의 명에 따라 서로에게 침례를 주고 서로에게 아론 신권을 부여하였다. 요한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론 신권은 성신의 은사를 주기 위하여 안수할 권능은 없으나 이러한 성신의 은사를 주는 권능은 후에 부여되리라.” 또한 “[그]는 멜기세덱 신권의 열쇠를 쥐고 있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지시에 따라 일하는 자며 이 멜기세덱 신권도 때가 이르면 우리에게 부여될 것”(조셉 스미스 - 역사 2:70, 72; 2:68~72 참조)이라고 말했다.

선지자는 이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자마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축복을 경험하였습니다. 내가 올리버 카우드리에게 침례를 주자마자 성신이 그의 위에 임하고 그는 일어서서 곧 일어날 여러가지 일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가 그에게서 침례를 받자 나에게도 예언의 영이 임하여 나는 일어나 이 교회의 일어남과 교회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과 이 세대의 사람들에 관한 여러 가지 일들을 예언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성령에 충만하여 우리 구원의 하나님 앞에서 심히 기뻐하였습니다.”(조셉 스미스 - 역사 2:73)

후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조셉과 올리버에게 나타나 멜기세덱 신권을 부여해 주었다. 그들은 또한 조셉과 올리버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열쇠도 부여해 주었다.(교리와 성약 27:12~13, 128:20 참조) 멜기세덱 신권은 지상의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권능이다. 이 권능을 통해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 경륜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조직하고 현재에도 교회에 존재하고 있는 여러 가지 신권 정원회의 조직을 시작할 수 있었다.

 

교회의 조직

주님은 조셉 스미스에게 1830년 4월 6일이 이 경륜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조직되어야 할 날이라고 계시해 주셨다.(교리와 성약 20:1 참조) 신도들과 친구들에게 통보서가 전달되었으며, 약 56명의 남녀가 뉴욕 주 페이에트에 있는 피터 휘트머 1세의 통나무 집에 모였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으로 [미국]의 법률에 좇아” 조직하는 것을 도울 여섯 사람을 선택했다.(교리와 성약 20:1)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 아버지께 거룩한 기도를 드리면서 모임을 시작한 뒤 우리는 이전에 받은 계명에 따라,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사업을 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를 그들의 교사로 받아들일 것인지, 또 우리가 절차를 진행하여 이미 받은 명에 따라 교회를 조직해도 괜찮겠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순서를 가졌다. 이러한 몇 가지 제안에 대해 그들은 만장 일치로 찬성했다.”11

참석한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 조셉은 올리버를 교회의 장로로 성임했으며, 올리버는 선지자를 장로로 성임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지시하신 것이었다. 성찬이 축복되고, 참석한 회원들에게 전달되었다.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확인 의식을 받고 성신의 은사를 받았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성신이 대단할 정도로 쏟아부어졌다. 어떤 사람은 예언도 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찬양했으며 매우 기뻐했다.”12 이 모임 동안에 조셉은 주님으로부터 교회 회원들이 선지자의 말을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과 동일하게 여기고 따르라고 지시하시는 계시를 받았다.(교리와 성약 21:4~6 참조)

1830년의 그 모임에서 제시된 요소들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 있다. 즉 만장 일치, 찬송, 기도, 성찬을 취함, 개인적인 간증을 함께 나눔, 안수례에 의한 성신의 은사 부여, 성임, 개인적인 계시, 신권 역원들을 통한 계시 등의 율법이 실행되는 것이 그러한 것들이다.

조셉의 어머니인 루시 맥 스미스는 선지자의 아버지, 조셉 스미스 1세가 침례 받은 날 일어났던 부드러운 광경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남편이 물에서 나오자, 조셉이 물가에 서 있다가 그의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내 살아 있는 동안 부친이 침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로 들어오신 모습을 보았으니 나의 하나님께 찬양 드립니다!’라고 외쳤다.”13 그 순간을 조셉 나이트 1세는 이렇게 말했다. “[선지자]는 극도로 성령에 충만해 있었다.… 그는 기쁨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이미 시작했던 위대한 사업을 보았으며 그 사업을 수행하고자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다.”14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튼튼한 사랑의 끈이 연결되어 있었다. 후에 선지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이렇게 찬미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며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을 사랑한다. 이 고귀한 행위들에 대한 추억은 내 마음에 언제나 머물러 있으며, 그 분이 부성애를 갖고 나에게 해 주신 많은 친절한 말씀은 내 마음의 서책에 기록되어 있다.”15

선지자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사랑은 조셉 스미스 1세가 그의 부친인 에이샐 스미스에게 보여 준 행동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조셉 스미스 1세는 1830년 8월에 몰몬경 몇 권을 갖고 북동부의 뉴욕 주 세인트 로렌스 군으로 가서 그의 부모와 형제 자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에이샐 스미스는 1830년 10월에 임종할 때까지 몰몬경을 거의 모두 읽었으며, 그의 손자인 조셉 스미스 2세가 “자신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대로 자신의 가문에 나타날 바로 그 선지자”16라고 말했다. 나중에는 에이샐의 다른 세 아들인 사일라스, 존 및 에이샐 2세도 교회에 가입했다. 선지자는 자신의 직계 가족 모두와 많은 부계 친척들이 침례의 물에 침수되는 것을 지켜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후에 제일회장단의 일원이 된 시드니 리그돈은 교회가 처음 시작될 때는 미약했으나 당시 조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원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던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뉴욕 주 워털루 근처의 한 작고 조그만 통나무 집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회원 모두를 만났다. 우리는 마치 세상이 우리의 손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수는 많지 않았지만 우리의 이야기에는 강한 확신이 배여 있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간증을 전혀 몰랐으며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려 하는가도 모르고 있었을지라도 우리는 시현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수천 배나 커지는 모습을 보았다.…”17

1830년 4월 6일 뉴욕 주 서부에서 일어났던 사건들로 인해 수백 만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다. 처음 이 통나무 집에 모인 개종자들의 수는 매우 적었지만, 복음이 전세계로 퍼져 나감에 따라 지금은 많은 나라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 중에는 페이에트에서 교회가 처음 조직될 때처럼 비천한 환경에 처해 있는 곳도 있다. 전세계의 성도들은 구주의 다음과 같은 약속으로 인해 기뻐하고 위안을 얻는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보라, 저들 가운데 내가 함께 하겠노라”(교리와 성약 6:32)

 

“오하이오로 가라”: 말일의 이스라엘의 집합

콜스빌에서의 박해

교회가 조직된 바로 그 달에,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그와 절친한 조셉 나이트 1세의 가족들을 가르치기 위한 선교 사업을 떠났다. 그들은 뉴욕 주 콜스빌에 거주하고 있었다. 6월 28일에는 나이트 형제의 가족 및 친지들의 많은 수가 침례 성약을 맺을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콜스빌에서는 복음을 전도하는 것에 대해 강한 반대가 일었으며, 일단의 폭도는 형제들이 물을 보유할 목적으로 만들어 둔 제방을 부숴뜨려서 침례를 멈추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제방은 곧 보수되었다. 조셉 나이트 1세는 신앙의 적대자들이 자행한 일들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는 침례식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많은 이웃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우리를 가리키면서 양을 목욕시켰느냐고 물었다.… 그날 밤 우리 집 마차가 전복되고 그 위로 목재가 쌓아올려졌으며, 울타리용 나무가 집 앞에 잔뜩 쌓여 있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물에도 잠겨 있었으며, 마구용 사슬이 개울물에 가라앉아 있는 등 많은 해를 입었다.”18

이와 동시에 복음 전도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선지자를 체포해 평화를 깨뜨렸다는 죄목으로 기소하여 그를 괴롭히려고 했다. 그러나 조셉 나이트 1세가 변호사들을 선임했으며, 이들 덕분에 선지자는 곧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다.

교회가 중요한 문제를 앞서 추진해 갈 때마다 모든 의의 적대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헌신적인 성도들은 강하게 단합했던 콜스빌의 성도들처럼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더욱 굳건하게 성장한다.

 

인디언들에 파송된 선교사들

1830년 9월과 10월에 걸쳐 네 명의 젊은이들이 계시를 통해 몰몬경 백성의 후손들인 미대륙 인디언들에게 복음과 몰몬경의 가르침을 전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올리버 카우드리, 피터 휘트머 2세, 팔리 피 프랫 및 지브라 피터슨이 선교사들이었다.(교리와 성약 28:8, 30:5~6, 32편 참조) 이들은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 수백 마일을 여행하여 뉴욕 주 버팔로 근처의 카테로구스 인디언들과 오하이오 주의 얀덧츠 인디언 및 마지막으로는 미주리 주 서부에 살고 있던 델라웨어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하이오 주 커틀랜드와 인근 지역 정착민들에게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무려 127명을 개종시켰던 것이다. 선교사들이 떠난 후 오하이오 주의 성도들의 수는 곧 수백 명에 다다르게 되었다. 남아 있던 회원들의 전도 덕분이었다.

 

오하이오로 집합하라는 부름

전 성직자이자 커틀랜드 지역에서 새로 개종한 회원인 시드니 리그돈과 에드워드 패트리지라고 하는 비회원 친구 한 명은 선지자를 만나 교회의 가르침을 더 받기를 갈망하여, 1830년 12월에 250마일이 넘는 거리를 여행하여 뉴욕 주 페이에트까지 조셉 스미스를 만나러 왔다. 그들은 선지자에게 그들 자신과 커틀랜드 성도들과 관련하여 주님께서 어떤 뜻을 갖고 계시는지를 알아봐 달라고 청했다. 주님께서는 그 응답으로 뉴욕 성도들이 “오하이오 주에 다같이 모일 필요가 있느니라.”(교리와 성약 37:3)라고 계시해 주셨다.

뉴욕 주에서 열린 교회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집회가 1831년 2월 2일에 휘트머의 농장에서 열렸을 때, 주님은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다시 한번 똑같은 지시를 내리셨다. “이는 너희가 원수의 권세에서 벗어나 흠 없고 허물 없는 의로운 백성을 내게로 모이게 하기 위함이니, 그런고로 이 대사를 위하여 오하이오로 가라는 명령을 너희에게 주었느니라. 또 그 곳에서 나의 율법을 너희에게 주리니, 높은 곳에서 임하는 능력을 받으리라.”(교리와 성약 38:31~32) 성도들에게 함께 모이라고 한 이 지시는 이 경륜의 시대에 첫번째로 내려진 부름이었다.

비록 몇몇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고 뉴욕 주에서 오하이오 주까지 긴 여행을 하는 것을 포기했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스라엘을 집합시키라는 목자의 음성을 들었다. 뉴웰 나이트는 신권 지도자들을 따른 제자들의 대표격인 인물로서 그 부름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대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콜스빌 지부의 성도들과 함께 이미 받은 계명에 순종하여 오하이오로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재산상으로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나는 우리가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형제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일을 처리하는 것을 도와주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19

조셉 나이트 1세 또한 오하이오 주에 있는 선지자와 합류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기꺼이 희생을 감수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브룸 리퍼블리칸 지에 실은 짤막한 농장 매각 광고는 그가 복음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현재의 농장주 조셉 나이트, 콜스빌 읍내에 위치, 콜스빌 브릿지 근처에 있음.-한쪽으로 사스케하나 강이 흐름, 약 142에이커. 위 농장에 거주 가능 가옥 2채, 좋은 헛간 및 훌륭한 과수원 포함. 매각 조건 후함”20 1831년 4월 중순경, 콜스빌에서 오하이오로 길을 떠난 회원들은 68명이었다.

80여 명의 페이에트 지부 성도들과 50여 명의 맨체스터 지부 회원들도 주님의 지시에 똑같이 순종하여 1831년 5월초에 그들의 집을 떠났다. 선지자의 어머니인 루시 맥 스미스는 회원들이 페이에트에서의 대이동을 지휘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들이 뉴욕 주 버팔로에 도착했을 때는 에리 호가 얼음 벌판으로 변해 항구가 폐쇄되어 페이에트의 성도들을 실은 증기선이 항구를 떠날 수 없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루시 맥 스미스는 회원들에게 신앙을 행사해 주도록 요청했다. “자, 형제 자매 여러분, 얼음이 깨져서 주님과 마찬가지로 자유의 상태에 놓일 수 있도록 우리의 소망을 하늘에 상달시킨다면, 그 소망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얼음이 깨지더니 배가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좁은 길이 생겨난 것이었다. 겨우 겨우 빠져 나가는 동안 그 길은 다시 막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얼음이 얼지 않은 곳까지 나와 있었으며,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기적과 같은 탈출을 한 성도들은 자비로써 그들을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한 기도 모임을 가졌다.21

5월 중순경, 뉴욕 주에서 온 모든 지부의 성도들은 배로 에리 호에서 오하이오 주의 페어포트 항까지 건너갈 수 있었으며, 이들은 이곳에서 다른 성도들을 만나 커틀랜드와 톰슨 군구의 목적지까지 안내되어 갔다. 이미 말일의 이스라엘의 대집합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제 성도들은 주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종의 신분으로 가르침 받고 그분의 율법 안에서 지시 받으며 거룩한 성전들을 지을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Notes

1. 루시 맥 스미스, 조셉 스미스의 역사(1958년), 128쪽

2. 루벤 밀러 일지, 1848~1849년, 1848년 10월 21일,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역사부 공문서 보관과, 이후로는 후기성도 교회 기록 보관소라고 인용함.

3. 딘 제시 편, “초기 몰몬의 역사에 대한 조셉 나이트의 회상”, 브리감 영 대학교 연구집, 1976년 가을호, 36쪽

4. 교회사, 5:124~125

5. 더 세인츠 헤럴드, 1882년 3월 1일, 68쪽

6. 교회사, 1:55

7. “브리감 영의 역사”, 밀레니얼 스타, 1863년 6월 6일, 361쪽

8. 브리감 영, 설교집, 3:91

9. “브리감 영의 역사”, 밀레니얼 스타, 1863년 7월 11일, 438쪽

10. “더블류 더블류 펠프스에게 보낸 올리버 카우드리의 편지”, 후기성도의 사자요 옹호자, 1835년 10월, 199쪽

11. 교회사, 1:78

12. 교회사, 1:78

13. 루시 맥 스미스, 조셉 스미스의 역사, 168쪽

14. 딘 제시 편, “초기 몰몬 역사에 대한 조셉 나이트의 회상”, 37쪽

15. 교회사, 5:126

16. 교회사, 2:443

17. “대회 의사록”, 타임즈 앤드 시즌스, 1844년 5월 1일, 522~523

18. 조셉 나이트 자전적 스켓치, 1862년; 후기성도 교회 기록 보관소

19. 뉴웰 나이트, 래리 포터의 “1816~1831년대의 뉴욕 주와 펜실바니아 주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기원에 대한 연구”(1971년 브리감 영 대학 박사 학위 논문), 296쪽에서 인용

20. 브룸 리퍼블리칸, 1831년 5월 5일, 래리 포터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기원에 대한 연구”, 298~299쪽에서 인용

21. 루시 맥 스미스, 조셉 스미스의 역사, 204쪽

 

 


오하이오 주 커틀랜드에서 왕국을 건설함

 

선지자의 오하이오 주 도착

1831년 2월의 어느 추운 날,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당시 쌍둥이를 임신한 지 6개월 된 그의 아내 에머 스미스는 뉴욕 주에서 오하이오 주 커틀랜드까지 장장 250마일이나 되는 거리의 여행을 마쳤다. 그들은 썰매 마차를 타고 길버트와 휘트니 상점에 도착했다. 다음 발췌문은 뉴웰 케이 휘트니와 선지자와의 만남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썰매 마차]에 타고 있던 남자 가운데 젊고 용감해 보이는 사람이 내리더니 계단들을 성큼 성큼 뛰어 올라가 상점 안으로 들어간 뒤 나이가 더 젊어 보이는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뉴웰 케이 휘트니씨! 당신이 바로 그 분이군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잘 몰라 뵙겠는데, 누구신지요?’하고 그 사람이 상대의 내민 손을 무의식적으로 잡으면서 물었다. ‘저는 선생님의 성함을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선지자 조셉입니다. 당신이 이곳에서 기도하셨지요? 이제 제게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고 그 낯선 사람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1

사실 얼마 전에 뉴웰과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는 열렬한 기도로써 주님께 인도해 주실 것을 간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성령이 임하고 구름이 그들의 집에 그림자를 드리우더니, 그 구름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하라. 그 말씀이 임할 것이니라!”라고 하는 한 음성이 들렸었다.2 그런 일이 있은 직후에 인디언들을 가르치도록 부름 받은 선교사들이 커틀랜드에 온 데다 이제는 선지자까지 도착한 것이다.

뉴웰의 손자인 올슨 에프 휘트니는 후에 이 사건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탁월한 분인 조셉 스미스는 어떤 능력이 있길래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알아보았을까? 왜 할아버지인 뉴웰 케이 휘트니는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것은 바로 조셉 스미스가 선견자, 그것도 훌륭한 선견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제로 커틀랜드로 오는 문제에 대해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던 중에 할아버지인 뉴웰 케이 휘트니를 본 적이 있었다. 기적과 같은 일이지만 거짓이 아니다!”3

선지자가 옴으로써 주님의 말씀이 커틀랜드에 임하게 되었으며, 이곳에서 교회의 중요한 요소들이 많이 자리를 잡았다. 교회의 행정의 기본적인 조직이 나타났고, 선교사들이 외국으로 파송되었으며, 첫번째 성전이 건립되었고 중요한 계시가 많이 주어졌다. 성도들은 심한 핍박을 받았으며, 그들이 신앙과 용기와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선지자를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내 보일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시련도 주어졌다.

 

교회 활동의 두 중심지

성도들은 오하이오 주로 집합하라는 부름을 받음과 동시에 그들이 시온을 건설할 수 있을 때를 고대하기 시작했다. 1831년 6월,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자신과 시드니 리그돈과 28명의 다른 장로들에게 미주리 주로 선교 사업을 떠나 그곳에서 교회의 다음 대회를 열라고 지시하는 계시를 받았다.(교리와 성약 52편 참조) 미주리는 당시 미 합중국의 서부 변경에 위치하고 있으며 커틀랜드로부터 서쪽으로 1천 마일이 넘는 곳에 있는 지역이었다. 주님은 조셉에게 미주리 주 잭슨 군에서 성도들이 유산을 받고 시온을 세우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주셨다.

조셉과 다른 선교사들과 얼마 후에 뉴욕 주 콜스빌에서 온 성도들 모두는 1831년 여름 동안에 잭슨 군으로 여행하여 정착촌을 세우기 시작했다. 선지자와 다른 지도자들이 커틀랜드로 돌아왔지만 교회의 많은 회원들은 미주리 주에 정착했다.

1831년부터 1838년 사이에 교회 회원들이 모인 중심지는 두 곳이었다. 조셉 스미스와 십이사도 평의회의 회원들과 많은 성도들이 오하이오 주 커틀랜드 지역에서 생활하는 한편, 교회의 다른 많은 성도들은 임명된 신권 지도자들의 관리 하에 미주리 주에서 생활하였다. 중요한 사건들이 두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발생했으며, 교회의 역원들은 필요할 때마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여행하였다. 여기에서는 이 7년 동안 커틀랜드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먼저 다룬 다음, 미주리에서 같은 기간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을 다루게 된다.

 

오하이오 주로 집합하는 과정에서 성도들의 희생

오하이오 주로 온 많은 성도들은 큰 희생을 치르었다. 가족들로부터 의절 당한 사람도 있었고, 이전의 친구들로부터 버림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브리감 영은 선지자의 집합하라는 부름에 응함으로써 어떤 희생을 치르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1833년 9월에] 커틀랜드에 도착했을 당시, 저에게는 돌보아야 할 자녀가 둘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홀아비였습니다. 만일 성도들과 함께 집합했던 사람들 가운데 저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그야말로 완전히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브리감 영 형제님, 신발은 있었습니까?’ 아니오, 빌린 장화 한 켤레 말고는 제게 신발이 없었습니다. 입은 지 3,4년 되는, 손으로 만든 외투 말고는 겨울에 입을 옷도 없었습니다. ‘바지는요?’ 없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바지도 없었단 말입니까?’ 네. 바지 하나를 구할 때까지 빌려 입었습니다. 저는 여행하면서 전도하는 가운데 제 모든 재산을 써버렸습니다. 전도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약간의 재산이 있었습니다.… 여행하면서 전도하는 동안 제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셉이 ‘나아가십시오.’라고 했을 때 저는 최선을 다해 나아갔습니다.”4

다른 많은 충실한 성도들이 커틀랜드로 왔을 때, 이미 이곳에 와 있던 성도들이 그들을 맞아주었으며 얼마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어 주었다. 그처럼 용감 무쌍한 사람들이 교회의 눈부신 성장과 발전의 초석을 놓았던 것이다.

 

커틀랜드 지역에서 받은 계시들

선지자 조셉은 커틀랜드 지역에서 사는 동안 많은 계시를 받았으며, 그 가운데 65가지가 교리와 성약에 포함되어 있다. 이 계시에서는 복지, 표적을 구하는 것, 도덕적인 행위, 음식 섭취의 원리, 십일조, 신권의 권능, 선지자의 역할, 영광의 세 가지 등급, 선교 사업, 재림, 헌납의 법 및 다른 많은 주제들과 관련된 주님의 뜻이 가르쳐지고 있다.

 

조셉 스미스 역 성경

1830년 6월, 조셉 스미스는 킹 제임스(영어) 판 성경을 영감에 따라 수정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지명 받은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은 조셉 스미스 역 성경으로 알려져 있다. 1830년 6월부터 1833년 7월 사이에 선지자는 이 성경에 많은 변경을 가했는데, 여기에는 성서 용어를 수정하고 교리를 분명히 하고 역사 및 교리적 자료를 복원하는 일 등이 포함되었다.

조셉은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종종 성경 구절을 깊이 생각하다가 주님께 질문하곤 했는데 그 응답으로 많은 계시를 받았다. 조셉과 시드니 리그돈이 요한복음 5장 29절을 번역한 뒤인 1832년 2월 16일에도 그러한 계시 하나가 주어졌다. 그들은 이 구절에 대해 깊이 생각했으며, “주께서 이해의 눈을 만지시니, [그들]의 눈이 열리는지라 주의 영광이 주위에 빛났[던]”(교리와 성약 76:19) 일도 있었다. 그들은 모든 시대의 위대한 시현들 가운데 하나를 받았던 것이다. 그것이 현재 교리와 성약 76편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거룩한 운명에 대해서 배웠고, 어떤 사람이 세 가지 영광의 왕국에 거하게 되는가에 대한 영원한 진리들을 배웠다.

 

계시들을 출판함

1831년 11월에 오하이오 주 하이럼에서 열린 특별 대회에서 교회 회원들은 선지자에게 주어진 약 70가지의 계시를 담은 계명의 책 출판 문제를 가결했다. 이 대회 동안에 주님은 조셉 스미스에게 계명의 책의 서문이자 부록이 되는 계시를 주셨다.(이것이 후에 교리와 성약 1편과 133편이 되었다.)

책을 인쇄하는 임무가 미주리 주 잭슨 군에서 인쇄 기기를 갖고 있던 윌리엄 더블류 펠프스에게 주어졌다.(계명의 책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면, 40쪽을 참조한다.) 계명의 책에 포함된 계시들은 다른 계시들과 함께 후에 교리와 성약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인쇄되었는데, 1835년 커틀랜드에서 출판되었다. 선지자 조셉이 약간의 수정을 가한 몰몬경 제2판도 커틀랜드에서 인쇄되었다.

교회가 조직된 지 몇 개월 후에 주님은 선지자의 아내인 에머에게 거룩한 찬송가를 선곡하는 일을 시작하도록 명하심으로써 교회에서의 음악의 비중을 강조하셨다.(교리와 성약 25:11 참조) 그녀가 편집한 찬송가가 커틀랜드에서 출판됨으로써 성도들이 다음과 같이 주님의 약속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는 나를 즐겁게 하나니, 의인의 노래는 내게 바치는 기도니라. 저희 머리 위에 축복을 주어 응답하리라.”(교리와 성약 25:12)

 

선지자 학교

1832년 12월과 1833년 1월에, 선지자 조셉은 교리와 성약 88편이 된 계시를 받았다. 이 계시에서는 다른 내용들과 함께, 형제들에게 복음 교리와 원리, 교회 업무 및 기타 사항들을 가르치기 위해 “선지자 학교”(교리와 성약 88:127)를 설립하라는 지시가 주어졌다.

1833년 겨울 동안, 선지자 학교가 자주 열렸으며, 조셉과 에머 스미스는 형제들이 습관적으로 담배를 피우는 문제, 특히 모임 중에 담배 연기가 자욱해지고, 씹는 담배 때문에 주위가 불결해지는 문제에 대해 염려하게 되었다. 조셉 스미스는 이 문제에 대해 주님께 여쭌 결과, 지혜의 말씀이라고 하는 계시를 받았다. 이 계시에서는 몸과 영을 돌보라는 주님의 계명이 주어졌으며, 이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지혜와 지식의 큰 보화, 감추인 보화까지”(교리와 성약 89:19) 찾는 영적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지혜의 말씀에는 당시 의학계나 과학계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건강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후에 매우 유익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술이나 담배를 취하지 않도록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헌납의 법

1831년, 주님은 의롭게 따르면 가난한 후기성도들의 생활에 축복이 될 것이라는 영적, 세상적인 제도인 헌납의 법에 관해 여러 가지 점들을 밝혀 주시기 시작했다. 이 율법에 따라 교회 회원들은 모든 재산을 교회의 감독에게 헌납, 즉 양도 증서를 바치라는 권고를 받았다. 대신 감독은 회원들에게 유산, 즉 청지기 직분을 부여해 주었다. 가족들은 최선을 다해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였다. 연말에 가서 재산이 불어난 사람은 이것을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는 데 사용하도록 감독에게 이 불어난 만큼을 바쳤다. 주님으로부터 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부름 받은 사람은 에드워드 패트리지였다.

헌납의 법은 회원들을 영적으로 강화시키고 경제적인 면에서 비교적 평등하게 함으로써 탐욕과 가난을 제거하기 위한 원리와 방법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부 성도들은 이 법을 잘 지키며 생활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기도 했으나, 이기적인 욕망을 이기지 못한 회원들도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 율법은 교회에서 철회되고 말았다. 1833년에 주님은 십일조의 법을 계시해 주셨으며(교리와 성약 119편 참조), 이는 오늘날 교회의 재정의 법으로 지속되고 있다.

 

신권의 강화

 

신권 직분에 대한 계시

교회 회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선지자는 계속해서 신권 직분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그는 주님의 지시에 따라 자신을 회장으로 하고 시드니 리그돈과 프레드릭 지 윌리엄스를 보좌로 하는 제일회장단을 조직했다. 그는 또한 십이사도 정원회와 칠십인 제일 정원회도 조직했다. 그는 감독과 감독 보좌, 대제사, 축복사, 고등 평의회, 칠십인 및 장로를 부르고 성임했다. 그는 교회의 첫번째 스테이크를 조직했다.

침례를 받은 지 얼마되지 않아 경험이 없던 회원들은 봉사하라는 부름에 몹시 당황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뉴웰 케이 휘트니는 에드워드 패트리지가 미주리 주 성도들의 감독으로 부름 받았을 때 커틀랜드에서 봉사하도록 1831년 12월에 교회의 두 번째 감독으로 부름 받았다. 뉴웰은 바로 선지자로부터 주님께서 계시로써 그에게 부름을 주셨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 직분이 요구하는 바를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선지자는 그에게 “스스로 나아가서 아버지께 간구하십시오.”라고 권고했다. 뉴웰은 나아가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간구하는 동안 하늘로부터 “너의 힘이 내 안에 있느니”5라고 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그 부름을 받아들이고 18년 동안 감독으로 봉사했다.

 

시온 진영에서의 지도자들의 훈련

교회는 시련을 거치고 경험을 쌓고 충실한 것으로 입증되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선지자에게 진실하게 생활할 신권 지도자들을 매우 필요로 했다. 시온 진영이 행군하게 됨에 따라 힘든 상황에서 순종하는지를 증명할 수 있고, 선지자 조셉 스미스로부터 개인적으로 훈련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시온 진영은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심하게 핍박 받고 있던 미주리 주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조직되었다. 많은 성도들이 그들의 집에서 쫓겨났다.(더 자세한 내용은 39~45쪽 참조) 1834년 2월 24일, 주님은 조셉 스미스에게 일단의 남자들을 조직하여 커틀랜드에서 미주리까지 행군하여 성도들에게 그들의 땅을 회복시켜 주는 일을 돕게 하라는 계시를 주셨다.(교리와 성약 103편 참조) 주님은 그분이 그들과 함께 할 것이며 그들의 “근면과, 충실과, 신앙의 기도를 통하여”, “모든 승리와 영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다.(교리와 성약 103:36) 십이사도 정원회와 칠십인 정원회의 초기 회원들은 대부분 이 경험에 의해 장래의 책임을 수행할 준비가 되었다.

시온 진영은 1834년 5월 6일에 오하이오 주 뉴 포티지에서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최종적으로 이 시온 진영에는 207명의 남자와 11명의 여자와 11명의 어린이들이 포함되었는데, 선지자는 이들을 10명과 50명씩의 부대로 분리하여 각 부대마다 대장을 뽑도록 지시하였다. 신병인 조셉 홀브룩은 이 진영이 “고대 이스라엘의 반차에 따라서”6 조직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45일 동안 1천 마일 이상 떨어진 미주리 주 클레이 군으로 함께 행군했다. 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가능한 한 빨리 여행했다. 음식을 충분히 먹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남자들의 경우에는 조악한 빵과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버터와 옥수수 죽과 진한 꿀과 날 돼지고기와 부패한 햄과 구더기까지 끓는 베이컨과 치즈 등을 제한된 양 밖에 먹을 수 없는 때도 자주 있었다.

후에 사도가 된 조지 에이 스미스는 배고픈 때가 자주 있었다고 적고 있다. “너무 지치고 배고프고 졸려서 길을 걷는 동안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나무가 서 있는 옆으로 아름다운 개울물이 흐르고 맛있게 보이는 빵 한 조각과 우유 한 병이 우물가에 펼쳐진 보자기 위에 놓여 있는 꿈을 꾸기까지 했다.”7

이 진영은 영성과 계명에 대한 순종에 많은 강조를 했다. 주일날이 되면 그들은 모임을 갖고 성찬을 나누었다. 선지자는 왕국의 교리들을 자주 가르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으며, 그분의 천사들이 우리를 앞서 갔으며, 우리 작은 부대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천사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우리가 그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8

그러나 시온 진영의 어려운 문제들 때문에 시온 진영에 참여한 사람들은 많은 희생을 치르기 시작했다. 이 정련된 과정 때문에 불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순종심이 없는데다 종종 자신들의 문제로 조셉을 비난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5월 17일에 선지자는 반항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가 되어 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9 하라고 권고했다.

시온 진영은 6월 18일에 미주리 주 클레이 군에 도착했다. 그러나 미주리 주의 주지사인 대니얼 덩클린은 성도들로 구성된 군대가 집에서 쫓겨난 교회 회원들의 집을 다시 찾아 주는 일을 돕겠다는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시온 진영의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 부대의 목표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 그들의 신앙을 마지막으로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망하고 분노한 일부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반항의 뜻을 나타냈다. 결국 선지자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파괴적인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경고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콜레라라는 처참한 역병이 이 시온 진영에 퍼졌다. 콜레라가 끝나기 전에 조셉 스미스를 포함해 이 진영의 3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이 감염되어 이후에 14명이 숨졌다. 7월 2일, 조셉은 다시 진영에게 주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겠다는 성약을 맺으라고 경고하고, 그들이 그렇게 하면 그 순간부터 역병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손을 들어 성약을 맺었으며, 역병은 끝나게 되었다.

7월 초에 진영의 대원들은 선지자에 의해 명예롭게 해산되었다. 이 여행 결과 누가 주님 편에 있고 누가 지도자 직분에서 봉사하기에 합당한 지가 판명되었다. 선지자는 후에 행군의 결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싸우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삶을 바치고 아브라함과 같이 큰 희생을 한 많은 사람들중에서 택하지 않으셨다면 지상의 나라들에 복음 문을 열 열두 사람과 그들의 지시를 받아 그들의 길을 좇을 칠십 명으로 왕국을 세우는 일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10

시온 진영의 일원이자 후에 교회의 제4대 회장이 된 윌포드 우드럽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경험을 했다. 우리는 선지자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졌으며, 그 분과 함께 1천 마일을 여행하였고, 그 분에게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는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주어지는 것과 그 계시가 성취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특권도 누렸다.”11

시온 진영이 해산된 지 5개월 후인 1835년 2월에 십이사도 정원회와 칠십인 제일 정원회가 조직되었다. 두 정원회의 직책 82개 가운데 79개가 시온 진영의 행군에서 시험 받고 인정 받은 사람들에 의해 채워졌다.

조셉 스미스는 커틀랜드에서 장래의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계속했다. 후에 교회의 회장이 된 브리감 영, 존 테일러, 윌포드 우드럽 및 로렌조 스노우가 커틀랜드 시절에 침례를 받았으며, 그 후 그들은 1901년까지 교회를 이끌었다. 더욱이 그 다음에 부름 받아 1951년까지 교회를 이끈 세 명의 회장인 조셉 에프 스미스, 히버 제이 그랜트와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용감한 커틀랜드 개척자들의 직계 후손이었다.

 

선교 사업이 진척됨

성도들이 커틀랜드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선교사들이 집을 멀리 떠나 복음을 전파하라는 부름을 받았으며, 이들은 대부분이 개인적으로 큰 희생을 치르었다. 선교사들은 미국의 여러 주와 캐나다 일부 지역과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까지 파송되었다. 이러한 선교 사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참되다는 간증을 얻었다. 그들은 용감한 회원이 되어 조직된 지 얼마되지 않은 교회에 큰 힘이 되었다.

커틀랜드에서 기록된 많은 계시들 가운데는 회원들에게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라고 한 계명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두 사람씩 짝지어 나의 영의 권능으로 나아가 내 이름으로 나의 복음을 전파하며 나팔 소리같이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의 천사처럼 나의 말을 선포하라.”(교리와 성약 42:6) 그 다음 해에 주님은 이렇게 명하셨다. “이미 경고를 받은 사람은 저마다 자기 이웃을 경고할 책임이 있느니라.”(교리와 성약 88:81)

 

초기 오하이오 개종자들의 사명

오하이오 주 출신의 개종자인 지라 펄시퍼는 회복에 관한 메시지를 열성적으로 전한 사람들의 본보기이다. 그는 1832년 1월에 교회에 가입하였으며 그 직후에 자신이 “장로의 직분에 성임되고 선교 사업을 나가 국내외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12고 기록했다. 그와 또 다른 선교사인 엘리야 체니는 뉴욕 주 리치랜드라는 조그만 마을로 여행하여, 그곳의 마을 학교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리치랜드에서 펄시퍼 장로로부터 침례 받은 첫번째 개종자 중에는 후에 교회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선교사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교회의 제4대 회장이 된 윌포드 우드럽이라는 젊은 농부도 있었다. 한 달 사이에 이 두 명의 선교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으며, 리치랜드에 교회의 지부를 조직했다.

이웃에게 경고하라는 부름을 받은 많은 선교사들이 그에 대한 응답으로 어떤 상황에서건 선교 사업을 나갔다. 그들 중에 상당수가 이미 결혼을 하여 가장의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추수 절기에도, 혹한의 겨울에도, 개인적으로 융성해지던 시기에도, 경제적으로 침체해 있던 시기에도 선교 사업을 나갔다. 선교 지역으로 들어갈 당시 그들은 대부분이 매우 가난한 상태에 있었다. 선지자 자신도 15,000마일이 넘는 거리를 여행하는 가운데 1831년부터 1838년까지 미국의 여러 주와 캐나다에서 14회의 단기 선교 사업을 수행했다.

선지자의 사촌인 조지 에이 스미스는 미국 동부 지역에서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을 당시 너무나 가난해서 필요한 옷과 책을 구입할 재산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선지자 조셉과 그의 형인 하이럼이 그에게 얼마의 회색 천을 주었으며, 엘리자 브라운은 그에게 외투와 조끼와 바지를 만들어 주었다. 브리감 영이 그에게 신발 한 켤레를 주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소형 성경책을 한 권 주었고, 선지자는 몰몬경 한 권을 주었다.

1836년 봄에 에라스터스 스노우 장로와 존 이 페이지 장로도 선교 지역으로 떠날 당시 매우 가난한 상태였다. 스노우 장로는 펜실베이니아 주 서부 지역으로 선교 사업을 하러 출발할 당시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나는 도보로 혼자서 커틀랜드를 떠났으며, 당시 교회 서적 몇 권과 양말 한 켤레를 담은 작은 가방을 손에 들고 갔으며 주머니에는 5센트 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가진 세상적인 재산의 전부였다.” 페이지 장로는 선지자에게 입을 옷이 없어서 전도하라는 부름을 받아들일 수 없노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외투 하나도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선지자는 그의 외투를 벗어서 페이지 장로에게 주었다. 그는 페이지 장로에게 선교 사업을 나가면 주님께서 많은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13 이 선교 사업에서 페이지 장로는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쳐 교회에 들어오게 하는 축복을 받았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사명

1835년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원들은 미국 동부 지역 및 캐나다에서 선교 사업을 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이 때가 교회 역사상 유일하게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 12명 모두가 동시에 선교 사업의 부름을 받은 시기였다. 그들이 귀환한 뒤, 히버 시 킴볼은 그들이 하나님의 권세를 느꼈으며 병든 자들을 고치고 사탄을 쫓아낼 수 있었다고 간증했다.

 

영국으로 선교 사업을 나감

커틀랜드 시절 후반부에, 교회 내에 위기가 생겼다. 몇몇 지도자들을 포함한 일부 회원들이 시련과 박해를 참지 못하고 선지자 조셉과 다른 교회 지도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함으로써 배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조셉 스미스에게 그분의 교회를 구원하기 위한 어떤 새로운 일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계시하셨다. 그 어떤 일이란 영국 사람들을 교회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다. 1837년 6월 4일 일요일, 선지자는 커틀랜드 성전에서 히버 시 킴볼 장로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히버 형제님, 주님의 영이 저에게 ‘나의 종 히버를 영국으로 가서 나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나라에 구원의 문을 열게 하도록 하라’고 속삭였습니다.”14

히버 시 킴볼이 선교 사업을 위해 성별되고 있는 동안, 올슨 하이드 장로가 그 방으로 들어왔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들은 올슨은 마음이 움직여 선지자를 비난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였다. 그는 선교사로 봉사하겠다고 제안하여, 그도 역시 영국으로 떠나도록 성별되었다.

히버 시 킴볼은 그 타국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몹시 열망하였기 때문에, 영국 리버풀에 도착했을 때 배가 항구에 정박하기도 전에 배에서 부두로 펄쩍 뛰어 내려가 자신이 회복에 관한 메시지를 가지고 바다 건너 그 땅에 처음으로 도착한 사람이라고 외쳤다. 7월 23일까지 이 두 선교사는 수많은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7월 30일에 첫번째 침례 의식을 갖기로 일정을 잡았다. 조지 디 와트는 프레스톤의 리블 강에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이 되었다. 이는 영국에서 맨 처음으로 침례 받는 영광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8개월 내에 수백 명의 개종자가 교회에 가입하고 여러 지부가 조직되었다. 이러한 거대한 영혼의 수확에 대해 회고하면서, 히버는 선지자와 그의 보좌들이 “저의 머리에 손을 얹고… 하나님께서 그 나라에서 사람들을 개심시켜 그분 앞으로 데려가는 일을 하는 저를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며 천사들이 저를 호위하고 높이 들어 올려 제 발이 결코 미끄러지지 않게 될 것이며 제가 큰 축복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하는 원천이 될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15라고 말했다.

초기의 많은 선교사들이 개인적인 희생을 무릅쓰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선교 사업의 부름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영국의 수많은 개종자들이 회복된 복음을 듣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시온에 집합하였으며 앞에 놓여진 중대한 시기를 대비해 교회를 매우 강하게 하였다.

 

커틀랜드 성전

 

성도들의 희생

1832년 12월 27일, 성도들은 주님께서 성전을 건설하라고 명하신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교리와 성약 88:119 참조) 1833년부터 1836년사이에 교회가 커틀랜드에서 가장 우선 순위로 삼은 사업은 바로 성전 건축이었다. 이는 당시 필요한 노동력과 돈이 부족한 성도들에게 큰 도전이었다. 엘리자 알 스노우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당시… 성도들은 수자도 얼마 안되는데다 대부분이 몹시 가난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형태를 보여 주시고 규모를 정해 주시면서까지 그분의 이름으로 집을 지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명하시지 않으셨다면, 당시의 상황에서 그러한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상식 밖의 일이라는 말들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16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필요한 도움과 재물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필요한 희생을 하기 시작했다. 존 태너는 주님께서 성전 건축을 위한 재물을 마련하는 일을 돕기 위해 준비하신 사람이었다. 1834년 12월에 뉴욕 주 볼튼에서 개종한 존은 “밤에 꿈, 즉 시현을 통해 누군가가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즉시 서부에 있는 교회로 가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커틀랜드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즉시 교회로 이주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은 바로 그 시간에 선지자 조셉과 몇몇 형제들이 기도 모임을 갖고 주님께 성전을 지을 농장 부지에 걸려 있는 저당권을 해제시켜 줄 재물을 가진 형제나 몇 명의 형제들을 보내 주시도록 간구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커틀랜드에 도착한 다음 날… [그는] 전술한 농장 부지를 구입하면서 생긴 빚을 갚지 않으면 저당권자가 곧 그 농장을 차압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선지자에게 2천 달러를 빌려 주고 선지자로부터 원금과 함께 이자를 돌려주겠다는 각서를 받음으로써, 그 농장에 대한 저당권은 해제될 수 있었다.”17

커틀랜드 성도들이 기울인 엄청난 노력은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희생하고 헌납한 사례이다. 그들은 3년 동안 성전 건축을 위해 일했다. 남자들이 건축 기술과 노력을 제공하는 동안 여자들은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입히기 위해 방적일과 뜨개질을 했다. 후에 그들은 각 방을 구분하는 커텐도 만들었다. 성전을 파괴하겠다는 폭도들의 위협 때문에 건축이 더욱 힘들어졌으며, 사람들은 낮에 일하고 밤에 성전을 지켜야 했다. 이렇듯 성도들이 시간과 재물을 막대하게 희생한 후, 마침내 성전이 1836년 봄에 완공되었다.

 

성전 헌납

성전이 완공됨으로써 주님은 시현과 천사들의 도움과 함께 커틀랜드의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큰 축복을 부어 주셨다. 조셉 스미스는 이 시기를 “우리에게 희년의 해요, 기쁨의 시기”18라고 불렀다. 대니얼 타일러는 이렇게 간증했다. “모두들 천국을 미리 맛본 느낌을 가졌다.… 복천년이 시작되었는가 하고 의아해 할 정도였다.”19

이처럼 영이 부어지는 것이 절정을 이룬 것은 바로 성전 헌납식에서였다. 약 1천 명의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1836년 3월 27일에 성전에 모였다. 헌납식 찬송가들이 불려졌다. 그 중에는 윌리엄 더블류 펠프스가 이 헌납식을 위해 만든 “타는 듯한 하나님의 영”도 포함되었다. 성찬이 집행되고, 시드니 리그돈과 조셉 스미스 및 다른 사람들의 말씀이 이어졌다.

조셉 스미스는 계시로 받은 헌납 기도문을 읽었다. 이 기도문은 현재 교리와 성약 109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도문에서 그는 주님께 오순절에 하셨던 것처럼 백성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을 간구했다. “격렬하게 불어오는 열풍처럼 당신의 영광이 당신의 집에 가득하게 하옵소서.”(교리와 성약 109:37) 많은 사람들은 선지자가 성전에서 신권 정원회의 회원들과 만났던 그날 밤에 이 기도가 실현되었다고 기록했다.

엘리자 알 스노우는 이렇게 적었다. “그 헌납식은 반복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인간의 언어로도 그 기념할 만한 날의 거룩한 표현 만큼은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천사들이 나타났는가 하면 모든 참석자들은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각자 마음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을 담고 있었다.”20 헌납 기도가 끝난 후, 모든 회중이 일어나 손을 높이 들고 여러 차례 호산나라고 외쳤다.

1주일 후인 1836년 4월 3일, 후기성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몇 건이 일어났다. 그날 성전에서 구주께서 친히 조셉 스미스와 올리버 카우드리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나는 이 집을 기쁘게 받아들이리니, 나의 이름이 여기에 있으리라. 나는 자비를 베풀어 이 집 안에서 나의 백성에게 모습을 나타내리라.”(교리와 성약 110:7) 모세와 일라이어스와 엘리야가 신권의 열쇠를 추가로 회복시키기 위해 나타남으로써 다른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시현이 뒤따랐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집합에 관한 열쇠들을 부여해 주었으며, 일라이어스는 조셉과 올리버에게 아브라함의 복음의 신권 시대를 맡겼고, 엘리야는 인봉의 열쇠를 회복시켜 주었다.(교리와 성약 110:11~16 참조) 이렇게 추가로 주어진 모든 열쇠는 마지막 경륜의 시대에 주님의 왕국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것들이었다.

성전에서 집행되는 충만한 신권의 축복들은 커틀랜드 시기 동안에는 나타내지거나 집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축복들은 몇 년 후 나부 성전이 건축되는 동안에 선지자 조셉을 통해 교회에 나타내졌다.

 

커틀랜드로부터의 탈출

성전 건물이 많은 축복을 가져다 주었으나, 1837년과 1838년에 충실한 성도들은 배도와 박해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을 직면해야 했다. 이로써 커틀랜드에서의 교회 시대가 종언을 더 빨리 고하게 되었다.

미국이 재정적인 공황을 겪고 있는 동안, 그 여파는 교회에도 밀어닥쳤다. 일부 회원들 중에는 일확 천금에 사로잡혀 빚을 지게 되고 커틀랜드 세이프티 소사이어티가 붕괴하는 등 경제적인 붕괴가 만연한 암울한 시기를 영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커틀랜드 세이프티 소사이어티는 커틀랜드의 교회 회원들이 설립한 것이었는데, 이와 관련되어 일어난 문제로 인해 일부 회원들은 부당하게 조셉 스미스를 비난했다.

그 지역 사회의 주민들과 교회에서 파문당했거나 배도한 원한을 품은 회원들이 조직적으로 박해를 가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성도들과 지도자들에 대한 폭력이 늘어남에 따라, 성도들은 더 이상 커틀랜드에서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생명이 매우 위험한 지경에 처한 선지자는 1838년 1월에 커틀랜드를 떠나 미주리 주 파웨스트로 피신했다. 1838년 한 해 동안, 대부분의 충실한 성도들도 떠나야 했다. 그들은 신앙과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인 성전을 남겨 둔 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지도자들에 대한 충실한 순종과 주님의 사업을 위해 기꺼이 바친 희생이라는 영원 불변의 유산을 남겼다.

 

Notes

1. 올슨 에프 휘트니, “뉴웰 케이 휘트니”, 컨트리뷰터지, 1885년 1월호, 125쪽

2. 엘리자베스 앤 휘트니, 에드워드 더블류 튤리지, 몰몬의 여인들[1877년], 42쪽에서 인용

3. 올슨 에프 휘트니, 대회 보고, 1912년 4월, 50쪽

4. 브리감 영, 설교집, 11:295

5. 올슨 에프 휘트니, “뉴웰 케이 휘트니”, 126쪽

6. 조셉 홀브룩, 제임스 엘 브래들리, 시온의 진영 1834년: 남북 전쟁의 서곡 (1990년), 33쪽에서 인용

7. 조지 앨버트 스미스, “조지 앨버트 스미스의 역사, 1834~1871년”, 후기성도 교회 기록 보관소

8. 교회사, 2:7

9. 교회사, 2:68

10. 조셉 영 일세, 칠십인 조직의 역사 (1878), 14쪽

11. 윌포드 우드럽, 데져렛 뉴스, 1869년 12월 22일, 543쪽

12. “지라 펄시퍼 기록집, 1858~1878”, 5쪽; 후기성도 교회 기록 보관소

13. “존 이 페이지의 역사,” 데져렛 뉴스, 1858년 6월 16일, 69쪽

14. 올슨 에프 휘트니, 히버 시 킴볼의 생애, 3판(1945년), 104쪽

15. 올슨 에프 휘트니, 히버 시 킴볼의 생애, 105쪽

16. 엘리자 알 스노우: 불사 불멸 (1957년), 54쪽

17. “장로의 일상 스케치,” 자서전 모음집 (1883년), 12쪽

18. 교회사, 2:430

19. 대니얼 테일러, “경험한 사건,” 자서전 모음집, 32쪽

20. 엘리자 알 스노우, 튤리지, 몰몬 의 여인들, 95쪽에서 인용

 

 


미주리 주에 시온을 건설함

 

미주리에서의 초기 시절

오하이오 주 커틀랜드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미주리 주 잭슨 군에서도 많은 교회 회원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뉴욕 주 콜스빌에 살던 성도들은 떠나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기꺼이 고향을 등지고 커틀랜드로 모였다.(18쪽 참조) 그들은 1831년 5월 중순에 오하이오에 도착했을 때, 자신들이 거주할 땅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성도들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 주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자신과 시드니 리그돈 및 28명의 다른 장로들에게 미주리로 전도하러 가라고 명하는 계시를 받았다. 주님은 또한 콜스빌의 성도들도 “미주리 땅으로”(교리와 성약 54:8) 가라고 지시하셨다. 그들은 시온으로 알려지게 된 땅에 정착한 성도들의 첫번째 그룹이었다.

콜스빌 지부의 지부장이었던 뉴웰 나이트는 즉시 성도들을 모았다. 에밀리 코번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진실로 순례자들이었으며 더 좋은 지역을 찾기 위해 출발했습니다.”1 그들은 오하이오 주 웰스빌에서 증기선을 타고 오하이오의 미시시피 강과 미주리 강을 이용하여 미주리 주 잭슨 군으로 갔다. 그 증기선의 선장은 그들에 대해 “자신들이 서부로 태워다 준 사람들 중에서 가장 평온하고 온순한 이주자들이었으며 ‘불경스러운 말과 상스러운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도박과 술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2

선지자를 비롯한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잭슨 군에 콜스빌 성도들이 살 곳을 미리 마련하기 위해 육로를 이용하여 서둘러서 그들보다 앞서 갔다. 선지자 일행은 1831년 7월 14일에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에 도착했다. 그 지역을 살펴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성한 인도를 구한 후, 선지자는 “[주님이] 친히 저에게 나타나셨으며 저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이 계획하신 바로 그 곳에서 집합의 사업을 시작하고 시온으로 불릴 거룩한 도시를 세우도록 명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3

이 계시는 미주리가 성도들의 집합을 위해 주님이 계획하신 곳이라는 사실과 “지금 인디펜던스라 하는 곳이 그 도시의 중심부니라. 성전을 세울 지점은 서쪽으로 재판소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느니라.”(교리와 성약 57:3)는 사실을 명시해줍니다. 성도들은 미주리 주와 인디안 영토를 가르는 경계선까지 그 도시의 서쪽에 있는 모든 땅을 구입해야 했다.(교리와 성약 57:1~5 참조)

조셉 스미스와 패트리지 감독은 인디펜던스에서 서쪽으로 약 12마일 떨어진 코 타운쉽에 콜스빌 지부를 세울 땅을 구했다. 1831년 8월 2일에 지부 회원들이 도착한 후, 아주 상징적인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사람이 통나무째로 막 자른 떡갈나무를 옮겨다가 올리버 카우드리가 준비해 둔 돌에 가로 놓음으로써 시온 건설을 위한 상징적인 토대를 놓았다. 성도들은 그렇게 초라하게 시작하여 교회와 학교로 이용될 건물을 세웠다.4

다음 날 몇 명의 형제들이 인디펜던스 재판소에서 서쪽으로 반 마일 떨어진 높은 지대에 모였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성전을 지을 곳에 모퉁이 돌을 놓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헌납했다. 시온 땅의 중심지는 주님의 집이 되어야 했다.5

선지자는 커틀랜드로 돌아갔고 잭슨 군의 성도들은 에드워드 패트리지 감독으로부터 토지를 나누어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너무나 궁핍하여 오두막을 짓는 동안 폭풍우를 막아 줄 천막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농기구가 전혀 없어 사람들을 동쪽으로 200마일 이상이나 떨어진 세인트 루이스로 보냈다. 성도들은 장비를 갖추자마자 파종하기 위해 땅을 갈기 시작했다. 에밀리 코번은 자신이 목격한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너덧 마리의 소가 멍에를 메고 비옥한 땅을 갈아 엎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광경이었어요. 곧 이어 울타리를 치는 일과 다른 공사들도 급속히 진행되었어요. 시간과 돈과 손이 돌아가는 대로 가족들을 위한 오두막 집들이 신속히 세워졌어요.”6

콜스빌 성도들은 개척지의 불편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명랑하고 행복하게 지냈다. 그들과 함께 지냈던 팔리 피 프랫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기도와 모임을 통해 많은 행복한 순간을 누렸습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에게 부어졌으며 어린 아이들에게조차 그것이 주어져서 여덟 살이나 열 살 또는 열두 살 된 많은 어린이들이 모임과 가족 예배에서 말씀과 기도를 하고 예언을 할 정도였습니다. 광야에 세워진 이 작은 교회에는 화평과 단합의 영이 있었으며 사랑과 선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 마음속에 항상 소중하게 기억될 것입니다.”7

그 성도들은 1832년 4월에 선지자와 시드니 리그돈의 두 번째 방문을 받는 축복을 누렸다. 이 지도자들은 오하이오 주 하이럼에 있는 존 존슨 농장에서 아주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온 직후였는데, 그들은 그 곳에서 성경의 번역 작업을 하고 있었다. 교회를 대적하는 폭도들이 밤중에 조셉 스미스를 그의 집에서 끌어냈다. 그들은 그의 숨통을 막고 옷을 벗겨서 몸에다 타르를 칠하고 깃털을 꽂았다. 시드니 리그돈은 발꿈치를 잡힌 채로 꽁꽁 얼어 붙은 거친 땅 위로 끌려간 탓에 머리가 심하게 찢어졌다.

이제 그들은 그런 육체적인 고통과는 반대로 친구들과 함께 안전하게 되었다. 조셉은 “같은 신앙 안에서 같은 침례를 통해 하나가 되고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 자매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환영을 받았으며, 특히 고대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기뻐했던 것처럼 콜스빌 지부의 회원들이 기뻐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 참으로 좋다는 것”을 확인했다.8

 

잭슨 군에서의 박해

주님의 명에 따라 패트리지 감독은 오하이오와 다른 여러 곳에서 이주해오는 많은 성도들을 위해 잭슨 군에서 수백 에이커의 땅을 구입했다. 지도자들은 초기에 이들 회원들을 위해 인디펜던스, 콜스빌, 휘트머, 빅블루 및 프라이어리 지부를 세웠다. 1833년 후반부에 총 10개의 지부가 세워졌다.9 1833년 4월에 교회 회복 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빅블루 강에서 지부 연합 모임을 가졌을 때 1,000명 이상의 성도들이 참석했다. 뉴웰 나이트는 이 모임이 시온에서 기념식으로는 첫번째 모임이며 성도들이 모두 기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성도들이 기뻐할 때, 악마는 화를 내며 그의 백성과 종들도 화를 냅니다.”라고 말했다.10

4월이 다 가기 전에 박해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 지역의 주민들은 처음에는 교회 회원들에게 후기성도들이 그렇게 많이 이주해오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긴다고 경고했다. 주민들은 후기성도들이 투표에서 그들을 압도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성도들은 주로 북부 지역 출신들로서 대체로 노예 제도를 반대했는데 당시 미주리 주에서는 그것이 합법화되어 있었다. 몰몬경을 경전으로 믿고 잭슨 군이 궁극적으로 시온이 되며 자신들이 선지자에 의해 인도된다는 성도들의 믿음과 주장은 매우 불안한 것이었다. 또한 성도들이 인디언들과 접촉한다는 비난은 주민들의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반대자들은 “몰몬 재앙”을 몰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서명을 얻기 위해 때때로 은밀한 법으로 불리는 회보를 돌렸다. 이러한 적대감은 1833년 7월 20일에 약 400명에 이르는 폭도들이 힘을 합치기 위해 인디펜던스 재판소에 모였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그들은 성도들이 잭슨 군을 떠날 것과 교회 신문인 이브닝 앤드 모닝 스타지의 발행을 중단할 것, 그리고 더이상 교회 회원들이 잭슨 군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서면 요구서를 교회 지도자들 앞에 제출했다. 폭도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불법적인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는 편집인인 윌리암 더블류 펠프스의 집이기도 한 신문사 사무실을 습격했다. 그들은 인쇄기를 훔쳐갔으며 신문사를 파괴했다.

 

계명의 책을 파기함

신문사에서 인쇄되고 있던 가장 중요한 기획물은 계명의 책으로서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받았던 계시들을 처음으로 편찬한 것이었다. 폭도들은 신문사를 습격해서 제본되지 않은 그 책의 낱장들을 거리로 내던졌다. 이것을 본 두 어린 후기성도 소녀, 메리 엘리자베스 롤린스와 동생인 캐롤린은 목숨을 걸고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그것들을 건지려고 애썼다. 메리 엘리자베스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폭도들은] 한 웅큼의 낱장들을 가져 나와서는 ‘여기 몰몬의 계명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제 동생 캐롤린과 저는 울타리 모퉁이에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이 그 계명의 책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저는 그것들을 건져내기로 결심했습니다. 동생은 만일 제가 그것을 건지러 간다면 자기도 따라갈 것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죽일거야.’라고 말했습니다.” 폭도들이 그 집의 한쪽 끝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두 소녀는 달려가서 그 귀중한 종이들을 두 팔 가득히 안았다. 폭도들은 그 소녀들을 보고 멈추라고 명령했다. 메리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달렸습니다. 그들 중 두 명이 우리를 쫓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울타리 사이에 난 틈을 보고 그리로 해서 넓은 옥수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낱장들을 땅바닥에 놓고 우리 몸으로 그것을 덮어 감췄습니다. 옥수수는 5피트에서 6피트 정도의 높이로 무성하게 자라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변을 샅샅이 뒤지면서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왔으나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악당들이 사라지자 그 소녀들은 그 곳을 벗어나 어떤 낡은 통나무 마굿간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들은 메리 엘리자베스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펠프스 자매를 만났다. “펠프스 자매와 아이들이 마굿간 한쪽에 잠자리를 만들기 위해 나뭇가지를 날라다 쌓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그때 우리가 가진 것을 받아서… 그들은 그 낱장들을 작은 책으로 제본해서 한 권을 제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무척 귀중한 상이었습니다.”11

 

패트리지 감독이 타르칠을 당하고 깃털을 꽂힘

그 폭도들은 다음에 에드워드 패트리지 감독과 찰스 알렌을 붙잡았다. 그들은 인디펜던스의 공공 광장으로 끌려가서 몰몬경을 부인하고 잭슨 군을 떠나라는 강요를 받았다. 패트리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성도들은 어느 시대에나 박해를 받았으며 누구라도 상하게 할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가혹하게 다룬다면 무죄한 사람을 학대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겠지만 그 지역을 떠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폭도들은 자신들의 제의가 거절당하자 패트리지 감독과 알렌 형제의 겉옷을 벗기고 몸에다 타르 칠을 하고 깃털을 꽂았다. 패트리지 감독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내가 지극히 유순하게 그 학대를 감수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나를 풀어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엄숙해졌습니다. 내가 생각했듯이 그들은 마음에 감동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영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서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이나 그 누구에 대해서도 아무런 증오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12

 

빅블루 전투

폭도들은 7월 23일에 다시 왔다. 교회 지도자들은 폭도들이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면 자신들이 볼모가 되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폭도들은 교회 회원을 모두 다 해치겠다고 위협하면서 형제들에게 후기성도가 다 그 지역에서 떠나는 데 동의하도록 강요했다. 폭도들의 행위가 불법적이었고 미 합중국과 미주리 주의 헌법에 위배되었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은 주지사인 다니엘 던클린에게 도움을 구했다. 주지사는 그들에게 공민권에 대해 조언해 주고 성도들이 법률 고문을 갖도록 지시했다. 알렉산더 더블류 도니판과 다른 사람들이 교회 회원들을 대리하도록 고용되었다. 그것은 폭도들을 더욱 자극시켰다.

후기성도들은 처음에는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회원들이 폭행 당하고 재산이 파괴되는 상황은 마침내 빅블루 강 근처에서의 전투를 야기시켰다. 폭도 중 두 명이 죽었으며 성도들 가운데서는 앤드류 바버가 죽었다. 필로 디블은 배에 세 발의 총탄을 맞았다. 뉴웰 나이트가 불려와서 그에게 축복을 해주었으며 결과는 기적적이었다. 디블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뉴웰 나이트 형제가 와서 제 침대 곁에 앉았습니다.… 저는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제 머리에 영이 임하는 것을 느꼈으며 제가 치유되리라는 것을 즉시 알았습니다.… 저는 곧 일어났으며 총탄 때문에 몸 속으로 들어가 박힌 옷 조각과 함께 2.8리터 정도의 피를 쏟아냈습니다. 그 다음에 저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때부터는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피를 많이 흘려서 다소 약해진 것 말고는 부상으로 인해 아주 가벼운 고통이나 불편을 느껴본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13

던클린 지사가 중재에 나섰으며 토마스 피처 대령에게 양편을 무장 해제시키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피처 대령은 폭도들 편이었으므로 성도들의 무기를 취하여 폭도들에게 넘겨 주었다. 무방비 상태의 성도들은 폭도들로부터 공격 받았으며 그들의 집은 파괴되었다. 남자들은 숲 속으로 숨거나 심한 폭행을 당해야 했다. 마침내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을 소집하여 소유물을 가지고 잭슨 군을 떠나기로 했다.

 

클레이 군으로 피함

팔리 피 프랫이 다음과 같이 묘사한 것처럼 1833년 말에 대부분의 성도들이 미주리 강을 건너 북쪽의 클레이 군으로 가서 그 곳에 임시로 은신해 있었다.

“강기슭 양쪽에 나룻배들이 줄을 짓기 시작했다. 배에는 남자들과 여자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여러 가지 물품과 마차와 상자 및 식료품 등이 있었다. 밤이 지날 때마다 미루나무 밑에서 많은 캠프 모임을 가졌다. 사방 어디에서나 사람들을 볼 수 있었으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가운데 사람들은 텐트 안에도 있었고 모닥불 주변에도 있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찾아 다녔다. 어떤 사람들은 다행히 가족과 함께 물품과 식량을 갖고 탈출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사도 모르고 모든 소유물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우리의 눈먼 적들과 눈멀고 무지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 어떤 사람의 마음도 녹일 광경이었다.”14

잭슨 군에서 시온과 하나님께 바칠 성전을 건설할 기회는 성도들에게서 잠시 멀어졌다. 이제 약 1,200명 정도의 교회 회원들은 클레이 군의 강가에서 차디찬 겨울을 지내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했다. 마차 안에 거처를 마련한 사람도 있었고 산기슭에다 텐트나 움집을 지은 사람도 있었으며 버려진 오두막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뉴웰 나이트는 인디언의 오두막에서 겨울을 지냈다.

성도들이 클레이 군에서 처음으로 지은 건물 중 하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작은 통나무 교회였다. 그들은 그 곳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사악한 적의 손길로부터 구해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앞으로 그들을 보호해 주셔서 그들이 가는 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그 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간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15

 

시온 진영에 대한 박해

제3장에서 설명한 대로 주님은 조셉 스미스에게 잭슨 군의 자기 땅에서 내쫓긴 성도들을 돕기 위해 커틀랜드에서 미주리로 행군해갈 남자들을 모으라고 명하셨다. 1834년 6월말에 시온 진영이 미주리 주의 클레이 군 동쪽에 이르렀을 때, 300명 이상의 미주리 주민으로 구성된 폭도들이 그들을 해칠 의도로 대항하러 왔다. 형제들은 선지자 조셉의 지휘 하에 리틀 강과 빅피싱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캠프를 쳤다.

폭도들은 대포로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주님이 성도들의 전투를 치러 주셨다. 구름이 급속히 머리 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선지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비와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난 폭풍우였습니다. 바람과 비와 우박과 천둥이 격노한 것처럼 그들을 덮쳤습니다. 그들은 이내 용기가 꺾였으며 ‘조 스미스와 그의 군대’를 죽이겠다는 그들의 계획은 좌절되었습니다.… 폭풍우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마차 밑과 나무 구멍으로 기어 들어갔으며 한 낡은 오두막 안으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폭풍우가 끝났을 때 그들의 탄약은 젖어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억수같은 폭풍우를 겪은 후, “이 ‘계획이 무산된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전투에 나서실 때는 차라리 싸우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폭도들의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인디펜던스로 ‘돌아가는 길’을 밟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복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져서 파멸시키려는 적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을 보호해 준 것 같았습니다.”16

폭도의 군대가 성도들과 직면하고 던클린 지사가 성도들을 돕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 명백해지자 선지자는 주님께 가르침을 구했다. 주님은 그에게 지금은 시온의 구속을 위한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은 시온을 건설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자신을 더 많이 준비해야 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때까지도 다음과 같은 주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시온은 해의 왕국의 율법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건설될 수 없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시온을 내게로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나의 백성은 순종을 배우기까지 필요하면 저들이 겪는 고난으로 징계 받아야만 하느니라.”(교리와 성약 105:5~6)

주님은 다음과 같이 시온 진영은 그 군사적인 목적을 중단해야 한다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나의 백성의 범법으로 인하여 나의 장로들이 시온이 구속받는 날을 잠시 동안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느니라. 그리하여 저들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며 나의 백성이 더욱 완전하게 배우며.”(교리와 성약 105:9~10) 시온 진영의 형제들은 명예롭게 해체되었으며 선지자는 커틀랜드로 돌아갔다.

 

파웨스트의 교회 본부

대부분의 미주리 성도들은 클레이 군에 1836년까지 머물러 있었는데 그 때 클레이 군의 주민들은 그들에게 잭슨 군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체류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이제 이 일이 불가능해 보임에 따라 그들은 약속한 대로 떠나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법적으로 성도들이 이 요청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충돌을 일으키기보다 다시 한 번 자리를 옮겼다. 성도들의 친구로서 주의 입법부에 있던 알렉산더 더블류 도니판의 노력으로 인해 1836년 12월에 콜드웰과 데이비스라는 이름의 두 개의 새로운 군이 레이 군 밖에 만들어졌다. 성도들은 콜드웰 군의 자리로서 클레이 군에서 북쪽으로 60마일 정도 떨어진 파웨스트에 그들의 사회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군의 주요한 관리들이 후기성도들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성도들에 대한 박해의 끝이기를 바랐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오하이오 주 커틀랜드로부터 어렵게 여행하여 1838년 3월에 미주리 주 파웨스트에 도착했으며 그 곳에 교회 본부를 세웠다. 그는 5월에 북쪽의 데이비스 군에 있는 그랜드 강을 방문했을 때, 그 지역이 아담 온다이 아만 계곡으로서 “아담이 자기 백성을 찾아 보기 위하여 올 땅”(교리와 성약 116:1)임을 예언적으로 확인했다.17 아담 온다이 아만은 데이비스 군에서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1838년 7월 4일에 파웨스트에서 성전의 초석이 헌납되었다. 성도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적으로부터 풀려났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크룩크 강의 전투

그러나 이내 다시 박해가 시작되었다. 1838년 8월 6일에 데이비스 군 갤러틴의 투표소에서 100명의 폭도들이 성도들로 하여금 투표를 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것은 여러 사람이 다친 싸움으로 번졌다. 콜드웰 군과 데이비스 군에서 폭도들이 조장한 난동이 점점 커지자 릴번 더블류 보그스 주지사는 평화를 유지하도록 주의 민병대를 파견했다.

민병대의 장교 중 한 사람인 사무엘 더블류 보가트 장군은 사실상 폭도들과 밀접하게 결탁되어 있었다. 그는 세 명의 후기성도를 납치하여 레이 군의 북서쪽에 있는 그의 진영에 감금함으로써 무력 충돌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일단의 후기성도 민병대들이 납치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파견되어서 1838년 10월 25일에 맹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십이사도 중 한 명이었던 데이비드 더블류 패튼 장군은 민병대를 이끌다가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의 아내인 피비 앤 패튼과 조셉 스미스와 하이럼 스미스 및 히버 시 킴볼이 그와 함께 하기 위해 파웨스트로부터 왔다.

히버는 데이비드 패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생전에 그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복음의 원리는 임종의 순간에 그에게로부터 사망의 고통과 공포를 거두어갔으며 위로와 도움이 되었다.” 죽어 가는 그 사람은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신앙을 잃고 배도로 빠져들어가던 성도들을 염려하며 “오, 그들이 나와 같다면 얼마나 좋겠소! 난 아직 신앙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니까.”라고 외쳤다. 그런 다음 그는 피비 앤에게 “당신이 무엇을 하든 제발 신앙을 부정하지 마오.”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임종 직전에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시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니 당신께서 제 영혼을 풀어주시고 받아주시옵소서.” 그런 후 그는 둘러선 사람들에게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신앙으로 나를 잡아주었소. 그러나 바라노니 나를 풀어주시고 떠나게 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 킴볼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를 하나님께 맡겼으며 그는 신음 소리도 없이 이내 마지막 숨을 거두고 예수님 안에서 잠들었다.”18

사무엘 보가트 장군의 군대는 민병대라기 보다 폭도에 더 가깝게 행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릴번 더블류 보그스 지사는 크룩크 강 전투에서의 한 민병대원의 죽음과 다른 보고들을 받아들여서 그 악명 높은 “몰몬 근절령”을 만들었다. 1838년 10월 27일자의 그 법령에는 “몰몬들은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공공의 평화를 위해 미주리 주에서 근절하거나 추방해야 한다. 그들의 난폭함은 형언할 수 없다.”라고 진술된 부분이 있다.19 민병대는 주지사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임명되었다.

 

혼즈밀 학살 사건

근절령이 발표된지 3일 후인 1838년 10월 30일에 200명 정도의 남자들이 콜드웰 군 숄크릭크의 혼즈밀에 있는 성도들의 거주 지역을 기습했다. 적들은 비겁하게도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대장간으로 도망가라고 속였다. 그런 후 그들은 건물 주위에 자리를 잡고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그 안에 대고 총질을 했다. 또 다른 폭도들은 도망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총을 쏘았다. 모두 17명의 남자와 소년들이 살해 당했으며 15명이 부상을 입었다.

학살이 끝난 후, 아만다 스미스는 대장간으로 가서 남편 와렌과 아들 사디어스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대학살 가운데서도 그녀는 또다른 아들인 어린 앨마가 심하게 다쳤지만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했다. 앨마는 머스켓 총에 맞아 엉덩이가 없어졌다. 대부분 죽었거나 다친 사람들 가운데서 아만다는 무릎을 꿇고 주님께 도움을 간청했다.

“오 하나님 아버지시여,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나는 부르짖었다. 당신은 제 불쌍한 아들이 부상 당한 것을 아시며 제가 아무런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주옵소서!” 아만다는 재를 태워 잿물을 만들어서 상처를 씻으라고 지시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느릅 나무 찜질약을 준비해서 그것을 상처에 채워 넣었다. 다음 날은 발삼 향유를 상처에 부었다.

아만다는 아들에게 “앨마야,… 넌 주님이 너의 엉덩이를 만들어 주실 것을 믿니?”라고 물었다.

“네, 엄마. 믿어요.”

“그런데 주님은 네 엉덩이 자리에 어떤 것을 만들어 주실거야, 주님이 하실 수 있다고 믿지 않니?”

“‘엄마는 주님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린 아들은 순진하게 물었다.

“나는 ‘믿고 말고, 나는 시현을 통해 다 보았단다, 얘야.’라고 대답했다.

“그런 후 나는 앨마를 편안하게 엎어 뉘인 후 ‘이제 그대로 있어야 한다. 움직이지 마. 그러면 주님은 네게 다른 엉덩이를 만들어 주실거야.’라고 말했다.

“그래서 앨마는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5주 동안 엎드려 누워 있었다. 관절과 뼈가 없어진 곳에 탄력있는 연골이 자라났다.”20

아만다와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매장되는 것을 지켜보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브리감 영의 형제인 조셉 영을 포함하여 소수에 불과했으며, 폭도들이 돌아올 것이 두려웠으므로 관례대로 무덤을 팔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시신들을 모두 한 마른 우물에 넣어서 공동 무덤을 만들었다. 조셉 영은 어린 사디어스의 시체를 옮기는 것을 거들다가 “이 끔찍한 무덤에 그 애의 몸을 던져 넣을 수 없다.”고 외쳤다. 그는 미주리로 여행하는 동안 그 “재미있는 소년”과 놀아 주었으며 또 그런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그는 “심성이 아주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아만다는 사디어스의 시체를 시트로 감싸 두었다가 다음 날 또 다른 아들인 윌라드의 도움을 받아 우물 안에 넣었다. 그런 후 흙과 밀짚을 던져 넣어서 그 끔찍한 광경을 덮었다.21

스무 살인 벤자민 에프 존슨 역시 아담 온다이 아만에서 그를 쏘려고 하는 한 미주리 주민의 손길에 비슷한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는 억류되어 8일 동안 몹시 추운 날씨에 노천의 모닥불 앞에서 감시를 받으며 지냈다. 그가 통나무에 앉아 있을 때 한 “난폭한 사람”이 손에 라이플 총을 들고 그에게 다가와서는 “지금 당장 몰몬주의를 포기해라. 그렇지 않으면 쏘겠다.”라고 말했다. 벤자민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 악당은 조심스럽게 겨냥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그는 끔찍한 욕을 퍼부으며 “20년 동안이나 그 총을 사용했지만 발사 안된 적이 한번도 없었어.”라고 외쳤다. 그는 발사 장치를 점검한 후 총알을 장전하고 다시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발사되지 않았다.

그는 세 번째도 똑같이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그 총을 잠깐 손본다면 저 자를 문제없이 죽일 수 있네.”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탄약도 새로 장전하여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벤자민을 겨냥했다. 그러나 벤자민은 “이번에는 그 총이 폭발해서 그 총을 든 사람이 죽을거요.”라고 단언했다. 한 미주리인이 “그 자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게 좋겠네.”라고 말했다.22

 

선지자가 감옥에 갇힘

혼즈밀 학살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다른 지도자들이 주 민병대에 체포되었다. 선지자와 동료들은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다음날 파웨스트의 시 광장에서 총살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알렉산더 더블류 도니판 장군은 그 결정을 “냉혹한 살인”이라고 부르며 사격을 거부했다. 그는 그 민병대를 지휘하는 장군에게 만일 이 사람들을 계속 죽이려고 노력한다면 “맹세코 세상의 법정에서 당신에게 책임을 지울 것이오.”라고 경고했다.23

선지자와 다른 사람들은 처음에 인디펜던스로 끌려갔다가 그 다음에는 레이 군의 리치몬드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팔리 피 프랫도 당시 선지자와 함께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저녁에 간수들이 후기성도들을 죽이고 약탈하고 강간한 자신들의 만행을 이야기하면서 죄수들을 조롱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팔리 피 프랫은 선지자가 자기 옆에서 잠이 깬 것을 알았으며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나 놀라운 권세로 간수들을 꾸짖었다고 기록했다. “‘잠잠하라, 너희 지옥의 악마들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꾸짖어 명하노니 잠잠하라. 그런 말을 들으면서 한 순간도 더 살지는 않겠노라. 그런 말을 그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든 나든 한 쪽이 당장 죽게 되리라!’

“그는 말을 마치고 위엄있게 똑바로 서있었다. 무기도 없이 사슬에 묶여 있었으나 천사처럼 고요하고 평온하며 고귀한 모습으로 두려움에 떠는 간수들을 바라보았다. 간수들은 무기를 내리거나 바닥에 떨어뜨리고 무릎을 떨면서 구석으로 뒷걸음질쳐 갔으며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용서를 구하였다. 그리고 다른 간수들과 교대할 때까지 조용히 있었다.”

그 다음 팔리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왕국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모인 왕들과 대법관과 군주와 제왕과 황제들을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미주리의 구석진 마을에 있는 감옥에서 한밤중에 사슬에 묶인 채로 서 있는 선지자보다 더 고귀하고 장엄하지는 않았다.”24

법정 심리가 끝나자 조셉과 하이럼 스미스, 시드니 리그돈, 라이만 와이트, 캘렙 발드윈, 알렉산더 맥리는 클레이 군의 리버티 감옥으로 이송되어 1838년 12월 1일에 그 곳에 도착했다. 선지자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는 담과 문이 이중으로 된 감옥 안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빈약한 음식을 취하면서… 밤낮으로 심한 감시를 받으며 지냈습니다. 우리는 짚 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으며 몸을 따뜻하게 덮을 담요도 부족했습니다.… 재판관들은 때때로 우리에게 우리가 무죄며 석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진지하게 말했지만 폭도들이 두려웠기 때문에 감히 그대로 시행하지는 못했습니다.”25

 

일리노이로 탈출함

선지자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8,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근절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주리를 가로질러 동쪽의 일리노이 주로 갔다. 그들은 한겨울에 떠나도록 강요 받았다. 그래서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이었던 브리감 영이 성도들을 지휘하고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존 햄머 가족도 피난처를 찾아 떠난 많은 가족 중 하나였다. 존은 그 어려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당시의 고통과 심한 어려움을 잘 기억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마차 한 대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끄는 것은 오로지 눈먼 말 한 마리 뿐이었다. 그 말로 우리 물건을 모두 싣고 일리노이 주로 가야 했다. 우리는 말이 두 마리 있는 형제의 가벼운 마차와 우리 마차를 바꾸었다. 서로에게 적절한 교환이었다. 우리는 그 작은 마차에 의복과 침구와 옥수수 가루와 또 우리가 모을 수 있는 빈약한 식품들을 싣고서 춥고 얼어 붙은 길을 걸어서 여행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늘을 지붕 삼아 길가에서 먹고 잤다. 그러나 밤중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매서운 바람도 이전에 우리가 도망쳐 왔던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들에 비하면 그다지 잔인하고 냉혹한 편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맨발이었으며 몇몇은 동상에 걸리지 않고 얼어 붙은 땅바닥의 날카로운 부분에 발을 베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천으로 발을 감싸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 한다 해도 불완전한 보호책이었으므로 종종 발에서 피가 흘러 얼어 붙은 땅에 흔적을 남겼다. 우리 가족 중에서 신발을 신은 사람은 어머니와 누이 동생 뿐이었는데 그 신발들은 일리노이 주의 살기 좋은 해안에 닿기도 전에 다 해어져서 거의 쓸모없게 되었다.”26

선지자는 성도들이 미주리 주에서 쫓겨나는 동안 감옥에서 속수 무책으로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우리는 선지자가 주님께 바치는 탄원을 통해 그의 영혼의 고뇌를 가늠해볼 수 있는데 그것은 교리와 성약 121편에 기록되어 있다.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어디 계시나이까? 당신께서 숨으신 곳을 가린 큰 휘장이 어디 있나이까?

“언제까지 당신의 손이 가만히 계시며 영원한 하늘에서 당신의 눈 곧 당신의 깨끗하신 눈이 당신의 백성과 종의 피해를 바라보시며 당신의 귀가 저희 울부짖음을 듣기만 하려 하시나이까?”(교리와 성약 121:1~2)

주님은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다. “나의 아들아, 평안할지어다. 네 불행, 네 곤고는 잠시 동안이니,

“만일 네가 이를 잘 견디어내면 하나님께서 너를 높이 받들어 올릴 것이요, 너는 네 원수를 모두 이기리라.

“네 친구는 네 편이 되어 따뜻한 마음과 우정어린 손으로 또 다시 환성을 올리며 너를 맞이하리라.”(교리와 성약 121:7~9)

주님의 말씀은 1839년 4월에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불법적으로 감금된지 6개월 후, 재판지가 변경되어 그들은 먼저 데이비스 군의 갤러틴으로 이송되었다가 다음에 분 군의 콜럼비아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윌리암 모건 보안관은 “죄수들을 절대로 분 군으로 이송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고위직에 있던 어떤 사람 또는 몇몇 사람이 죄수들의 탈출을 허용해 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아마 유죄를 입증할 증거가 하나도 없으면서 그들을 공판에 넘겼다가 공공연하게 수치를 당하는 일을 피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 죄수들은 두 필의 말을 구입해서 간수들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 하이럼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일리노이 주로 방향을 변경하고 9일 내지 10일간 여행하여 아담스 군 퀸 시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그곳에서 건강하긴 했으나 궁핍한 상태에 있던 가족들을 만났다.”27 그 곳에서 그들은 참으로 “따뜻한 마음과 우정어린 손”으로 환영 받았다.

윌포드 우드럽은 선지자와의 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 다시 조셉 형제의 손을 잡는 행복한 특권을 누렸다.… 그는 기쁨에 넘쳐서 우리와 인사를 나누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솔직하고 편견없이 친숙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너무나 기뻤다. 복음을 위해 시련을 받았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런 만남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28 주님은 기적적으로 그의 선지자와 교회의 본체를 보호해 주셨다. 현대의 이스라엘은 그들 앞에 놓인 새로운 기회와 성약으로 새로운 땅에서 다시 한번 모이기 시작했다.

 

Notes

1. 에밀리 엠 오스틴, 몰몬이즘; 즉, 몰몬들 가운데서의 생활(1882년), 63쪽

2. 에밀리 엠 오스틴, 몰몬이즘, 64쪽

3. 조셉 스미스, 후기성도의 사자요 옹호자, 1835년 9월, 179쪽

4. 래리 시 포터, “1831년에서 1833년 사이의 미주리 주 잭슨 카운티 코 타운쉽의 콜스빌 지부,” 후기성도 교회 역사에서의 지역 연구: 미주리 주, 아놀드 케이 가 및 클라크 브이 존슨 편저 (1994년), 286~287쪽

5. 교회사, 1:199

6. 에밀리 엠 오스틴, 몰몬이즘, 67쪽

7. 팔리 피 프랫 자서전, 팔리 피 프랫 이세 편(1938년), 72쪽

8. 교회사, 1:269

9. 극서부의 기록, 도날드 큐 캐논 및 린든 더블류 쿡 (1983), 65쪽

10. “뉴웰 나이트의 일지,” 자서전 모음집 (1883), 75쪽

11. 메리 엘리자베스 롤린스 라이트너, 유타 계보 및 역사지, 1926년 7월호, 196쪽

12. 교회사, 1:391

13. “필로 디블의 해설,” 교회사의 초기 장면 (1882), 84~85쪽

14. 팔리 피 프랫 자서전, 102쪽

15. “뉴웰 나이트의 일지,” 자서전 모음집, 85쪽

16. 앤드류 젠슨, 역사 기록 (1888년), 7:586

17. 교리와 성약 116:1; 또한 교리와 성약 107:53~57; 교회사, 3:34~35쪽 참조

18. 올슨 에프 휘트니, 히버 시 킴볼의 생애, 3판 (1945년), 213~214쪽

19. 릴랜드 호머 젠트리, “1836년에서 1839년까지의 북부 선교부에서의 후기성도의 역사” (브리감 영 대학교 박사 논문, 1965년), 419쪽

20. 아만다 반즈 스미스, 에드워드 더블류 튤리지, 몰몬의 여인들, 124, 128쪽 인용

21. 아만다 반즈 스미스, 에드워드 더블류 튤리지, 몰몬의 여인들, 126쪽 인용

22. 이 데일 르바론, “벤자민 프랭클린 존슨: 개척자요 관료요 교회 지도자” (석사 논문, 브리감 영 대학교, 1966년), 42~43쪽

23. 릴랜드 호머 젠트리, “북부 미주리 주에서의 후기성도의 역사”, 518쪽

24. 팔리 피 프랫 자서전, 211쪽

25. “제이 스미스 이세가 갤런드 씨에게 보낸 편지 부본”, 타임즈 앤드 시즌스, 1840년 2월, 52쪽

26 라이만 오머 리틀필드, 후기성도의 회상록(1888년), 72~73쪽

27. 교회사, 3:423

28. 매튜 에프 카울리, 윌포드 우드럽(1909년), 102쪽

 

 


나부에서의 희생과 축복

 

일리노이 주로 간 후기성도들은 퀸 시의 친절한 주민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리버티 감옥에 갇혀 있었던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돌아오자 성도들은 미시시피 강 북쪽으로 약 35마일 정도 올라갔다. 그들은 그 곳에서 커다란 늪지대의 물을 빼내고, 강이 굽어지는 곳 옆에 나부 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과 캐나다 그리고 잉글랜드에서 성도들이 모여듦에 따라 그 도시는 이내 활기있고 상업적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4년 내에 나부는 일리노이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교회 회원들은 선지자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일한다는 사실 때문에 비교적 평화롭게 안전하게 생활했다. 선지자를 통해 부름 받은 수많은 선교사들이 나부를 떠나 복음을 전파하러 갔다. 성전이 건축되었으며 성전 엔다우먼트가 집행되었고, 최초로 와드가 만들어졌으며 스테이크가 세워졌고, 상호부조회가 조직되었으며 아브라함서가 출판되었고, 또 중요한 계시들이 주어졌다. 자신들의 도시가 산업과 진리의 등대가 됨에 따라 성도들은 6년이 넘도록 놀라울 정도로 단결하여 신앙을 나타내 보였고 행복하게 지냈다.

 

나부 선교사들의 희생

집을 짓고 작물을 심기 시작하면서 많은 성도들이 오한과 열을 동반한 전염병인 학질을 앓게 되었다. 십이사도들도 대부분 그 병에 걸렸으며 조셉 스미스 자신도 그 병에 걸렸다. 1839년 7월 22일, 선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권세로 병상에서 일어났다. 그는 신권의 권세를 통해 자신과 집안에 있던 환자들의 병을 치유한 다음 앞마당의 텐트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에게 낫도록 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었다. 그는 텐트에서 텐트로, 집에서 집으로 다니며 모든 사람을 축복했다. 교회 역사를 통해 볼 때, 그것은 놀라운 신앙과 병고침의 시기 중 하나였다.

이 기간에 선지자는 십이사도 정원회에게 영국으로 선교 사업을 가도록 부름을 주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이었던 올슨 하이드 장로는 유대인과 아브라함의 다른 자녀들의 집합을 위하여 팔레스타인 땅을 헌납하도록 예루살렘으로 파송되었다. 선교사들은 미국 전역과 캐나다 동부로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되었으며 애디슨 프랫과 다른 사람들은 태평양 제도로 가라는 부름을 받았다.

이 형제들이 주님께 봉사하라는 부름에 응하여 가정과 가족을 등지고 떠날 때 그들은 참으로 큰 희생을 치르었다. 영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십이사도 중 많은 사람들이 학질에 걸려 있었다. 병이 아주 심했던 윌포드 우드럽은 먹을 것과 생필품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아내인 피비를 두고 떠났다. 가장 나이 어린 사도였던 조지 에이 스미스도 너무나 심하게 아파서 마차에 실려가야 했다. 그를 본 어떤 사람이 마부에게 무덤에서 꺼내 가느냐고 물었다. 아내와 자녀를 데리고 떠난 팔리 피 프랫과 그의 형인 올슨 프랫 그리고 존 테일러만이 나부를 떠날 때 건강한 상태였다. 그러나 테일러 장로는 후에 뉴욕으로 여행할 때 몹시 심하게 앓아서 거의 죽을 뻔하였다.

브리감 영도 병이 심해서 도움을 받지 않고는 짧은 거리조차 걸을 수 없었으며 그의 동반자였던 히버 시 킴볼 역시 별로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의 아내와 가족들도 병에 걸려 누워 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언덕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마차 안에 누워 있던 사도들은 둘 다 그렇게 비참한 상태로 가족들과 헤어질 수 없다고 느꼈다. 히버의 제안으로 그들은 간신히 일어서서 머리 위로 모자를 흔들며 “이스라엘 만세, 만세!”라고 세 번 외쳤다. 그들의 아내, 메리 앤과 바이렛트는 일어설 정도 기운을 얻어서 문가에 몸을 기대고 “다녀오세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거예요.”라고 외쳤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 있는 대신 서 있는 아내들을 보면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며 마차에 누웠다.

뒤에 남은 가족들은 선교사로 부름 받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희생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나타내 보였다. 애디슨 프랫이 샌드위치 제도로 선교 사업을 하러 가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그의 아내인 루이자 번즈 프랫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겐 가르치고, 입혀야 할 애들이 네 명이나 있었고 돈도 전혀 없었습니다.… 처음엔 저도 마음이 약해졌으나 주님을 의지하고 어려운 상황에 용감하게 맞서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복음을 전파하러 갈 수 있을 만큼 합당하게 헤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하였습니다.”

루이자와 아이들은 애디슨 프랫을 배웅하기 위해 부두로 나갔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온 후의 상황에 대해 루이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습니다. 오래지 않아 큰 소리로 천둥이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길 건너편에 살던 어떤 가족은 집이 새서 불안하였습니다. 그들은 곧 폭풍우를 피해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오는 것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위로해 주었고 찬송가를 불러 주었으며 그 형제님은 우리와 함께 기도해 주었고 폭풍우가 끝날 때까지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1

애디슨이 떠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어린 딸이 천연두에 걸렸다. 그 병은 너무나 전염성이 강해서 신권 소유자가 프랫 가정으로 오는 것조차 참으로 위험한 상황이었으므로 루이자는 신앙을 갖고 기도한 후 “그 열을 꾸짖었다.” 아이의 몸에 열한 개의 구진이 나타나기는 했으나 병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며칠 내에 열은 사라졌다. 루이자는 “나는 천연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그 아이를 보여주었다. 그는 아이가 병에 걸렸었으며 내가 신앙으로 그것을 이겨냈다고 말했다.”2

그러한 희생을 치르면서 나부를 떠났던 선교사들은 수천 명을 교회로 데려왔다. 또한 그 개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신앙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메리 앤 웨스튼은 양재를 배우는 동안 영국에서 윌리암 젠킨스 가족과 함께 살았다. 젠킨스 형제가 개종해서 윌포드 우드럽이 그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그 집에 왔다. 메리 앤은 그때 혼자 집에 있었다. 윌포드 우드럽은 불 곁에 앉아 “연약한 인간이라 두렵사오나 영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라고 노래를 불렀다. 메리 앤은 그가 노래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분이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해 보여서 분명히 좋은 사람이며 그 분이 전하는 복음은 틀림없이 참될거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3

메리 앤은 교회 회원들과 사귐으로써 이내 개종하여 침례를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 중 회복된 복음에 응했던 유일한 회원이었다. 그녀는 교회 회원과 결혼했으나 4개월 후 남편과 사별하게 되었다. 교회 모임을 방해하기 위해 몰려온 폭도들에게 매를 맞은 것도 그의 사인 중 일부였다. 완전히 혼자가 된 메리 앤은 고향과 친구와 불신자인 부모를 떠나 후기성도들로 가득 찬 나부행 배에 올랐다. 그녀는 그 후 가족들을 다시 보지 못했다.

그녀의 용기와 헌신은 결국 많은 사람들의 삶을 축복해 주었다. 그녀는 유타 북부의 캐치 밸리에 살던 홀아비 피터 모건과 결혼했다. 그 곳에서 그녀는 대가족을 충실하게 양육하였으며 그들은 모두 교회와 그녀의 이름을 명예롭게 해 주었다.

 

표준 경전

나부에서 지내는 동안 훗날 값진 진주가 된 기록들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모세 기록의 일부와 아브라함서 및 마태의 간증 중 일부 그리고 조셉 스미스의 역사에서 발췌한 내용과 신앙개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기록은 조셉 스미스가 주님의 지시 하에 기록하거나 번역한 것들이었다.

이제 성도들은 교회의 표준 경전이 될 경전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성경, 몰몬경, 교리와 성약 및 값진 진주였다. 이 책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중요한 복음의 진리를 가르쳐 주며 성실하게 탐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주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명하시는 대로 추가적인 계시들이 현대의 경전에 삽입되어 왔다.

 

나부 성전

나부를 세운 지 불과 15개월 만에 제일회장단은 계시에 순종하여 “기도의 집, 질서의 집,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의 집, 그분의 신성한 뜻에 일치하는 의식을 받을 집”4을 지을 시기가 되었다고 발표했다. 궁핍하여 가족들을 부양하기에도 힘들었으나 후기성도들은 지도자의 부름에 응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데 시간과 재산을 바쳤다.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두 열흘에 하루씩 일하였다. 어린 소녀였던 루이자 데커는 어머니가 성전을 짓는 데에 보태려고 도자기 접시와 좋은 침대 덮개를 파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5 다른 후기성도들도 성전 건축을 돕기 위해 말과 마차와 소와 돼지와 곡물을 바쳤다. 나부의 여인들은 성전 기금으로 그들의 푼돈을 기부하도록 요청 받았다.

캐롤린 버틀러는 기부할 푼돈이 하나도 없었지만 무언가를 꼭 주고 싶었다. 어느 날 그녀는 마차를 타고 나부 시로 가던 도중에 죽어 있는 두 마리의 버팔로를 보았다. 갑자기 그녀는 자신이 성전을 건축하는 데 바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녀와 아이들은 버팔로의 털을 뽑아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잘 씻고 곧게 펴서 굵은 실을 꼬았다. 그런 후 그녀는 매서운 겨울 추위에 성전에서 일하는 석수들에게 줄 두꺼운 벙어리 장갑 여덟 벌을 짰다.6

하이럼 스미스의 아내인 메리 필딩 스미스는 영국의 후기성도 여성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들은 1년 안에 434파운드의 무게에 달하는 50,000페니를 모아서 배편으로 나부에 보내 주었다. 농부들은 말과 마차를 바쳤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토지 중 일부를 팔아서 건축 위원회에 돈을 헌금했다. 많은 시계와 총들이 기부되었다. 일리노이 주 노르웨이의 성도들은 성전 위원회에서 사용하도록 100마리의 양을 나부로 보내 주었다.

브리감 영은 “우리는 나부 성전을 짓기 위해 참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때 일꾼들에게 먹일 빵과 음식을 구하기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 회장은 주님께서 주실거라고 확신하면서 성전 기금을 맡은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밀가루를 모두 다 사용하라고 권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실리에서 최근에 개종했던 조셉 터론토 형제가 금화 2,500불을 가지고 나부로 와서 그것을 형제들에게 내놓았다.7 터론토 형제가 평생을 모은 재산은 밀가루를 사고 다른 많은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성도들이 나부에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주님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통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조상들을 위해 침례를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시해 주셨다.(교리와 성약 124:29~39 참조) 많은 성도들이 죽은 자들도 세상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과 똑같은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그 약속으로 인해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또한 선지자는 현재 성전 엔다우먼트로 불리는 가르침과 성약과 축복에 관해 중요한 계시들을 받았다. 이 거룩한 의식은 성도들이 “영원한 세상에… 계신 엘로힘의 면전에 나아가도록”8 그들을 준비시켜 주는 “충만한 축복들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엔다우먼트를 받게 되면 남편과 아내는 신권의 권세로 말미암아 현세와 영원을 위해 함께 인봉될 수 있었다. 조셉 스미스는 지상에서 자신의 생명이 짧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성전이 건축되고 있는 중인데도 붉은 벽돌집 가게의 2층에서 선택된 충실한 성도들에게 엔다우먼트를 베풀기 시작했다.

성도들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살해당하고 자신들이 단기간에 나부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성전을 완공하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일했다. 완공되지 않은 성전의 다락방이 엔다우먼트를 집행할 곳으로 헌납되었다. 성도들은 브리감 영과 히버 시 킴볼 및 다른 십이사도들이 밤낮을 성전에 머물면서 밤에도 네 시간 이상 자지 않고 베푼 이 거룩한 의식을 열심히 받았다. 머시 필딩 톰슨은 성전복을 세탁하고 다리는 일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요리도 감독했다. 그녀도 역시 성전에 머물러 살았으며 때로는 다음 날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기 위해 밤에도 일했다. 다른 회원들도 마찬가지로 헌신적이었다.

왜 이 성도들은 곧 그들이 두고 떠나야 할 건물을 완공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했을까? 거의 6,000명의 후기성도들이 나부를 떠나기 전에 자신의 엔다우먼트를 받았다. 그들은 서부를 향해 이주할 때 신앙으로 강화되었으며 자신의 가족이 영원히 인봉되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들은 그 성전에서 의식을 받을 때 얻었던 확신 때문에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자녀나 배우자를 아메리카의 거대한 평원에 묻고 곧바로 떠날 때도 그렇게 의연할 수 있었다.

 

상호부조회

나부 성전이 건축되고 있을 때, 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였던 하이럼 킴볼의 아내 사라 그랜저 킴볼은 마아가렛 에이 쿡이라는 이름의 바느질하는 사람을 고용했다. 사라는 주님의 사업에 대한 헌신으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셔츠를 만들 천을 기증했으며 마아가렛은 바느질을 하기로 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의 이웃들도 셔츠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자매들은 킴볼 가의 거실에 모여 공식적으로 조직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엘리자 알 스노우는 새로운 단체의 규약과 세칙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엘리자가 완성된 문안을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보여주자 그는 자신이 본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여성들이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여성들의 시야를 넓혀 주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여성들에게 다른 모임에 참석하도록 부탁하여 그 곳에서 나부 여성 상호부조회를 조직했다. 선지자의 아내인 에머 스미스가 그 단체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조셉은 자매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권의 반차를 통하여, 또 이끌도록 임명된 자들을 매개로 해서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위해서 열쇠를 사용코자 하니, 이 상호부조회에 기쁨과 지혜와 지식이 이제부터 넘쳐 흐를 것입니다. 이것은 이 단체에 있어 더 좋은 날의 시작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했다.9

상호부조회가 조직된 직후, 위원회는 나부의 모든 궁핍한 가정을 방문해서 필요 사항을 조사한 다음 그들을 돕기 위해 사람들에게 기증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음식과 침구를 팔아서 생긴 이익금과 기부금으로 가난한 아이들에게 학교 교육을 시켜 주었다.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마직, 모직, 실, 판자, 비누, 양초, 주석 그릇, 보석, 바구니, 누비 이불, 담요, 양파, 사과, 밀가루, 빵, 크래커, 고기 등을 기부하였다.

상호부조회 자매들은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 것 외에도 함께 예배를 보았다. 엘리자 알 스노우는 한 모임에서 “거의 모든 자매들이 일어나서 말씀했으며 정화시키는 시냇물 같은 주님의 영이 모든 마음을 새롭게 해주었다.”10고 보고했다. 이 자매들은 서로를 위해 기도했으며 서로의 신앙을 강화시켜 주었고 시온의 대의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생활과 자원을 헌납했다.

 

순교

나부에서의 몇 년 동안은 성도들에게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곧 다시 박해가 시작되어 결국 조셉과 하이럼 스미스는 살해 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둡고 슬픈 시기였다. 루이자 번즈 프랫은 순교 소식을 듣고 자신의 느낌을 이렇게 기록했다. “고요한 밤이었고 보름달이 떠 있었습니다. 마치 죽음의 밤처럼 보였으며 모든 것이 그 밤을 엄숙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남자들을 소집하는 역원들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마치 장례식의 종처럼 느껴졌습니다. 여자들은 함께 모여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살인자들에게 무서운 벌이 내리기를 바랬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11

많은 후기성도들은 루이자 번즈 프랫과 마찬가지로 그 사건이 일어난 1844년 6월 27일을 슬프고 애통스러운 날로 기억했다. 선지자의 순교는 초기 교회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상 밖의 일이 아니었다.

초창기였던 1829년부터 시작하여 최소한 열아홉 번 정도 각각 다른 상황에서 조셉 스미스는 아마 자신이 이 생을 평화롭게 마감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12 그는 적들이 언젠가 자신의 생명을 빼앗으리라고 느꼈지만 그것이 언제인지는 알지 못했다. 1844년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올 때, 교회 안팎의 적들은 조셉을 파멸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이웃 신문사의 편집인이었던 토마스 샤프와 헨콕 군의 한 반몰몬 정당 지도자는 선지자를 살해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주민들과 배도자들 그리고 시의 지도자들은 선지자를 죽임으로써 교회를 멸하려고 공모했다.

일리노이 주의 지사였던 토마스 포드는 조셉 스미스에게 나부 시의 평의회 회원들은 시에 소동을 일으킨 혐의로 비몰몬 배심원들 앞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그런 재판만이 사람들을 납득시킬 것이라고 했다. 주지사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선지자는 그가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선지자와 그의 형 하이럼 스미스 그리고 존 테일러와 다른 사람들은 아무 죄없이 죄인이 되었음을 통감하며 구속되기로 했다.

선지자는 나부 시에서 카테지 군으로 약 20마일 정도 갔을 때, 자신이 가족과 친구들을 보는 것이 그때가 마지막임을 알았다. 그는 “나는 도살장에 끌려 가는 어린 양과 같이 가노라. 그러나 내 마음은 여름 아침처럼 고요하도다.”13라고 예언했다.

선지자가 출발하자 조셉의 농장에서 3년 이상 일해 왔던 비 로저스와 다른 두 소년이 들판을 가로질러 가서 가로장 울타리에 앉아 그들의 친구이자 지도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조셉은 그 소년들 옆에서 말을 멈추고 같이 있던 민병 대원들에게 “신사 여러분, 이곳은 내 농장이고 이들은 나를 돕는 소년들이오. 그 애들도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 애들을 좋아하오.”라고 말했다. 조셉은 소년들 모두와 악수를 나눈 후, 말에 올라타고 자신이 죽을 곳을 향해 갔다.14

웨일즈인 개종자였던 단 존스는 카테지 감옥에서 선지자와 함께 있었다. 1844년 6월 26일 지상에서의 마지막 밤에 조셉은 총소리를 듣고 침대에서 일어나 존스 곁의 바닥에 누웠다. 선지자는 “죽는 것이 두렵습니까?”라고 속삭였다. 존스는 “이런 일로 죽는 것은 그리 두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조셉은 “형제님은 죽기 전에 웨일즈에 가서 지명받은 선교 사업을 완수할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15 후에 단 존스가 웨일즈에서 명예롭게 성공적으로 선교 사업을 수행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수많은 충실한 후기성도들이 교회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

1844년 6월 27일, 오후 5시가 지난 직후, 얼굴에 칠을 한 약 200명 정도의 폭도들이 카테지 감옥으로 돌격해 와서 조셉과 그의 형 하이럼을 쏘아 죽이고 존 테일러에게는 심한 부상을 입혔다. 오직 윌라드 리차즈만 다치지 않았다. 폭도들은 “몰몬이 오고 있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도망가 버렸다. 대부분의 카테지 주민들도 그랬다. 윌라드 리차즈는 부상 당한 존 테일러를 돌보았으며 그들은 모두 살해 당한 지도자들을 애도했다. 하이럼은 감옥 안에 쓰러져 있었고 창문에서 뛰어 내렸던 조셉은 밖의 우물 곁에 쓰러져 있었다.

그 장소에 처음 당도한 후기성도 중 한 사람은 순교자의 형제였던 사무엘이었다. 그와 다른 사람들은 윌라드 리차즈를 도와서 나부로의 길고 슬픈 귀환을 위해 시신을 준비시켰다.

한편 일리노이 주 와샤에서는 교회 회원이었던 제임스 코울리 가족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열네 살이던 마티아스는 시내에서 심상치 않은 축하 소동이 일어나는 것을 듣고 모인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주연사가 어린 코울리를 보더니 집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마티아스가 이웃집 마당을 통해 그 곳을 벗어나기 전까지 교회 회원이 아닌 소년들이 그에게 쓰레기를 던지며 따라왔다.

소동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한 마티아스는 물을 긷기 위해 강으로 갔다. 폭도 중 한 명이 그를 발견하고 술 취한 재봉사에게 그를 강에 던져 넣으라고 돈을 주었다. 마티아스가 물을 푸려고 멈추자 그 재봉사는 마티아스의 목덜미를 잡고 “몰몬 꼬마야, 널 물에 빠뜨려 죽이겠다.”라고 했다. 마티아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왜 나를 빠뜨려 죽이려 하는지, 그리고 내가 그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하면서 ‘너를 빠뜨리지 않겠다.… 넌 착한 애야. 집으로 가거라.’라고 말했다.” 그날 밤 폭도들은 코울리 형제의 집에 불을 지르려고 세 번이나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그 가족은 신앙과 기도를 통해 보호 받았다.16 마티아스 코울리는 성장해서 끝까지 교회에 충실하였으며 그의 아들 마티아스와 손자 매튜는 후에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봉사했다.

일리노이 주지사 토마스 포드는 선지자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스미스 형제를 살해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리라고 믿은 것처럼… 몰몬을 끝장내고 그들을 흩어버리기는 커녕 그들을 그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결합시키고 그들의 신앙에 대해 새로운 확신을 안겨 주었다.”17 또한 포드는 “바울처럼 은사를 타고난 사람들과 웅변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 뛰어난 연사들은… [몰몬 교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고 순교 당한 조셉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쳐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포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 자신의 이름이 빌라도와 헤롯의 이름처럼 “후세에 불명예스럽게”18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살았다. 그의 염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존 테일러 회장은 상처가 회복되어 후에 살해당한 지도자에 대한 조사를 썼다. 현재 그것은 교리와 성약 135편이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주의 선지자요, 선견자인 조셉 스미스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다만 예수를 제외하고 이 세상에 살았던 그 어느 사람보다 더욱 많은 일을 수행하였도다.… 그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 앞에서 위대한 생애를 보냈고 또 위대하게 죽었으니, 옛적에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 대부분이 그러하였듯이 자기의 사명과 사업을 자신의 피로써 인봉하였고 그 형 하이럼도 그러하였도다. 두 사람은 생전에 떨어져 있지 아니하였고 죽을 때에도 갈라져 있지 아니하였도다.… 이 두 사람은 영광을 위하여 살았고 영광을 위하여 죽었으니, 그 영광은 두 사람에게 주는 영원한 보상이 되리라.”(교리와 성약 135:3,6)

 

제일회장단의 계승

선지자 조셉과 하이럼 스미스가 카테지 감옥에서 살해되었을 때, 십이사도 정원회의 많은 회원들과 다른 지도자들은 나부를 떠나 선교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며칠이 지나서 그 소식을 들었다. 브리감 영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신권 지도자의 열쇠가 여전히 교회에 있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 열쇠들은 십이사도 정원회에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회원들은 주님의 선지자요 선견자요 계시자로서 누가 조셉 스미스의 후임자가 될지 전혀 몰랐다.

제일회장단 제1보좌였던 시드니 리그돈은 1844년 8월 3일에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나부로 왔다. 그 이전에 시드니 리그돈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권고에 어긋나는 길을 걷기 시작하여 교회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그는 이미 나부에 도착해 있던 세 명의 사도와 만나기를 거절하고 그 대신 일요일 예배에서 성도들이 모였을 때 말씀했다. 그는 성도들에게 아무도 조셉 스미스를 대신할 수 없다고 알게 된 자신이 받았던 시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교회의 보호자가 지명되어야 하며 그 보호자는 시드니 리그돈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를 지지하는 성도들은 거의 없었다.

1844년 8월 6일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이었던 브리감 영이 나부로 돌아왔다. 그는 누가 교회를 이끌어야 하는가에 관해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알기만을 원한다고 선언했다.19 십이사도 정원회는 1844년 8월 8일 목요일에 모임을 소집했다. 시드니 리그돈은 아침 모임에서 한 시간 이상 말씀을 했다. 소수의 사람 만이 그의 입장을 지지했다.

다음으로 브리감 영이 일어나서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간결하게 말했다. 브리감이 말씀을 할 때 조지 큐 캐넌은 “바로 조셉의 음성이었으며 사람들의 눈에 선지자 조셉이 직접 그들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20고 회상했다. 윌리암 시 스테인즈는 브리감 영이 선지자 조셉의 음성과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고 간증했다. 스테인즈는 “나는 그가 바로 조셉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말씀을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21라고 말했다. 윌포드 우드럽 역시 그 놀라운 순간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만일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가 조셉 스미스가 아니었다고 확신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을 간증할 수 있다.”22 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이 기적적인 징후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주님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브리감 영을 조셉 스미스의 후계자로 선택하셨음을 확신했다.

오후 모임에서 브리감 영은 다시 말씀했으며 선지자 조셉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열쇠를 갖도록 십이사도를 성임했다는 것을 간증했다. 그는 십이사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번성하지 못할 것이며 오직 사도들만이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영 회장은 말씀을 마친 후, 시드니 리그돈에게 말씀을 부탁했으나 그는 하지 않았다. 윌리암 더블류 펠프스와 팔리 피 프랫이 말씀을 한 후 브리감 영이 다시 말씀했다. 그는 나부 성전을 완공하는 것, 광야로 가기 전에 엔다우먼트를 받는 것과 경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그는 조셉 스미스에 대한 사랑과 선지자의 가족에 대한 애정을 이야기했다. 그런 후 성도들은 만장일치로 십이사도를 교회의 지도자로 받아들였다.

소수의 다른 사람들이 교회 제일회장단의 권리를 주장하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후기성도들에게 승계의 고비는 지나갔다. 선임 사도이자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이었던 브리감 영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이끌도록 선택한 사람이었으며 사람들은 일치하여 그를 지지하였다.

 

Notes

1. “루이자 반즈 프랫의 일지”, 서부의 심장의 고동, 케이트 비 카터 편, 12권 (1939~1951년), 8:229

2. “루이자 반즈 프랫의 일지”, 8:233

3. “메리 앤 웨스턴 모건의 일지”, 우리의 개척자 유산, 케이트 비 카터 편, 9권 (1958~1966년), 2:353~354

4. 교회사, 4:186

5. 루이자 데커, “나부의 회상”, 여성의 대표자, 1909년 3월, 41쪽

6. “몰몬과 인디언들”, 서부의 심장의 고동, 7:385

7. 비 에이치 로버츠, 교회사 요해, 2:472

8. 교회사, 5:2

9. 나부의 여성 상호부조회의 의사록, 1842년 4월 28일, 40쪽

10. 나부의 여성 상호부조회의 의사록, 1842년 4월 28일, 33쪽

11. “루이자 반즈 프랫의 일지”, 8:231

12. 교회사, 4:587, 604; 6:558

13. 교회사, 6:555

14. 케네스 더블류 갓프리, “살기가 가득했던 그때 그시절”, 몰몬 유산, 1994년 7/8월, 35~36쪽

15. 교회사, 6:601

16. 매티스 카울리, “회상”(1856년), 3쪽, 후기성도 교회 기록 보관소

17. 토마스 포드, 일리노이스의 역사, 밀로 밀튼 콰이프 펀, 2권(1946년), 2:217

18. 토마스 포드, 일리노이스의 역사, 2:221~223

19. 교회사, 7:230

20. 교회사, 7:236에서 인용

21. 교회사, 7:236에서 인용

22. 교회사, 7:236에서 인용

 

 


신앙의 발자취

 

나부를 떠날 준비를 함

교회의 지도자들은 적어도 1834년부터 성도들을 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록키 산맥 서쪽으로 이주시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탐험가들과 함께 실제적인 부지에 대해 토론하고 정착할 적절한 장소를 찾기 위해 지도를 연구했다. 1845년 말에 교회 지도자들은 서부에 관해 입수할 수 있는 가장 최신의 정보를 손에 넣었다.

나부에서의 박해가 심해져 감에 따라 성도들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해 지게 되었다. 1845년 11월에 나부는 떠날 준비로 한창이었다. 이주하는 동안 성도들을 이끌도록 백인 조장, 오십인 조장, 십인 조장이 부름 받았다. 100개의 그룹이 각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마차 공장을 세웠다. 수레를 만드는 사람과 목수와 가구 제작자들은 밤늦게까지 재목을 다듬고 마차를 만들었다. 쇠를 구입하기 위해 회원들을 동부로 파견하였으며 대장장이들은 여행에 필요한 물건과 새로운 시온을 개척하는 데 필수적인 농기구를 만들었다. 가족들은 식료품과 가정용품을 모았으며 저장 용기에 말린 과일과 쌀과 밀가루와 약품을 채워 넣었다. 그들은 공익을 위해 함께 일하였으며 그토록 짧은 기간에 가능한 이상의 일들을 달성했다.

 

겨울 여행의 시련

원래는 1846년 4월에 나부를 벗어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의 민병대가 성도들이 서부로 떠나는 것을 막으려 하는 위협 때문에 십이사도들과 지도층에 있던 다른 시민들은 1846년 2월 2일에 서둘러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즉시 서부로 출발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으며, 2월 4일에 출발하기로 했다. 브리감 영의 지휘 하에 성도들의 첫번째 그룹이 간절한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열망은 커다란 시험에 직면했다. 왜냐하면 늦겨울의 날씨와 뜻밖의 봄비로부터 쉴 수 있을 영구적인 캠프에 이르기 전에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성도들은 박해자로부터 안전하게 되기 위해 먼저 넓은 미시시피 강을 건너 아이오와 땅으로 가야 했다. 여행길의 위험은 황소가 수많은 성도들을 실어 나르던 보트를 발로 차서 구멍을 내 보트가 잠길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한 목격자는 그 불운한 승객들이 깃털 침구와 나무 막대기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판자 또는 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잡고 매달려서 차갑고 무자비한 파도가 움직이는 대로 물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잠기지 않은 마차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서 보트에 있던 소들이 목적지의 강기슭으로 헤엄쳐 가는 동안 좀더 편하게 있었다.”1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보트 위로 구조되어 건너편 강기슭에 닿았다.

처음으로 강을 건넌 지 2주 후, 그 강은 한동안 얼어 붙었다. 얼음이라서 미끄럽긴 했지만 마차와 말의 무게를 감당해 주어서 보다 쉽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눈 속을 걸어갈 때 성도들은 추운 날씨 때문에 몹시 어려움을 겪었다. 강 건너편의 슈가 크리크 야영지에서는 계속 바람이 불어 눈이 거의 20센티미터 정도의 깊이로 쌓였다. 그 후 눈이 녹는 바람에 땅바닥은 진흙탕이 되어 버렸다. 계속 진행하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텐트와 마차와 서둘러 지은 오두막에서 웅크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늘과 땅 주변의 모든 요소가 함께 상황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여행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아이오와를 통과하는 초기 단계였다. 호세아 스타우트는 이렇게 기록했다. “밤을 지내기 위해 침대 천으로 임시 천막을 지었다. 이 때 아내는 거의 일어나 앉을 수도 없었고 어린 아들도 고열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의식이 없었다.”2 다른 많은 성도들도 역시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모든 것 잘되리

성도들은 이러한 신앙과 용기와 결심을 통해 추위와 굶주림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이겨 나갔다. 윌리암 클레이톤은 불과 한 달 후에 첫아기를 낳을 아내 디안사와 그녀의 부모들을 두고, 나부를 떠나는 첫번째 그룹에 속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아내가 잘 있는지 염려하면서 진흙 길을 걷고 추운 텐트에서 야영한 탓에 그는 신경이 몹시 쇠약해졌다. 두 달이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아내가 아기를 안전하게 출산했는지를 알지 못했으나 마침내 “건강하고 통통한 아들”이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윌리암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주저앉아서 그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줄뿐 아니라 여러 세대 동안 교회 회원들에게 영감과 감사의 송가가 될 노래를 썼다. 그것은 “성도들아 두려울 것 없다”라는 노래로서 유명한 그 가사에는 그의 신앙과, 역경 가운데서 “모든 것 잘되리! 모든 것 잘되리!”3라고 노래했던 수많은 성도들의 신앙이 표현되어 있다. 그들의 뒤를 따랐던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하나님의 왕국에서 희생하고 순종한 것에 대한 대가로 기쁨과 평화를 느꼈다.

 

윈터 쿼터즈

성도들이 나부로부터 310마일 떨어진 서부 아이오와의 정착지에 도착하는 데는 131일이 걸렸다. 그 곳은 그들이 1846년에서 1847년까지의 겨울을 지내고 록키 산맥으로 여행할 준비를 할 곳이었다. 그때까지의 경험을 통해 그들은 1,000마일이나 되는 미국의 거대한 평원을 보다 빨리 건너가는 데 도움이 될 여행 지식을 많이 익혔기 때문에 이듬해에는 111일 정도 걸려 그것을 해냈다.

많은 성도들이 미주리 강의 양쪽을 따라 정착했다. 가장 큰 정착지는 윈터 쿼터즈였는데 서부의 네브라스카에 있었다. 그 곳은 약 3,500명 정도의 교회 회원들에게 금새 안식처가 되었다. 성도들은 통나무 집이나 버드나무와 흙으로 만든 움집에서 살았다. 또한 미주리 강의 아이오와 쪽에 있는 켄스빌이란 곳과 그 주위에는 2,500명 정도의 성도들이 살았다. 이 정착지의 생활에서 그들은 여행 중에 겪었던 것과 거의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여름에는 말라리아 열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겨울이 되어 신선한 음식을 전혀 구할 수 없을 때는 전염성 콜레라, 괴혈병, 치통, 야맹증, 심한 설사로 고통을 겪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은 계속되었다. 남편인 사무엘이 스코틀랜드로 선교 사업을 떠난 메리 리차즈의 말에 의하면 여인들은 여전히 청소하고 다림질하고 세탁하고 바느질하고 편지도 쓰며 부족한 식료품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가족들을 돌보는 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신학 토론, 춤, 교회 모임, 파티 및 개척자 재연과 같은 활동을 포함하여 메리는 윈터 쿼터즈에서의 성도들의 생활을 밝게 기록했다.

남자들은 함께 일했으며 종종 만나서 여행 계획과 미래의 정착지에 대해 토의했다. 그들은 질서있게 협력하여 캠프 외곽의 초원에서 가축을 몰아 풀을 먹였다. 또 들판에서 일하고 정착지 주변을 지켰으며 제분소를 만들어 움직였고 여행을 위해 마차를 준비했으며, 종종 과로와 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들 중 몇몇은 비이기적인 사랑으로 들판을 갈아서 뒤따라올 성도들이 수확하게 될 작물을 심었다.

브리감 영의 아들인 존은 윈터 쿼터즈를 “몰몬의 밸리 포지”라고 불렀다. 그는 그 곳의 공동 묘지 가까이에 살았으므로 “너무나 자주 문 앞을 지나가는 작고 슬픈 모습의 행렬”을 목격하였다. 그는 옥수수 빵과 소금에 절인 베이컨과 소량의 우유로 차려진 자기 집의 식사가 “얼마나 초라하고 늘 똑같아” 보였는지 회상하며 걸쭉한 옥수수 죽과 베이컨이 너무나 식상해서 식사를 하는 것이 마치 약을 먹는 것과 같았고 음식을 삼키는 것이 힘들었다고 말했다.4 오직 성도들의 신앙과 헌신만이 이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게 해주었다.

 

몰몬 대대

성도들이 아이오와에 있는 동안 미육군 병사 모집대가 교회 지도자들에게 1846년 5월에 시작된 멕시코 전쟁에 참가할 파견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몰몬 대대로 불리게 된 사람들은 미국 남부를 가로질러 캘리포니아로 행군해 가야 했으며 돈과 의복과 양식을 받게 되어 있었다. 브리감 영은 나부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모으고 각 병사들의 가족을 돕기 위한 돈을 조달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써 남자들에게 참가하도록 격려했다. 또한 이러한 노력을 통해 정부와 협력한 것은 국가에 교회 회원들의 충성심을 보여주었고, 또 그들이 공유지와 인디언 지역에 임시로 거주하는 정당한 이유를 대 주었다. 결국 541명의 남자들이 지도자의 권고를 받아들여 입대했다. 33명의 여인과 42명의 아이들이 그들을 따라갔다.

그 어려운 시기에 아내와 자녀들을 홀로 두고 떠나는 슬픔 때문에 대대원들에게 있어 전쟁터로 나가는 시련은 복합적인 것이었다. 윌리암 하이드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가족을 두고 떠난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불볕같은 햇빛이 내리비치고, 겨울이 오면 12월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댈 황량하고 쓸쓸한 외딴 평원에 마차를 제외하고는 집도 없는 처지에 있었다.

“내겐 아내와 어린 두 아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연로한 부모와 남동생 한 명과 함께 남았다. 대부분의 대원들이 가족과 헤어졌다.… 그들과 다시 만날 때가 언제인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혀 불평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5

몰몬 대대는 부족한 식량과 물 그리고 충분하지 못한 휴식과 의학 관리, 급속한 행군으로 고통을 겪으며 남서쪽의 캘리포니아로 2,030마일을 행군해 갔다. 그들은 산디에이고와 산루이스 및 로스엔젤레스에서 점령군으로 주둔했다. 병적 기간이 끝나자 그들은 제대하여 가족들에게 돌아가도록 허락 받았다. 그들은 미국 정부에 대한 수고와 충성으로 인해 그들을 지휘하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제대한 후, 많은 대원들이 잠시 동안 캘리포니아에 머물면서 일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북쪽의 아메리카 강으로 가서 존 셔터 제재소에서 일했는데 그 곳에서 1848년에 금이 발견되어 그 유명한 캘리포니아의 골드 러시를 재촉했다. 그러나 후기성도 형제들은 그러한 행운을 잡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힘들게 아메리카의 평원을 가로질러서 서쪽의 록키 산맥으로 가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인 제임스 에스 브라운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 이래로 나는 지상의 부가 있는 그 장소를 결코 보지 않았으며 그것을 후회한 적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앞에는 언제나 금보다 더 고귀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분간하지 못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땅에서 부를 보았고 그대로 머물라는 권유도 많았지만 40년 이상이 지난 후에도 그것을 후회하지 않고 돌아 봅니다. 사람들은 ‘바위 밑에도 언덕 위에도 시냇물 속에도 어디에든 금이 있어… 자넨 곧 혼자 설 수 있는 재산을 모을 수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무를 떠올렸습니다. 우리의 명예가 걸린 문제였으며, 우리는 서약을 맺었고, 지켜야 할 원리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하나님과 그의 왕국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친구와 친척들이 광야와 처녀지와 사막에 있었습니다. 누가 그들의 상태를 알았겠습니까? 우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즐거움과 부보다 의무가 먼저였으며 그러한 느낌으로 우리는 길을 떠났습니다.”6 이 형제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지상의 어떤 물질보다 더욱 가치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에 따라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브룩클린 호의 성도들

대부분의 성도들이 나부에서 육로를 통해 록키 산맥으로 갔지만 미국 동부의 어떤 성도들은 바다를 통해 여행했다. 1846년 2월 4일에 70명의 남자와 68명의 여자 그리고 100명의 어린이들이 브룩클린 호를 타고 뉴욕 항에서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17,000마일을 여행했다. 그 항해 동안 애틀랜틱과 퍼시픽이라는 이름의 어린이 두 명이 태어났고 12명이 죽었다.

6개월 동안의 여행은 몹시 힘들었다. 열대 지방의 더위 속에서 승객은 몹시 붐볐고 음식과 물도 모두 형편없었다. 케이프혼을 돈 후 그들은 후안 페르난데즈 섬에 상륙하여 5일 동안 휴식을 취했다. 캐롤린 아우구스타 퍼킨스는 “다시 한번 단단한 땅을 보고 밟는 것은 선상 생활에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감사하게 여겼으며 그 순간을 즐겼다.”라고 회상했다. 그들은 신선한 물에서 목욕을 하고 옷을 빨았으며 과일과 감자를 모으기도 하고 물고기와 뱀장어를 잡기도 하고 “로빈슨 크루소 동굴”7을 탐험하며 섬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1846년 7월 31일에 그들은 심한 폭풍우와 부족해지는 식량과 오랜 동안의 항해로 점철된 여행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곳에 머물러서 뉴호프라는 이름의 거주지를 세웠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레이트 베이진에 있는 성도들과 합류하기 위해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갔다.

 

계속되는 집합

미국 전역과 다른 많은 나라에서 충실한 개종자들이 말을 타거나 걷거나, 또는 다른 여러 가지 교통 수단을 통해 자신의 나라와 고향을 등지고 성도들과 합류하여 록키 산맥으로의 긴 여행을 시작했다.

1847년 1월에 브리감 영 회장은 영감 받은 “이스라엘의 진영에 관한 주의 말씀과 뜻”(교리와 성약 136:1)을 발표했다. 그것은 서부로 이주하는 개척자들을 다스리는 헌법이 되었다. 대대가 조직되었으며 그들 가운데 있는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도록 책임이 주어졌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악과 탐욕과 다툼을 버려야 했다. 또 그들이 즐거우면 음악과 기도와 춤으로 감사를 보여야 했다. 주님은 영 회장을 통해 성도들에게 “가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대로 행하며 네 원수를 두려워 말라”(교리와 성약 136:17)고 하셨다.

첫번째 개척자 그룹이 윈터 쿼터즈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팔리 피 프랫이 영국에서 선교 사업을 마치고 돌아와, 존 테일러가 영국 성도들의 선물을 갖고 뒤따라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다음 날 테일러 형제가 영국 회원들의 사랑과 신앙의 증거로써 여행자들을 돕기 위해 보낸 십일조를 갖고 도착했다. 그는 또한 개척자들이 행로를 계획하고 주위 환경에 대해 알게 해주는 데 있어 매우 귀중하다고 입증된 과학 기구를 가져 왔다. 1847년 4월 15일에 브리감 영이 이끄는 첫번째 대대가 출발했다. 그 후 20년에 걸쳐 대략 62,000명의 성도가 그들을 따라 시온에 집합하기 위해 마차와 손수레로 평원을 가로질러 갔다.

도중에는 어려움 뿐만 아니라 놀라운 풍경도 이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셉 모이너는 솔트레이크 계곡에 들어가기 위해 “힘든 시기”를 겪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버팔로 떼와 커다란 삼나무 언덕과 같이 이전에 결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았다.8 어떤 사람들은 광대한 지역에 해바라기가 가득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또한 성도들은 육체적인 피곤을 잊을 수 있도록 신앙을 고무시켜 주는 일들을 경험했다. 하루종일 여행하고 모닥불에 요리한 음식을 취하고 나서, 남자와 여자들은 무리지어 모여서 그날의 활동을 논의했다. 그들은 복음 원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 부르며 춤도 추고 함께 기도했다.

성도들이 서서히 서쪽으로 나아감에 따라 죽음이 자주 그들을 찾아 왔다. 1850년 6월 23일에 크랜달 가족의 수는 열다섯이었다. 그 주가 끝날 때까지 심한 전염성 콜레라로 가족 중 일곱 명이 죽었다. 다음 며칠 동안에 다섯 명이 더 죽었다. 그 후 6월 30일에 크랜달 자매가 아기를 낳다가 아기와 함께 죽었다.

성도들은 비록 솔트레이크 계곡으로 여행하는 중에 많은 시련을 겪기는 하였지만 단합, 협동, 낙천적인 정신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신앙과 주님에 대한 헌신으로 함께 결합하여 고난 중에서도 기쁨을 찾았다.

 

여기가 바로 그 곳이다

1847년 7월 21일에 첫번째 개척자 대대의 올슨 프랫과 에라스터스 스노우가 이주자들을 앞에서 이끌고 솔트레이크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사람이 간신히 헤치고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란 풀과 농사 짓기에 좋은 땅과 계곡 전체를 흘러다니는 여러 개의 작은 냇물을 보았다. 3일 후에 장티푸스를 앓고 있던 브리감 영 회장을 태운 마차가 계곡으로 들어서는 협곡 입구에 닿았다. 영 회장은 그 광경을 둘러보면서 그들의 여행에 대해 예언적인 축복을 해 주었다. “충분하다. 여기가 바로 그 곳이다.”

뒤따르던 성도들도 산에서 빠져나오자 마찬가지로 약속의 땅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서부의 태양에 어슴프레 빛나는 소금 호수가 있는 그 계곡은 시현과 예언의 대상이었으며 그들과 그들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꿈꾸었던 땅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피난처였다. 그 곳에서 그들은 록키 산중의 강대한 백성이 될 것이었다.

몇 년 후에 영국에서 온 개종자인 진 리오 그리피스 베이커는 그녀가 솔트레이크시티를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기록했다. “도시는… 네모들을 불러 모은 것처럼 네모지게, 혹은 구획으로 반듯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각각의 구획은 10에이커였으며 그것은 8개의 지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지구에 집이 한 채씩 들어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내 느낌을 잘 분석할 수는 없지만 아마 길고 위험한 여행을 하는 동안 나와 나의 가족을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느낌이 가장 컸던 것 같다.”9

 

손수레 부대

1850년대에 교회 지도자들은 최대한 많은 이주자들에게 재정적인 원조를 줄 수 있도록 경비를 줄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손수레 부대를 만들었다. 이 방법으로 여행했던 성도들은 수레에 100파운드의 밀가루와 제한된 양의 식량과 소지품만 실은 다음, 수레를 끌며 평원을 가로질러 갔다. 1856년에서 1860년 사이에 10개의 손수레 부대가 유타로 여행해 갔다. 그 중 8개의 부대는 성공적으로 솔트레이크 계곡에 도달했지만 마틴과 윌리 두 부대는 일찍 들이닥친 겨울 때문에 그들 가운데 많은 대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불운한 부대의 일원이었던 넬리 푸셀은 평원에서 열 살이 되었다. 그녀의 양친은 모두 여행 중에 세상을 떠났다. 부대가 록키 산맥에 가까이 감에 따라 날씨는 더욱 추워졌고 식량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리고 성도들은 굶주림으로 너무나 약해져서 계속 행군할 수 없었다. 넬리와 그녀의 언니도 쇠약해졌다. 그들이 거의 희망을 포기했을 때, 부대의 지휘자가 그들을 마차로 데려갔다. 그는 넬리를 마차에 태우고 매기에게는 마차 옆에서 계속 침착하게 걸어가라고 말했다. 매기는 억지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다행히 동상에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하여 평원을 횡단하면서 닳아버린 넬리의 신발과 스타킹을 벗겼을 때 동상으로 인해 다리의 피부도 함께 벗겨졌다. 이 용감한 소녀는 고통스럽게 발을 절단했으며 그녀는 평생 동안 무릎으로 걸었다. 그녀는 후에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낳았으며 자신의 집을 돌보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길렀다.10 자신의 상황을 극복한 그녀의 결심과 그녀를 돌보아 준 사람들의 친절은 초기 교회 회원들의 신앙과 기꺼이 희생하는 마음에 대한 좋은 예이다. 그들의 모범은 그들의 뒤를 따르는 모든 후기성도들에게 훌륭한 유산이다.

마틴 손수레 부대의 일원으로 평원을 횡단하여 오랫동안 유타에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이전에 손수레 부대가 지급한 것 말고는 더 이상의 보급품이나 보호도 없이 평원을 횡단하도록 허락했던 것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그 노인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귀를 기울이다가 마침내 일어나서 감정에 벅차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 부대의 일원이었습니다. 내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고통을 겪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부대의 생존자가 비난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에 대해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분이 살아 계신다는 절대적인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병과 모자라는 음식 때문에 한 쪽 발을 다른 쪽 발 앞으로 내밀 수도 없을 만큼 약해져 있을 때 손수레를 끌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앞을 바라보니 모래밭과 경사진 언덕이 보였습니다. ‘나는 저곳까지 가서는 포기해야겠다, 왜냐하면 짐을 끌고 그 곳을 지나갈 수 없으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모래밭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이르렀을 때 수레가 나를 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누가 수레를 미는지 보기 위해 몇 번이나 뒤를 돌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천사가 그 곳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손수레 부대로 오기를 선택한 것에 대해 내가 후회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때도 그 이후의 어떤 때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게 되기 위해 치른 대가는 치르어야 할 특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마틴 손수레 부대에 속하는 특권을 누린 것에 감사합니다.”11

찬송가 책에는 용감하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문명의 변경 지대에서 살기 위해 멀리 여행했던 초기 교회 회원들에 대한 노래들이 실려 있다.

그대, 왕국의 건설자들이여,

길을 따라 개척하며

매일의 모든 행위,

후세가 따를 길일지니

새롭고 굳건한 기초를 짓고

거친 개척지로 헤쳐 나갔네.

명예로운 개척자여,

축복있을지니 전진하라, 언제까지나!

그들의 모범은 우리에게 우리의 나라에서 더욱 충실하고 용기있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언제나 봉사하며,

사랑으로 이끌리어

용기와 꺼지지 않는 빛으로

모든 곳 비치네.

날마다 짐을 가볍게 하고

날마다 마음을 밝혀주고

날마다 희망을 안겨주니

축복있을지니, 명예로운 개척자여!12

 

Notes

1. 주아니타 브룩스 편, 몰몬 프론티어에서: 호세아 스타우트의 일기, 2권. (1964년) 1:114

2. 주아니타 브룩스 편, 몰몬 프론티어에서, 1:117

3. 제임스 비 엘런, 제자의 시련: 몰몬인 윌리엄 클레이튼의 이야기 (1987년), 202쪽

4. 러셀 알 리치, 열방의 기호 (1972년), 92쪽

5. 후기성도 교회사 중 독서 과제 부분: 원본 중에서, 윌리암 이 버렛과 앨마 피 버튼 편, 3권 (1965년), 2:221

6. 제임스 에스 브라운, 거대한 주님: 개척자의 생애 (1960년), 120쪽

7. 캐롤린 아우구스타 퍼킨스, “브루클린호의 성도들”, 우리 개척자의 유산(1960년), 506쪽에서 인용

8. 유타 반세기 위원회, 개척자들의 책(1897년), 2권, 2:54; 후기성도 교회 기록 보관소

9. “진 리오 그리피스 베이커 일기”, 1851년 9월 29일; 후기성도 교회 기록 보관소

10. “넬리 푸첼 언탱크의 이야기”, 서부의 심장의 고동, 케이트 비 카터 편, 12권 (1939~1951), 9:418~420

11. 윌리엄 파머, 데이비드 오 맥케이, “개척자 여성들”, 상호부조회지, 1948년 1월, 8쪽에서 인용

12. “나라를 세운 개척자들” 찬송가, 영문, 36장

 

 


만방에 기를 세움

 

평원을 가로질러 성도들의 첫번째 일행을 성공적으로 유타로 인도해 온 브리감 영 회장은 이제 사막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일에 관심을 돌렸다. 그의 비전과 지도력으로 인해, 한때 허허벌판이었던 사막이 성도들을 위한 번성하는 문명과 안식처가 되었다. 그의 솔직 담백한 지시는 성도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터전에 대한 가능성을 꿈꾸게 하였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길을 찾아 떠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첫번째 성도들의 일행이 도착한 지 이틀 후, 브리감 영 회장과 몇 명의 십이사도는 영 회장이 나부를 떠나기 전에 시현으로 보았던 산 중턱에 있는 둥그런 절벽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절벽 아래로 펼쳐진 광활한 계곡을 내려다 보면서 세계의 열방이 이곳에서 환영 받을 것이며 성도들이 번영과 평화를 누릴 곳이 바로 여기라는 예언을 했다. 그들은 그 언덕을 엔사인(기호)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약속의 말씀에서 딴 것이다.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고”(이사야 11:12)1

영 회장의 첫번째 공식적인 업무 수행은, 1847년 7월 28일에 성전을 건축할 중심 부지를 선정하고 사람들에게 성전의 설계와 건축에 대한 계획에 착수하도록 한 것이었다. 자신의 지팡이를 선정한 부지에 꽂고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성전을 지어야 하는 곳입니다.” 이 선언은 바로 얼마 전 나부를 떠날 때 강제적으로 성전 예배 의식을 중단해야 했던 성도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음에 틀림없었다.

8월에 교회의 지도자들과 첫번째 개척자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음 해에 그들의 가족들을 계곡으로 데려갈 준비를 하기 위해 윈터 쿼터스로 돌아왔다. 그들이 돌아온 직후에, 브리감 영과 십이사도 정원회는 제일회장단을 재조직할 때가 되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이었던 브리감 영이 교회의 회장으로 지지 받았다. 그는 히버 시 킴볼과 윌라드 리차즈를 보좌로 선택했으며, 성도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을 만장 일치로 지지했다.

 

계곡에서의 첫번째 해

1847년 여름이 가기 전에 두 그룹의 성도들의 일행이 솔트레이크 계곡에 더 도착했으며, 약 2,000명의 회원들로 솔트레이크 스테이크가 조직되었다. 때늦게 곡식을 심어 수확이 아주 적었으므로, 이듬해 봄까지 많은 사람들이 부족한 식량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존 알 영은 이렇게 기록했다. “초목이 자랄 때까지 기근으로 인한 고통은 극심했다. 몇 달 동안 우리는 빵 한 조각 없이 지냈다. 쇠고기, 우유, 돼지풀(명아주류의 잡초-역자 주), 시고릴리(나리과의 식물, 그 구근은 식용으로 사용함-역자 주), 엉겅퀴가 우리의 일상 식품이 되었다. 나는 가축을 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가축들을 지켜보면서, 엉겅퀴 줄기를 먹곤 하였다. 마치 소처럼 배가 꽉 찰 때까지 먹곤 했다. 마침내 굶주림이 너무 극심하면 아버지께서는 나뭇가지에 걸려 새들이 쪼아댄 오래된 쇠가죽을 걷어서 요리를 해주셨는데, 그것은 맛있는 수프가 되었다.”2 정착민들은 서로 돕고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러한 힘든 시기를 이기고 살아 갈 수 있었다.”

1848년 6월까지 정착민들은 5~6천 에이커의 땅을 경작했으며, 계곡은 점차 녹색으로 변해가고 수확도 풍성해졌다. 그러나 성도들은 식량 위에 내려앉은 거대한 메뚜기 떼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도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그들은 도랑을 파서 물줄기를 메뚜기 떼로 돌려 놓기도 하고, 메뚜기 떼를 막대기와 빗자루로 쳐서 죽이거나 불에 태워버리려 하였으나, 이 모든 노력이 다 소용없었다. 메뚜기 떼들은 계속해서 엄청나게 몰려 왔다. 솔트레이크 스테이크 부장인 축복사 존 스미스는 하루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도록 요청했다. 얼마 있지 않아서 거대한 무리의 갈매기 떼가 하늘에서 나타나 메뚜기 떼 위로 내려왔다. 수잔 노블 그랜트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놀라고 있는 사이에, 그 갈매기들은 거의 굶주린 것처럼 메뚜기 떼들을 마구 휘저으며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습니다.”3 성도들은 기쁨과 경이의 눈으로 그것을 지켜 보았다. 그들의 생명을 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도들은 그들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힘을 내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곧 큰 발전을 가져 왔다. 1849년 9월 캘리포니아로 여행하던 한 여행가가 솔트레이크시티를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저는 이전에 이분들보다 더 질서있고, 성실하며, 근면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 황무지인 이곳에서 그들이 이처럼 많은 일을 해 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4~5천 명이 거주하는 이 도시에서, 저는 단 한 명의 게으른 사람도, 그리고 부랑자와 같은 그 어떤 사람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곡식 수확에 대한 그들의 전망은 좋았으며, 모든 면에 있어서 영과 힘이 있었는데, 이는 제가 가보았던 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4

 

탐험

1848년 늦은 여름, 브리감 영 회장은 윈터 쿼터스로부터 솔트레이크 계곡으로 다시 여행을 했다. 솔트레이크 계곡에 도착했을 때, 그는 성도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환경에서 어떠한 자원이 유용한 것인지 배워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 많은 것들을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로부터 구했지만, 영 회장은 또한 교회 회원들을 탐험대로 보내 약초와 이용 가능한 천연 자원을 발견하도록 하였다.

그는 다른 정착지를 알아보도록 다른 탐험대도 보냈다. 탐험대는 이렇게 여행하는 동안 정착지로 적합한 지역뿐 아니라 광물 자원과 풍부한 목재와 수원과 초원 지대 등을 발견했다. 땅 투기를 방지하기 위해, 선지자는 성도들에게 자신들에게 할당된 토지의 일부를 떼어 타인에게 매매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땅은 그들을 지켜 주는 청지기와 같았으므로, 재정적인 이득을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되었으며, 현명하고 부지런하게 잘 관리되어야 했다.

1849년 가을, 영 회장의 지시 하에 영구적인 이주 기금이 제정되었다. 그것의 목적은 교회의 중심지로 합류하기 위해 여행하는 데 재정적인 여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큰 희생으로 많은 성도들이 그 기금을 조성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그 결과 수천 명의 성도들이 솔트레이크 계곡까지 여행해 올 수 있었다. 솔트레이크 계곡까지 올 수 있게 되면, 도움을 받았던 성도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재정적인 도움을 다시 갚도록 되어 있었다. 이 기금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상호 부조의 노력으로 성도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삶을 축복해 주었다.

 

선교사들이 부름에 응함

일에 활기를 띠고 생활이 점차 안정되자, 브리감 영 회장은 관심을 교회로 돌렸다. 1849년 10월 6일 연차 대회에서, 그는 새로 부름 받은 선교사들과 함께 몇몇 십이사도 회원들에게 외국에서 선교 사업을 행하도록 임무를 주었다. 그들은 그들의 가족들과 새 집, 그리고 아직 끝마치지 않은 일들을 남겨 두고 떠나야 했지만 이 부름을 받아들였다. 에라스터스 스노우와 몇몇 장로들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했으며, 로렌조 스노우와 조셉 토론토는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애디슨과 루시아 번즈 프랫은 소사이어티 군도에 있는 애디슨의 이전 선교 지역으로 돌아갔다. 존 테일러는 프랑스와 독일로 부름 받았다. 선교사들은 동쪽으로 여행하는 동안, 록키 산맥에서 새로운 시온으로 향하는 성도들과 만났다.

선교 지역에서 선교사들은 기적을 보았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어 교회로 인도했다. 훗날 교회 회장이 된 로렌조 스노우는 이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에, 세 살짜리 사내 아이가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른 것을 보았다. 그는 이 기회가 그 어린이를 병으로부터 고쳐주어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 지시해 주시기를 오랫동안 열심히 기도했다. 다음 날 그와 동반자는 그 사내 아이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했다. 그날 오후 그들은 그 아이에게 병자 축복을 해주었으며, 그들의 사업을 도와주시도록 조용히 기도 드렸다. 그 아이는 밤새 평온하게 잠이 들었으며 기적적으로 완쾌되었다. 아이를 고쳐주었다는 소문이 이탈리아 피드몬트 지역의 여러 계곡으로 퍼져 나갔으며 선교사들에게 문이 열리고 그 지역에서 첫번째 침례가 나왔다.5

1852년 8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특별 대회에서, 106명의 장로들이 전세계로 선교 사업을 나가라는 부름을 받았다. 이 선교사들은 후에 부름 받은 선교사들처럼 남미, 중국, 인도, 스페인, 오스트레일리아, 하와이 그리고 남태평양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뿌려 놓은 씨앗들로 말미암아 훗날 선교 사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에드워드 스티븐슨 장로는 스페인 지브랄타 선교부로 부름 받았다. 이 부름은 그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는데, 그는 그 곳에서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회복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복음을 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으며, 그가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중 한 명이 거의 개종될 단계에까지 이른 것이 당국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얼마 동안 감옥에서 보냈다. 석방된 후에 그는 두 명을 침례주었고, 1854년 1월까지 열 명의 회원을 둔 지부를 조직했다. 그 해 7월에는 여섯 명의 회원들이 아시아에 주둔한 영국 군대로 군복무를 하기 위해 떠났지만, 그 지부에는 교회가 계속 성장하는 데 필요한 지도력을 주는 한 명의 칠십인, 한 명의 장로, 한 명의 제사, 한 명의 교사를 포함한 열여덟 명의 회원들이 있었다.6

1852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지방 정부는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개종한 성도들은 1892년 전도 활동이 재개될 때까지 교회를 계속 유지해 나갔다. 티호니 장로와 마이헤아 장로가 특히 용감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부인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옥 생활과 다른 많은 시련들을 견뎌냈다. 그들 각자는 성도들이 활동적이고 복음에 충실하도록 돕기 위해 노력했다.7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교회에 가입한 회원들에게는 이 시기가 시온으로 집합하는 시기였는데, 그것은 성도들이 배를 타고 미국으로 여행하는 것을 의미했다. 엘리자베스와 찰스 우드 부부는 1860년에 남아프리카로부터 항해해 왔는데, 그들은 이 항해를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엘리자베스는 한 부잣집에서 가정부로 일했으며 그녀의 남편은 필요한 돈을 마련할 때까지 벽돌 공장에서 일했다. 엘리자베스는 아이를 낳은 지 24시간 후에 바로 배를 탔으며, 선장이 그의 침실을 그녀에게 내주어 좀더 편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여행 동안 병이 들었으며,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마침내 유타 주 필모어에 도착해 그 곳에서 정착해 살았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봉사한 나라의 성도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조셉 에프 스미스는 1857년 하와이에서의 선교 사업이 끝나갈 무렵, 심한 열병에 걸려 3개월 동안이나 선교 사업을 행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행히 하와이의 충실한 성도인 마 마후히이 자매의 간호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조셉을 마치 자신의 친자식처럼 극진히 돌보았으며, 이 두 사람간에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후에 조셉 에프 스미스가 교회의 회장이 되었을 때, 호놀룰루를 방문하게 되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바로 직후에 그는 한 눈먼 여인이 인도되어 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녀는 선물로 줄 탐스런 바나나를 들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이오세파, 이오세파 (조셉, 조셉)”하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는 즉시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껴안으며, 그녀의 볼에 수차례 입맞춤을 하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 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8

 

개척지로의 부름

유타, 남아이다 호 그리고 후에 아리조나, 와이오밍, 네바다 및 캘리포니아에 포함된 지역에서 많은 공동체들이 연차 대회에서 부름 받은 개인이나 가족들에 의해 세워졌다. 브리감 영 회장은 수천 명의 새로운 정착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는 이러한 공동체를 설립하도록 지시하였다.

브리감 영 회장의 생애 동안, 솔트레이크 계곡의 모든 곳과 주변의 많은 지역이 개척되었다. 브리감 영 회장이 세상을 떠난 1877년까지, 350여 곳 이상의 개척지가 건설되었으며, 1900년까지는 거의 500여 곳에 달했다. 초기에 교회의 관리 역원이었던 브리감 헨리 로버츠는 몰몬들이 개척지를 성공적으로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영 회장이 주었던 부름을 수행하면서 보여 주었던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과 그들 각자의 비이기적이고 헌신적인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기록했다.9 개척자들은 주님의 선지자를 따르기 위하여 물질적인 안락함이나 친구들과의 교제 그리고 때때로는 그들의 생명까지도 희생했다.

연차 대회에서, 영 회장은 외진 곳으로 이주할 부름을 받게 될 형제들과 그 가족들의 명단을 읽었다. 이 개척자들은 선교사로 부름 받은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그들이 해임될 때까지 지명된 곳에 남아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생필품들을 가지고 자비를 들여 그들의 새로운 터전으로 여행하였다. 그들의 성공 여부는 그들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주변에 있는 자원을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들은 그 지역을 조사하고, 땅을 개간하며, 방앗간을 짓고, 대지로 물을 끌여 들이기 위해 관개 수로를 파고,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목장 둘레에 울타리를 치며, 새로운 길을 닦았다. 그들은 곡물을 재배하고 채소를 가꾸며, 교회와 학교를 짓고, 인디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출생이나 사망 그리고 결혼식뿐 아니라 병이 들었을 때에도 서로 도우며 살아갔다.

1862년, 찰스 워커는 남 유타에 정착하라는 부름을 받아들였다. 그는 부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모임에 참석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던 원리를 배웠다. 그것은 내게 순종이 하늘 아래나 땅 위에서 얼마나 위대한 원리인가를 보여 주었다. 나는 이곳에서 지난 7년 동안 무더위나 추위, 굶주림과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며 생활하였으며, 마침내 곧 탐스러운 수확을 하게 될 많은 과실수가 있는 집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러한 모든 것을 남겨 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떠나야 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태도로 내게 요구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한다.”10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인 찰스 시 리치 또한 개척지로 가라는 부름을 받았다. 브리감 영은 그와 몇몇 다른 형제들에게 그들의 가족을 데리고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북쪽으로 약 150여 마일 떨어진 베어 레이크 계곡에 정착하라는 부름을 주었다. 그 계곡의 정상은 매우 높았으며, 겨울 동안에는 눈이 덮여 있는 매우 추운 곳이었다. 리치 형제는 최근 유럽에서 선교 사업을 마치고 돌아왔으며, 그의 가족들을 떠나 다시 한번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부름을 받아 들였으며, 1864년 6월, 베어 레이크 계곡에 도착했다. 그 다음 해 겨울부터 봄까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생활했는데, 다른 몇몇 형제들은 그 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리치 형제는 이 추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까지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제가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이것들을 함께 도우며 이겨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것을 빼앗고 싶지 않습니다.…그러나 저는 저 혼자만 남게 되더라도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영 회장님이 저를 이곳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분이 저를 해임하고 이곳을 떠나라고 하실 때까지 이곳에 남아 있겠습니다.” 리치 형제는 그의 가족과 함께 실제로 그 곳에 남았으며, 그 다음 몇 십 년 동안 번영하는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11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는 주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일을 돕기 위해 기꺼이 그의 지도자들에게 순종했다.

 

인디언들과의 관계

개척자들은 변방 쪽으로 더 나아가면서 인디언들과 자주 교류를 했다. 서부의 다른 정착민들과는 달리, 브리감 영 회장은 회원들에게 원주민인 인디언 형제 자매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그들을 교회에 데려오기 위해 노력하도록 가르쳤다. 인디언 사이에서의 선교 사업이 아이다호 준주에 있는 새먼 강 지역의 포트 림하이와 유타 주 경계 지역 내의 콜로라도 강 상류에 있는 엘크 산에서 시도되었다. 영 회장은 또한 상호부조회 자매들에게 바느질을 하여 인디언 형제 자매들을 위한 의복 등을 만들도록 권고하였으며, 인디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돈을 모금하도록 지시했다.

성도들과 매우 가깝게 지낸 비회원 인사였던 토마스 엘 케인의 아내 엘리자베스 케인이 유타 주를 여행하고 있었을 때, 그녀는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한 몰몬 여인의 집에 머물렀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직접 그 몰몬 여인이 인디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기 전까지는 그 여인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여인은 준비한 저녁 식사에 손님들을 부르면서, 또한 기다리고 있던 인디언들에게도 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여인이 인디언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 여인의 아들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아들이 대답하기를, “이 손님들이 먼저 오셨습니다. 이분들께 드릴 음식만 차렸는데, 지금 여러분들의 음식도 준비 중이니까 다 되면 부르겠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믿을 수가 없었으며, 그 여인이 그 인디언들에게 정말 음식을 줄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그 아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어머니께서는 당신에게 대접해 드린 것과 똑같이 저들을 위해 식탁에 자리를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그 여인은 인디언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시중을 들며 그들을 대접했다.12

 

신권 조직 및 보조 조직의 기능

영 회장은 말년에, 몇 가지 중요한 신권 책임을 설정하고 공표했다. 그는 십이사도들에게 모든 스테이크에서 대회를 열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유타 전역에 7개의 새로운 스테이크와 140여 개의 새로운 와드가 생겨났다. 스테이크 부장단, 고등평의원, 감독단 및 정원회 회장단들의 임무가 분명히 정의되었으며, 수백 명의 형제들이 이 직책에 부름 받았다.

그는 교회 회원들이 십일조와 금식 헌물과 기타 다른 헌금을 바치고 질서있게 생활해 가도록 그들을 권고했다.

1867년 선지자는 조지 큐 캐논을 주일학교 책임자로 불렀으며, 수년 내에 주일학교는 교회의 영구적인 조직이 되었다. 1869년 영 회장은 그의 딸들을 모아 놓고 검소하게 살도록 특별한 지침을 주기 시작했다. 그는 1870년 절제회 설립과 함께 이러한 권고를 교회의 모든 청녀들에게 적용했다. 이것이 청녀 조직의 시초이다.1877년 7월 그는 첫번째 스테이크 상호부조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유타 주 옥든으로 여행했다.

 

브리감 영 회장의 죽음과 유산

지도자로서 브리감 영 회장은 실천적이고 정열적이었다. 그는 성도들에게 가르침과 용기를 주기 위해 교회의 모든 정착지를 여행했다. 말씀과 모범으로써, 그는 회원들이 교회에서 그들의 부름에 충실하도록 가르쳤다.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영 회장은 뉴욕의 한 신문 편집자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썼다.

“지난 26년 동안 저의 노력의 결과를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약 10만 명 정도의 후기성도들이 이 경계 내에 거주하고 있고, 200여 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세워 우리 성도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우리의 공동체를 향상시키고 이롭게 하기 위해 학교와 공장과 제분소와 기타 필요한 시설을 세웠습니다.”

“저는 온 생애를 바쳐 전능하신 하나님께 봉사했습니다.”13

1876년 9월, 영 회장은 구주에 대해 강한 간증을 하였다. “저는 예수께서 이 세상의 그리스도이시며, 구주요 구속주라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저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 왔고, 그분의 약속을 저의 삶에서 확실히 이해했으며, 이 세상의 지혜로 얻을 수도 없고, 이 세상의 지식이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14

1877년 8월, 영 회장은 매우 심한 병에 걸렸으며, 의사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76세였으며, 교회를 이끌어 온 지 33년이 되는 해였다. 오늘날 우리는 그를 현대의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왔던 정열적인 선지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설교는 종교가 매일매일의 경험의 일부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주었으며, 일상의 모든 면에서 감동을 주었다. 그는 서부 변경 지역에 대한 이해와 현명한 지침으로, 하늘의 축복으로써 사막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한 것과 같은,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과업을 성취하도록 성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Notes

1. 설교집, 13:85~86

2. 존 알 영, 존 알 영의 비망록(1920년), 64쪽

3. 카터 이 그랜트, 회복된 하나님의 왕국(1955년), 446쪽

4. 비 에이치 로버츠, 존 테일러의 생애(1963년), 202쪽에서 인용

5. 프란시스 엠 기본스, 로렌조 스노우: 영적인 거인, 하나님의 선지자(1982년), 64쪽

6. “스페인과 지브랄타에서의 교회”, 프렌드, 1975년 5월호, 33쪽

7. 알 레이니어 브리치, 바다의 섬을 향해서: 태평양에서의 후기성도의 역사 (1986년), 21~22

8. 찰스 더블류 니블리, “조셉 애프 스미스 회장의 회상”, 임프르브먼트 이라, 1919년 1월호, 193~194

9. 러셀 알 리치, 열방의 기호(1972년), 349쪽

10. 찰스 로웰 워커의 일기, 에이 카알 라슨 및 캐더린 마일스 라슨 편, 2권 (1980년), 1:239쪽

11. 레오나드 제이 애링턴, 찰스 시 리치(1974년), 264쪽

12. 엘리자베스 우드 케인, 열두 몰몬 가정이 유타를 통해 아리조나로 가는 여로에 연달아 방문(1974), 65~66쪽

13. 고든 비 힝클리, 회복된 진리(1979), 127~128쪽에서 인용

14. 브리감 영, 설교집, 18:233

 

 


시련과 시험의 기간

 

존 테일러 회장

브리감 영 회장이 돌아가신 후, 존 테일러 회장이 관리하는 십이사도 정원회가 3년 동안 후기성도들을 인도하였다. 1880년 10월 10일, 존 테일러는 교회의 회장으로 지지되었다. 테일러 회장은 천부적인 저술가이자 저널리스트였는데, 그는 속죄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으며, 타임즈 앤드 시즌스와 더 몰몬을 포함한 교회의 매우 중요한 정기 간행물을 편집하였다. 그는 여러 면에서 회복된 복음에 대한 그의 헌신과 용기를 보여 주었다. 한 예를 들면, 그는 자발적으로 그의 형제들과 함께 카테이지 감옥에 갇혔으며, 그 곳에서 네 발의 총탄을 맞기도 했다. 그의 개인적인 생활 신조인 “하나님의 왕국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함축하고 있다.

 

선교 사업

테일러 회장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1879년 10월 연차 대회에서, 그는 사도로 부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세스 대처 장로를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부름을 주었다. 대처 장로와 다른 두 명의 선교사는 1879년 11월 13일 멕시코시티에 첫번째 교회 지부를 조직하였는데, 지부장으로는 플로티노 시 로다카나티 박사가 부름 받았다. 로다카나티 박사는 스페인어 판 몰몬경에 관한 소책자를 읽고 테일러 회장에게 교회에 관한 추가적인 정보를 요한다는 편지를 보낸 후 개종한 사람이다.

십이사도 중 한 명과 세 명의 선교사들에 의해, 회복된 복음이 서서히 멕시코 사람들 사이에서 전파되기 시작했다. 1881년 4월 6일에 대처 장로와 페라모르즈 영 장로와 파이스 형제는 해발 5,000미터에 이르는 포파카테페텔 산에 올라가 간단한 헌납식을 가졌다. 대처 장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멕시코 백성들이 그들의 목자인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멕시코 백성들과 멕시코 땅을 헌납하였다.

대처 장로는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와 몇몇 선교사들이 추가적으로 더 멕시코에서 봉사하도록 추천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훗날 제일회장단의 일원이 된 앤소니 더블류 어빈스를 포함한 몇몇 젊은이들이 멕시코에서 봉사하기 시작했다.

밀턴 트레조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어떠한 종교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필리핀에서 군복무를 할 때, 그는 록키 산맥의 몰몬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그들을 방문하고 싶다는 강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 후에 그는 심한 병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유타를 방문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병이 완쾌되었을 때 솔트레이크시티로 여행을 했다. 그는 브리감 영을 만났으며 복음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진리를 발견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멕시코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한 그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스페인어로 된 몰몬경을 읽을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테일러 회장은 또한 미 서부에 사는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들을 불렀다. 아모스 라이트의 선교 사업은 와이오밍 주 윈드 리버 인디언 보호 구역에 거주하는 쇼숀 족 가운데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단 몇 개월만의 봉사로 라이트는 와사키 추장을 포함한 300여 명 이상의 인디언들을 침례주었다. 또한 후기성도 선교사들은 애리조나 주와 뉴멕시코 주에 거주하는 나바호 족, 푸에블로호 족 및 주니 족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윌포드 우드럽은 호피 족, 아파치 족 및 주니 족 등과 같은 인디언들에게 1년 정도 선교 사업을 하였다. 암몬 엠 테니는 100명 이상의 주니 족 인디언들에게 침례를 주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선교사들은 영국과 유럽에서도 복음을 계속 전했다. 1883년, 유타 주 리하이에 살고 있던 독일 태생의 토마스 비싱거는 유럽 선교부에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와 폴 해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로 보내졌다. 그 지역은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다. 선교사들은 법률로 전도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화들은 종종 종교적인 주제로 화제가 바뀌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전도한 지 채 한 달도 못되어, 비싱거 장로는 체포되어 두 달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석방된 후, 비싱거 장로는 자신을 고발했던 안토닌 유스트를 침례주는 축복을 받았다. 유스트 형제는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후기성도가 되었다.1

복음은 폴리네시아에도 전파되었다. 두 하와이 선교사인 키모 펠리오 장로와 사무엘 마노아 장로는 1862년에 사모아로 파송되었다. 그들은 약 50명의 사람들을 침례주었으며, 마노아 장로는 사모아에서 25년 동안이나 자신이 개종시켰던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1887년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의 조셉 에이치 딘은 사모아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마노아 장로와 그의 충실한 아내는 딘 장로와 그의 아내 플로렌스 자매를 그들의 집으로 기쁘게 맞아들였는데, 이는 마노아 장로에게 있어서 실로 20년 만에 사모아 지역 외의 교회 회원을 만나게 된 특별한 일이었다. 딘 장로는 얼마 있지 않아 14명을 침례주어 교회로 인도하였으며, 약 한 달 뒤에는 사모아 말로 첫설교를 하였다.2 그리하여 선교 사업은 그 섬에서 다시 한번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1866년으로 접어들면서, 하와이 정부 관리들은 나병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병에 걸린 환자들을 몰로카이 섬의 카라우파파 반도로 격리시켰다. 후기성도였던 조나단과 키티 나펠라는 1873년에 그곳으로 추방당했다. 키티 자매만 병에 걸렸으나, 솔트레이크 엔다우먼트 하우스에서 부부로 인봉된 조나단은 키티 자매 혼자 그 곳에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다. 후에 조나단도 병에 걸렸으며, 9년 후 그의 친한 친구가 그를 방문했을 때는 그의 예전의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 있었다. 얼마 동안 그는 1900년까지 200여 명 이상이던 반도의 성도들을 관리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심한 병으로 고생하던 충실한 성도들을 잊지 않았으며, 그들의 영적인 필요 사항을 돌보기 위해 자주 그 지부를 방문하였다.3

 

50년절 연차 대회

1880년 4월 6일, 교회 회원들은 교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했다. 그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 50년마다를 50년제절라고 이름붙였던 것처럼 그 행사를 50년절이라고 불렀다. 테일러 회장은 생활이 궁핍한 회원들이 교회에 진 빚을 모두 면제해 주었다. 교회는 또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극빈자들”4에게 300마리의 소와 2,000마리의 양들을 나누어 주었다. 교회의 상호부조회 자매들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35,000부셸(곡식 따위의 계량 단위, 8갤런, 36리터: 역자 주)의 휘트밀을 나누어 주었다. 테일러 회장은 또한 교회 회원들에게 특히 대공황기 중에 진 개인적인 빚을 면제해 주도록 강조했다. “지금은 50년절의 기간입니다.”5라고 테일러 회장은 선언했다. 후기성도들 사이에는 용서의 정신과 기쁨이 가득했다.

1880년 4월 50주년 기념 연차 대회의 마지막 날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십이사도 중 열한 명이 대회 기간 동안 간증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초대 회원 중 한 사람이었던 올슨 프랫은 교회 회원 모두가 뉴욕 주 페이에트의 피터 휘트머 일세의 집에 모였던 이야기를 했다. 그는 후기성도들의 시련과 집합, 박해와 고통에 대해 회상했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아직도 함께 하고 있는 사실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주 하나님께서 지난 50년 동안 행하셨던 위대한 사업”6에 관하여 간증했다. 프랫 장로는 몇 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으며, 다른 충실한 후기성도들처럼 끝까지 견딘 것에 대해 기쁨을 느꼈다.

50주년 기념 행사가 있기 2년 전, 존 테일러 회장은 어린이들에게 종교를 가르칠 조직을 설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첫번째 초등협회 모임이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북쪽으로 15마일 떨어진 파밍턴에서 시작되었다. 1880년대 중반까지 거의 모든 후기성도 정착지에 초등협회가 조직되었다. 초등협회는 전세계의 수백만 어린이들이 속해 있는 조직으로 성장해 오고 있으며, 어린이들은 초등협회에서 매주 복음의 가르침과 음악과 교제를 통해서 축복 받고 있다.

 

계속되는 박해

1830년대 초에 성경을 번역하는 동안,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아브라함, 야곱, 다윗 그리고 구약의 다른 지도자들이 한 명 이상의 처를 둔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선지자는 이에 대해 이해력을 주시도록 기도 드렸으며, 특정한 때에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하늘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서 복수 결혼을 허용하시고 지시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조셉 스미스는 또한 하나님의 승인에 따라 곧 신권의 권능에 의해 선택된 후기성도들이 한 명 이상의 처와 결혼하게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몇몇 후기성도들이 나부에서 복수 결혼을 시작했으나, 이 교리와 그 시행에 대해서는 1852년 8월에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공식적으로 공표되었다. 그 대회에서 브리감 영 회장의 지시를 받은 올슨 프랫 장로는 한 남자가 한 명 이상의 처를 갖는 것을 실시하는 것은 주님의 만유에 대한 회복의 일부(사도행전 3:19~21 참조)라고 발표하였다.

미국의 많은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은 유타 주에 살고 있는 후기성도들이 부도덕하고 반기독교적이라고 여기는 복수 결혼 체제를 장려한다는 것을 알고 몹시 분개하였다. 교회와 회원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미 의회는 후기성도들의 자유를 구속하고 교회에 재정적으로 타격을 주는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안에 따라 결과적으로 관리들은 한 명 이상의 처를 둔 남자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었으며, 그들에게서 투표권과 가정에서의 사생활 보장권 및 기타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였다. 수백 명의 충실한 후기성도들과 몇몇 여성들이 유타, 애리조나, 네브라스카, 미시간 그리고 사우스 다코타 주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을 받아들인 많은 회원들에게도 박해가 심해졌는데, 특히 미국 남부 지역이 심했다. 예를 들면, 1878년 7월에 조셉 스탠딩 장로는 조지아 주 롬 근처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후에 사도가 된 그의 동반자 루저 클로슨 장로는 겨우 죽음을 모면했다. 솔트레이크시티에 사는 성도들은 스탠딩 장로의 살해 소식에 매우 비통해 했으며, 수천 명이 솔트레이크의 태버내클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존 깁스, 윌리엄 베리, 윌리엄 조운스 및 헨리 톰슨 장로는 교회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바꿔보기 위해 테네시 전역을 여행했다. 1884년 8월 어느 일요일 아침, 그들은 테네시 주 케인 크릭 근처에 있는 제임스 콘도의 집에서 휴식하고 있었다. 깁스 장로가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고 있을 때, 폭도 한 명이 숲에서 뛰어 나와 그에게 총을 쏘았다. 그로 인해 깁스 장로와 베리 장로가 목숨을 잃었다. 학교 교사였던 깁스 장로에게는 아내와 세 자녀가 있었는데, 그들은 깁스 장로의 죽음으로 인해 매우 애통해 하였다. 깁스 자매는 43년 동안 미망인으로 지냈으며,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산파 일을 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다시 만날 재회의 기쁨을 고대하면서 복음 가운데에서 생을 마쳤다. 많은 선교사들이 살해당하던 당시에 선교부장 대리로 봉사하고 있던 브리감 헨리 로버츠는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깁스 장로와 베리 장로의 시신을 무덤에서 몰래 파내어 유타로 옮겨왔다. 유타 주의 많은 와드에서는 두 장로에게 경의를 표하는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다른 지역의 선교사들은 피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릴 때까지 채찍질 당하였으며, 많은 선교사들이 채찍질로 인한 심한 상처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당시에 교회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복수 결혼한 사람들을 수색하는 연방 보안관들의 체포망을 피하기 위해 잠적했다. 많은 가족들은 이 보안관들이 늦은 밤 집으로 침입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조지 큐 캐논 회장, 로렌조 스노우, 루드가 클로슨, 브리감 헨리 로버츠, 조지 레이놀즈와 다른 많은 성도들이 투옥되었으며, 그들은 감옥에서 책을 저술한다든지, 감옥 내 학교에서 가르친다든지, 가족에게 편지를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존 테일러 회장은 솔트레이크에서 북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유타 주 케이스빌로 강제 추방당하였는데, 그는 1887년 7월 25일에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 지상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을 전하고 주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그의 생을 다 바친 충실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다.

 

윌포드 우드럽 회장

윌포드 우드럽은 교회에서 가장 성공적인 선교사 중 한 명이었으며, 또한 선지자적인 통찰력과 교회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명했다. 그는 상세하게 일지를 기록했는데, 거기에는 초기 교회 역사에 대한 많은 내용이 들어 있다. 그는 존 테일러 회장이 별세했을 때,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었으며, 약 2년 후에 교회의 회장으로 지지 받았다.

그가 교회를 인도하는 동안, 후기성도에 대한 정치적인 박해의 정도가 심해졌으나 교회는 더욱 발전해 나갔다. 성전이 유타 주의 세인트 조지, 로간 및 맨타이에서 운영되었으며, 솔트레이크 성전도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주님의 집을 통해 수천 명의 성도들이 자신의 엔다우먼트를 받을 수 있었으며, 그들의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대리 의식을 행할 수 있었다. 우드럽 회장은 평생 동안 가족 역사 사업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조상을 위해 성전에서 많은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권고하였다.

다음의 이야기는 성도들이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행하고 있었던 사업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1884년 5월 로간 제2와드의 헨리 밸라드 감독은 그의 집에서 성전 추천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밸라드 감독의 딸이 친구들과 함께 집 근처에서 노는 중에 두 노신사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 소녀를 부르더니 신문을 한 장 건네주며 그것을 아버지께 갖다 드리라고 말했다.

그 소녀는 그들이 부탁한 대로 그 신문을 아버지에게 전했다. 밸라드 감독은 그 신문이 영국에서 발행된 뉴베리 위클리 뉴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많은 계보에 대한 정보와 함께 그와 그의 아버지의 친인척들에 대한 명단이 60여 개 이상 실려 있었다. 이 신문은 1884년 5월 15일자였는데, 발간된 지 겨우 3일 만에 그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항공 수단이 있기 오래 전의 일이기 때문에, 우편물이 영국에서 미국 서부로 전달되기까지는 몇 주가 걸리던 때였다. 이것은 참으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 날, 밸라드 감독은 그 신문을 성전으로 가져 갔으며, 당시 성전장이었던 마리너 더블류 메릴에게 그 신문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메릴 성전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밸라드 형제님, 세상 저 편에 계신 누군가가 그들에 대한 사업이 행해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그들은 이 신문이 형제님의 손에 건네진다면 형제님께서 그 일을 행하실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7 그 신문은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교회 역사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교회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미정착지에 대한 개척을 강조하였다. 1885년 초기, 많은 후기성도들이 개척지 주아레즈와 개척지 디아즈와 같은 마을들을 세우면서 멕시코의 소노라와 치우아후아에 정착했다.

교회 회원들은 개척을 위한 장소로서 북쪽의 캐나다 지역을 살펴보았다. 캐쉬 밸리 스테이크의 찰스 오 카드 스테이크 부장은 1886년 앨버타 남부에 후기성도들의 공동체를 설립했다. 1888년 겨울까지 캐나다 서부에 살고 있던 후기성도는 100명이 넘었으며, 1890년대 동안에는 더 많은 후기성도들이 와서 관개 시설과 철도 건설 사업에 참여하였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앨버타에서 그들의 지도력을 발전시켜 나갔다.

 

선언문

1880년대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미 합중국 정부는 복수 결혼한 사람들에 대한 투표권과 배심원으로 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였으며, 심하게는 교회가 소유할 수 있었던 재산까지 제한하는 추가적인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더 많은 가장들이 몸을 숨기게 됨에 따라 후기성도 가족들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윌포드 우드럽 회장은 주님의 인도를 구하였다. 1890년 9월 23일 저녁, 선지자는 영감에 따라 교회 회원들에게 복수 결혼을 금하는 내용의 선언문을 썼다. 주님께서는 윌포드 우드럽 회장에게 복수 결혼의 시행을 중지하지 않는 한 미 합중국 정부가 성전을 강점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사업이 끝나게 되리라는 것을 시현을 통해 보여 주셨다.

1890년 9월 24일,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가 선언문을 지지했으며, 성도들은 1890년 10월 연차 대회에서 이 선언문을 승인했다. 오늘날 이 선언문의 내용은 교리와 성약에 선언문 1로 실려 있다.

교회의 이러한 조치에 따라, 연방 관리들은 복수 결혼을 반대하는 법률을 위반한 혐의가 있는 후기성도들을 사면한다고 공포하였으며, 그로 인해 많은 박해와 핍박이 그쳤다. 그러나 윌포드 우드럽 회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제가 행했던 일을 하도록 저에게 명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모든 성전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저 또한 감옥에 갔어야 했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 곳으로 가게 해야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도록 명을 받은 시간이 왔을 때, 저는 그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 앞으로 나아갔으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썼습니다.(“선언문에 관한 윌포드 우드럽 회장의 세 가지 연설문에서 발췌”, 선언문 1 다음에 추가됨.) 미 합중국의 의회가 아니고 바로 하나님께서 복수 결혼의 공식적인 중단을 가져오게 하셨던 것이다.

 

계보 협회

후기성도들은 계보 협회를 창설하기 오래 전부터 돌아가신 조상들의 삶에 관한 기록들을 모았다. 윌포드 우드럽, 올슨 프랫 그리고 히버 제이 그랜트도 성전 의식을 대리로 행했던 수천 명의 조상들의 이름을 얻었던 사람들에 속한다. 1894년, 제일회장단은 계보 협회를 조직하도록 지시했고, 초대 지도자로 프랭클린 디 리차즈 장로를 불렀다. 도서관이 설립되었으며, 협회의 대표는 성전 의식이 수행될 수 있도록 전세계로 여행하며 사람들의 명단을 찾아다녔다. 이 협회는 후에 교회의 가족 역사부로 발전했다.

1894년 4월 연차 대회에서 우드럽 회장은 계보 사업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후기성도들이 다음과 같이 행하기를 바란신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자신의 계보를 찾아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봉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자녀들도 그들의 부모에게 인봉되도록 하여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이러한 인봉의 끈이 연결되게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이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볼 때, 그것이 진실함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8 후기성도들은 지금도 계속 자신들의 돌아가신 조상들의 기록을 찾고, 또한 자신을 위해서도 성전 의식을 받도록 권고 받고 있다.

1885년부터 1900년까지, 많은 교회 회원들이 계보 선교사로 봉사했다. 그들은 솔트레이크시티로 초대되어 총관리 역원으로부터 그들의 사업에 대한 축복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또한 선교사 카드와 승인서가 제공되었다. 그들은 친척을 방문하고 무덤에 있는 묘비에서 이름을 기록하고 지방 행정 관청의 기록과 가족 성경을 연구하고 성전 사업이 수행되도록 할 수 있는 값진 정보들을 가지고 그들의 집으로 돌아왔다. 많은 선교사들이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종종 그들에게 필요한 관련 자료들을 지시해 주신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하는 영적인 경험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다.9

 

솔트레이크 성전의 헌납

윌포드 우드럽 회장은 그의 생애의 많은 부분을 성전 사업에 헌신했다. 그는 세인트 조지 성전의 초대 성전장으로 봉사했으며, 맨타이 성전을 헌납하였다. 솔트레이크 성전의 초석이 세워진 지 40년이 지난 후, 윌포드 우드럽 회장은 이 역사적인 성전의 헌납을 큰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다. 성전 헌납식은 1893년 4월 6일부터 18일까지 약 75,000여 명의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10

4월 6일 첫번 헌납식이 끝나고 우드럽 회장은 자신의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나님의 영과 권세가 우리에게 임했다. 예언과 계시의 영이 우리에게 임했고, 사람들의 마음은 감동으로 가득 찼으며, 많은 것들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11 몇몇 후기성도들은 천사를 보았으며, 이미 돌아가신 교회 회장과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을 본 성도들도 있었다.12

우드럽 회장이 자신의 90번째 생일 축하 모임에 참석했을 때, 수천 명의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템플 스퀘어에 있는 태버내클에 모여 그를 축하해 주었다. 그는 크게 감동하여,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그가 열 살 때 개신교의 주일학교에 참석해 사도와 선지자에 관해 읽었던 이야기를 어린이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께 살아 생전에 이 지상에서 한번 더 사도와 선지자들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이제 그는 사도와 선지자들이 함께 있는 곳에 서 있게 되었으며, 이와 같이 그의 기도는 여러 차례 응답되었다.13

그로부터 1년 후인 1898년 9월 2일에 우드럽 회장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던 중에 운명을 달리했다.

 

로렌조 스노우 회장과 십일조

우드럽 회장이 별세한 후,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이었던 로렌조 스노우가 교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책임에 대해 잘 준비해 왔던 현명하고 사랑이 많은 지도자였다. 그는 그 당시까지의 모든 말일의 선지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으며, 그 분들에 의해 가르침 받아온 사람이었다. 1900년 11월, 그는 성도들을 태버내클에 모이게 하였으며, 종종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선지자의 가족을 방문하여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선지자와 사적인 면담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조셉이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이 진리가 “가장 분명하고 완벽”하다는 것을 자신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이었다.14

스노우 회장이 회장으로 봉사하던 시기에, 교회는 복수 결혼에 반대하는 연방 정부의 법률 때문에 야기된 심각한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 스노우 회장은 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부채를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주님께 인도를 구하였다. 이듬해인 1899년 4월 연차 대회에서 그는 유타 주 세인트 조지를 방문해야겠다는 영감을 받았다. 그는 그 곳에서 열린 모임에서 말씀을 하던 중에 말씀을 잠시 멈추었는데, 잠시 후 그는 자신이 계시를 받았었다고 말했다. 교회의 성도들이 십일조의 법을 소홀히 했으며, 이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교회 회원들이 완전한 십일조를 바치는 데 더 충실하면, 그들에게 축복이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선지자는 유타 전역에서 모임에 참석한 회중들에게 십일조의 중요성에 관해 말씀을 전했다. 성도들은 그의 권고에 따랐으며, 그 해에 성도들은 전년도에 비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십일조를 바쳤다. 1907년까지, 교회는 교회의 모든 채권자들에게 갚을 충분한 기금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결국 교회의 모든 빚이 청산되었다.

1898년, 본부 청녀 상호 향상회를 위한 리셉션에서, 조지 큐 캐논 회장은 제일회장단이 “현명하고 사려 깊은 몇몇 여성들을 선교사로 부르겠다”고 결정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15 이러한 발표가 있기 전부터, 몇몇 자매들이 선교사로 나가는 그들의 남편을 동행한 적이 있긴 했으나, 자매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자로서 공식적으로 부름 받고 성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매들에게는 선교사로 봉사할 의무가 없지만, 지난 수십년 간 수천 명이 복음 선교사로서 이러한 특권을 행사했으며, 복음 선교사로서 용감하게 주님을 위해 봉사했다.

로렌조 스노우 회장이 봉사하던 시기에 교회는 20세기를 맞았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당시, 교회는 43개의 스테이크와 20개의 선교부, 및 967개의 와드와 지부가 있었다. 성도들은 283,765명에 달하였으며, 성도들 대부분이 미합중국의 록키 산맥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4개의 성전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교회 회원들에 관한 기사를 싣는 출판물로는 청소년 인스트럭터, 임프르브먼트 이라, 청녀 저널 등이 있었다. 최소한 새로운 한 개의 선교부가 곧 개설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으며, 후기성도들은 다음 백 년 동안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거의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제까지 그들은 후기성도들이 교회의 운명에 관한 예언들이 성취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Notes

1. 카알라일 메르, “인내하는 신도들: 체코슬로바키아와 후기성도 교회, 1884~1990년,” 몰몬 역사 일지 (1992년 가을), 112~113쪽

2. 알 레이니어 브리치, 바다의 섬을 향해서: 태평양에서의 후기성도의 역사(1986년), 352~354쪽

3. 리 제이 캔웰, “이별의 아픔”, 디스 피플(1995년 여름호), 58쪽

4. 비 에이치 로버츠, 교회사 요해, 5:592

5. 비 에이치 로버츠, 교회사 요해, 5:593

6. 비 에이치 로버츠, 교회사 요해, 5:590~591

7. 멜빈 제이 밸라드: 의를 위한 십자군(1966), 16~17쪽

8. 제임스 알 클라크 편,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제일회장단 메시지, 6권(1965~1975), 3:256~257

9. 제임스 비 앨런, 제시 엘 엠브리, 카알라일 비 메르, 마음을 아비에게 돌리고: 유타 계보 협회 역사, 1894~1994년(1995년), 39~41쪽

10. 비 에이치 로버츠, 교회사 요해, 6:236

11. “윌포드 우드럽 일지” (1833~1998년), 1893년 4월 6일; 후기성도 교회 기록 보관소

12. 리차드 니첼 홀자펠, 돌의 교훈(1992년), 71, 75, 80쪽

13. 매튜 에프 카울리, 윌포드 우드럽(1909년), 602쪽

14. “시온의 구속”, 밀레니얼 스타, 1900년 11월 29일, 754쪽

15. “자전적 스케치: 제니 브림홀 및 이네츠 나이트”, 청녀 일지, 1898년 6월, 245쪽

 

 


팽창하는 교회

 

1901년부터 1970년까지 조셉 에프 스미스, 히버 제이 그랜트, 조지 앨버트 스미스 및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 네 분이 성장기의 교회를 인도했다. 이 회장들은 말이 끄는 마차에서부터 우주를 여행하는 로케트에 이르기까지 교통 수단의 변천을 지켜보았다. 두 번의 세계 대전과 세계 대공황이 성도들을 변화시켰다. 이 기간 동안 9개의 성전이 세워졌다. 1901년에 50개의 스테이크에 대략 300,000명의 회원들이 있었으며, 1970년까지 교회는 전세계 500개의 스테이크에 2,800,000명 이상의 회원들로 증가되었다.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

조셉 에프 스미스는 미주리 주에서의 박해가 극심하던 때인 1838년 파웨스트에 있는 성전 부지 근처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조셉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하이럼 스미스는 미주리 주 리치몬드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 메어리 필딩 스미스가 혼자서 아이들을 돌보아야 했다.

조셉이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은 미주리 주에서 일리노이 주 나부로 이사를 했는데, 바로 그 곳에서 그가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이 카테이지 감옥에서 살해 당했던 것이다. 조셉은 아버지가 말을 타고 카테이지 감옥으로 끌려가던 중에, 그를 번쩍 들어 올려 입맞춤하고 내려 주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또한, 어느 날 밤 그의 이웃이 어머니에게 아버지 하이럼의 살해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급히 창문을 두드리던 그 무서웠던 기억을 그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의 시신이 나부에 있는 맨션 하우스의 관 속에 뉘어져 있던 광경도 그의 뇌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소년 조셉은 그날 밤 사이에 어른이 다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메리 필딩 스미스와 그녀의 가족들은 나부에서의 탈출 행렬에 합류했다. 일곱 살된 조셉은 마차를 모는 일을 했다. 조셉이 열세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으며, 그가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그는 샌드위치 군도(현재의 하와이 군도)로 선교 사업을 떠났다. 그가 호놀룰루에 도착한 지 3개월 후, 그는 원주민어로 유창하게 말하게 되었다. 그를 성별했던 십이사도 팔리 피 프랫과 올슨 하이드가 그에게 영적인 은사를 주었다. 21세가 되었을 때, 그는 다시 선교 사업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영국에서 3년 동안 봉사했다.

브리감 영 회장으로부터 사도로 성임 받았을 때, 조셉은 겨우 28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후에 그는 교회의 네 명의 회장의 보좌로 봉사했다. 1901년 10월, 로렌조 스노우 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 조셉 에프 스미스는 교회의 6대 회장이 되었다. 그는 복음 진리에 정통하고 해박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의 설교와 저술은 복음 교리라는 제목으로 편집되었는데, 이 책은 교회의 중요한 교리서 중의 하나가 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교회는 몇 가지 중요한 방법으로 발전해 나갔다. 십일조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와 이에 대한 성도들의 충실한 이행으로, 교회는 지고 있던 모든 부채를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 번영의 시기가 뒤따라, 교회는 성전과 예배당과 방문자 센터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교회의 역사적인 장소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는 또한 솔트레이크시티에 교회 행정 건물을 지었는데, 이 건물은 아직도 교회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스미스 회장은 전세계에 성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1906년 스위스 베른에서 있었던 대회에서, 그는 팔을 펴고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땅에 많은 성전이 들어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그 곳에 가서 여러분의 돌아가신 조상들을 위해 구속 사업을 하게 될 것입니다.”1 유럽 대륙의 첫번째 후기성도 성전인 스위스 성전이 거의 반세기 후에 스미스 회장이 예언의 말씀을 하였던 그 도시의 근교에 헌납되었다. 스미스 회장은 1913년에 캐나다 앨버타의 카드스톤에 성전을 지을 땅을 헌납하였으며, 1915년에는 하와이 성전을 지을 땅을 헌납하였다.

1900년대 초기에 들어서면서,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에게 유타로 집합하는 것보다는 성도들이 거하는 곳에 그대로 남아 있으라고 권고했다. 1911년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과 제일회장단의 두 보좌들은 다음과 같은 성명문을 발표했다. “우리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땅에 그대로 남아서 전도 사업을 돕기 위한 영구적인 성격의 회중을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2

스미스 회장은 별세하기 6주 전에 죽은 자의 구속에 관한 중요한 계시를 받았다. 그는 시현으로 영의 세계에서의 주님의 성역을 보았으며, 충실한 성도들이 영의 세계에서 계속해서 복음을 가르치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계시는 1976년에 값진 진주에 첨가되었으며, 1979년에 교리와 성약 138편으로 옮겨졌다.

 

히버 제이 그랜트 회장

1918년 11월,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은 작고하기 직전에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이던 히버 제이 그랜트 장로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에게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형제님은 큰 책임을 맡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일이 아닌 주님의 사업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그 어떠한 사람보다도 더 위대하십니다. 그분은 누가 그분의 교회를 이끌어가야 할지를 알고 계시지요. 그분은 결코 실수하시는 법이 없으시지요.”3 1882년부터 사도로 봉사해 온 히버 제이 그랜트는 그의 나이 62세에 교회의 제7대 회장이 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히버는 그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 있어서 남다른 결의를 보였다. 미망인이었던 홀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던 어렸을 때, 그는 자기 또래의 다른 소년들과 쉽게 어울려 놀지 못했다. 그가 야구 경기를 하려고 할 때, 소심하고 서투른 솜씨 때문에 그는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으며, 어느 누구도 그를 팀에 끼워주려고 하지 않았다. 실망하고 낙담하는 대신, 그는 여러 시간 끈기있게 계속해서 공 던지는 연습을 하였으며, 결국 다른 팀 선수가 되어 몇몇 지방 경기에서 우승을 하게 되었다.

소년 시절, 구두 닦는 일보다 부기 계원이 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그는 부기 계원이 되고 싶었다. 그 당시 부기 계원이 되기 위해서는 글씨를 아주 잘 써야 했지만, 그의 글씨가 얼마나 악필이었던지 그의 친구 두 사람은 그의 글씨가 꼭 암탉이 이리저리 찍어놓은 발자국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시 한번, 그는 실망하지 않고 오랫동안 글씨 쓰는 연습을 했다. 그는 글씨를 아름답게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유명하게 되어, 결국에는 대학에서 습자를 가르치게 되었으며, 중요한 서류를 작성하는 데 종종 불려가기도 했다. 그는 주님과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자 결심하였으며, 이를 지켜보았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위대한 모범이 되었다.

그랜트 회장은 현명하고 성공적인 사업가였는데, 그의 이러한 사업 수단은 전세계가 공황에 처해 있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해있던 때에 교회를 인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자립하는 것이 정부가 아닌 주님과 자신이 열심히 일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번 돈으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해 주었다.

1930년대에, 전세계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성도들도 대공황기에 실업과 가난의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었다. 1936년, 주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결과, 그랜트 회장은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모든 회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교회 복지 프로그램을 제정했다. 제일회장단은 이 프로그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일차적인 목표는, 가능한 한 게으름의 해독을 일소하고, 실업 수당의 해악을 없애며, 독립적이고, 근면하며, 검소하고, 자존하는 시스템을 우리 성도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세워보는 데 있습니다. 교회의 목표는 스스로 돕고자 하는 사람을 돕는 데 있습니다. 노동은 교회 회원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다시 한번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4

제일회장단의 보좌로 28년 동안 봉사해 온 제이 르우벤 클라크 이세 회장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복지 계획의 실제적인 장기 목표는 수여자와 수혜자인 교회 회원들 사이에서 특징을 형성하는 것이고, 그들의 내부 깊은 곳에 내재된 가장 훌륭한 것을 이끌어 내는 것이며, 풍부하게 잠재된 영의 결실을 맺는 데 있습니다.”5

1936년 본부 복지 위원회가 교회의 복지 사업을 관리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파이오니아 스테이크 부장이었던 해롤드 비 리 부장은 위원회의 관리 책임자로 부름 받았다. 후에 데져렛 인더스트리스 상점이 실업자나 지체 부자유자들을 돕기 위해 세워졌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농장 조성과 생산 사업이 실시되었다. 오늘날 복지 프로그램은 전세계의 가난한 교회 회원들과 궁핍한 환경에 처해 있는 다른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고 있다.6

선교 사업이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동안, 그랜트 회장은 어떤 특별한 개종에 도움을 주었다. 개신교의 이탈리아인 목사였던 빈센초 디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교회를 향해 뉴욕 시의 거리를 걷던 중에 잿더미로 가득한 통속에서 표지가 없는 책 한 권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 책을 집어들고, 책장을 넘겨보았다. 그는 그 책에서 니파이, 모사이야, 앨마, 그리고 모로나이라고 하는 이름들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그 책의 이름과 출처에 대해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으며, 그 책의 진실성에 대해 기도해 보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해보았으며,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귀하고 특별한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처럼 기쁘고 즐거운 느낌이 나의 영혼에 위안을 주었으며, 인간의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교회 회원들에게 그 책에 나와 있는 원리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그의 행위에 대해 그를 징계했으며, 심지어는 그에게 그 책을 태워버리도록 지시했으나,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후에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며, 1930년 그는 그 책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에서 발행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유타에 있는 교회 본부로 편지를 썼으며, 그 편지는 그랜트 회장에게로 전달되었다. 그랜트 회장은 그에게 이탈리아어판 몰몬경을 보냈으며, 그의 이름을 유럽 선교부의 선교부장에게 보냈다. 전시의 여러 어려움 때문에 빈센초는 여러 해 동안 침례를 받을 수 없었으나, 그는 결국 1951년 1월 18일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었는데, 이는 시칠리 섬에서 최초의 회원이 된 것이었다. 5년 후 그는 스위스 성전에서 엔다우먼트를 받았다.7

1922년 5월 6일, 그랜트 회장은 교회의 첫 라디오 방송국을 헌납했다. 2년 후에 그 방송국은 연차 대회 실황을 방송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더욱더 많은 교회 회원들이 총관리 역원들의 연차 대회 메시지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1929년 7월, 태버내클 합창단은 영적인 음악과 메시지를 방송하는 주례 방송 프로그램인 음악과 진리의 말씀을 첫 방송했다. 이 프로그램은 현재까지 계속해서 매주 방송되고 있다. 그랜트 회장은 1945년 5월 14일에 서거하였다. 교회 회장으로 봉사했던 그의 27년은 브리감 영 회장의 봉사 기간을 제외하고는 가장 긴 기간이었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 회장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히버 제이 그랜트 회장의 뒤를 이어 교회의 회장이 되었다. 평생 복음 가운데 생활하면서 행복을 찾아온 스미스 회장은 다음과 같이 간증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모든 행복과 기쁨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분의 조언과 권고에 따름으로써 온 결과였습니다.”8

하나님의 계명과 교회 지도자의 권고에 순종하는 것은 스미스 회장의 가족에게 있어 몇 세대에 걸쳐 내려오는 의로움의 행동 양식이 되어 왔다. 그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사촌이며 브리감 영 회장의 보좌였던 그의 친할아버지 조지 에이 스미스의 이름을 물려 받았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의 아버지인 존 헨리 스미스는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의 보좌로서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했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33세 때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 부름 받았다. 1903년부터 1910년까지 아버지 존 헨리와 조지 앨버트는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함께 봉사했다. 이 경륜의 시대에 아버지와 아들이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함께 봉사했던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좋지 않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42년 동안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충실하게 봉사했다. 그는 남부 유타 지역에서 철로를 위한 측량 조사를 하던 중에 과도하게 햇빛에 노출되어 두 눈이 손상을 입어, 거의 장님에 가깝게 된 시력을 교정하는 수술을 했으나 실패했다. 봉사하던 시기에 가중되는 압박과 필요 사항으로 인해 그의 약한 몸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급기야 1909년에 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완전한 휴식을 요하는 의사의 처방이 나온 뒤 그는 자신감을 잃었고,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까지 갖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건강이 더욱더 악화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스미스 회장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는 꿈속에서 큰 호수 가에 있는 아름다운 숲을 보았다. 숲을 지나 얼마 동안 걷고 있던 중에,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할아버지 조지 에이 스미스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조지는 할아버지에게로 서둘러 가려 했으나, 벌써 그의 할아버지가 그의 곁에 와 서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다. “나는 네가 나의 이름으로 어떠한 일을 행하였는지 알고 싶구나.” 조지의 마음속에 그의 지난 생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으며, 그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할아버지께 부끄러울 만한 일을 결코 한 적이 없습니다.” 이 꿈은 조지의 영과 육체에 새로운 힘을 주었으며, 그는 곧 다시 일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후에 그는 종종 그의 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9

조지 앨버트 스미스 회장이 봉사하는 동안, 1945년부터 1951년까지 교회 회원 수가 백만에 도달했으며, 아이다호 폴스에 성전이 헌납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선교 사업이 다시 계속되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궁핍하게 된 유럽의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한 노력들이 점차 조직화되었다. 교회는 미국에 있는 교회 회원들에게 의류품과 다른 생필품들을 기부하도록 권고하였다. 스미스 회장은 수집한 음식과 의류와 침구류를 유럽에 보내는 데 승인을 받기 위하여 당시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었던 해리 에스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다. 스미스 회장은 그 모임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말했다. “‘왜 회장님은 그 곳에 구호 물자를 보내려고 하십니까? 그들의 화폐는 이제 별로 가치가 없는데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그들의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나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회장님의 말씀은 그것을 그들에게 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우리는 줄 것입니다. 그들은 비탄에 잠겨있는 우리들의 형제들이요 자매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잉여물의 축복을 주셨고, 우리는 정부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보낼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회장님이 옳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을 돕겠습니다.’”10

기부된 물자들이 해외로 발송되기 위해 유타에서 분류되고 포장되는 동안, 스미스 회장이 준비 사항을 점검하기 위해 왔다. 후하게 기부된 많은 양의 생필품들을 본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몇 분 후 그는 입고 있던 새 오버 코트를 벗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것도 보내십시오.” 함께 있던 몇몇 사람들이 추운 겨울 날씨에 그 코트가 필요할 것이라고 만류했지만, 그는 기어코 그것을 보내게 했다.11

십이사도 정원회의 에즈라 태프트 벤슨 장로가 유럽 선교부를 재개설하고, 구호 물자가 잘 분배되는지 살펴보며 성도들의 영적인 필요 사항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임무를 지명 받았다. 벤슨 장로는 초기에 라인 강변에 위치한 독일의 칼스루헤라는 도시에 있는 성도들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벤슨 장로는 그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마침내 모임 장소로 가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 곳은 한 블록 안에 위치해 있었으며, 폭격으로 일부가 파손된 건물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그 모임에 함께 할 것이라는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에, 성도들은 우리가 오기를 바라며 그 모임에서 두 시간 동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저희들이 단상으로 걸어 올라갔을 때, 저는 제 생애에서 처음으로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6년 내지 7년만에 마침내 그들이 시온의 대표자라고 부르는 분들이 그들을 다시 방문했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입니다. 야위고 창백한 얼굴을 한 대부분의 성도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으며, 신발조차 신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저는 이 위대한 말일의 사업에 대해서 간증하고, 주님께 자신이 받은 축복에 감사하는 그들의 눈에서 신앙의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12

벤슨 회장이 맡은 많은 임무 중에는 특히 유럽 전역으로 갈 화물차 127량 분량의 식품, 의류, 그리고 의약품의 분배를 감독하는 임무가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나고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이 독일 츠비카우의 새로운 예배당을 헌납하고 있었을 때, 나이가 지긋한 한 형제가 눈물을 흘리며 몬슨 회장에게 다가와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이 자신을 기억하기를 바란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 분에게 가시면 그 분이 미국 교회 회원들이 모은 식품과 의복 등을 가져오셨기 때문에, 저의 생명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많은 형제 자매들이 생명을 구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13

네덜란드의 성도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던 독일 성도들에게 기독교적인 봉사를 베풀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네덜란드 성도들은 전쟁 중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 후에 미국 교회의 회원들에게서 복지 지원을 받았었다. 1947년 봄, 그들은 그들 자신의 복지 프로젝트를 실시하도록 요청 받았으며, 그들은 그러한 복지 프로젝트를 열정을 가지고 행하였다. 그들은 먼저 감자를 심었으며 큰 수확을 기대하였다.

이 시기에, 구 동독 선교부의 월터 스토버 선교부장이 네덜란드로 가서 눈물을 흘리며 황폐하고 굶주림에 처해 있는 독일 성도들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네덜란드 선교부의 코넬리우스 재페이 선교부장은 회원들에게 전쟁 기간 동안 그들의 적군이었던 독일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재배한 감자를 나누어 줄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성도들은 기꺼이 동의했으며, 그들의 감자 수확이 크게 늘어나기를 기대했다. 추수는 기대한 것 이상으로 좋았으며, 네덜란드 성도들은 75톤의 감자를 독일에 있는 그들의 형제 자매들에게 보낼 수 있었다. 일년 후에 네덜란드 성도들은 90톤의 감자와 9톤의 훈제 청어를 독일 성도들에게 보냈다.14

성도들이 보여 준 그리스도적인 사랑의 표현은 조지 앨버트 스미스 회장에게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을 널리 밝혀 나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형제 자매 여러분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의 행위에 의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감사함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15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

데이비드 오 맥케이는 조지 앨버트 스미스 회장의 보좌로서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했다. 1951년 봄, 스미스 회장의 건강이 다소 호전되었을 때, 맥케이 회장과 그의 아내 에머 래 자매는 그 동안 연기해 왔던 캘리포니아에서의 휴가를 위해 솔트레이크를 떠나기로 계획했다. 그들은 하룻밤을 묵기 위해 유타 주 세인트 조지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 일찍 맥케이 회장이 일어났을 때, 그는 교회 본부로 돌아가야 한다는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솔트레이크로 돌아온 지 며칠 후에 스미스 회장은 뇌일혈로 쓰러졌으며, 이로 인해 1951년 4월 4일 세상을 떠났다.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은 교회의 제9대 회장이 되었다.

맥케이 회장은 교회를 인도하기 위해 이전부터 잘 준비해 왔다. 그가 여덟 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영국으로 선교사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그의 두 누나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어머니가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농장 일이 데이비드의 어머니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맥케이 형제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내가 선교 사업을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그러자 맥케이 자매는 그의 남편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제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어요. 데이비드와 제가 모든 일을 잘 꾸려 갈 거예요!”16 그의 부모의 신앙과 헌신은 어린 데이비드의 마음속에 그의 전생애를 통해서 주님께 봉사하고자 하는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32세가 되던 1906년 그는 십이사도 평의회의 일원으로 부름 받았으며, 교회 회장이 되기 전 45년 동안 십이사도 평의회와 히버 제이 그랜트 회장과 조지 앨버트 스미스 회장의 보좌로서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했다.

맥케이 회장은 전세계에 걸친 교회 회원들을 방문하기 위해 광범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영국과 유럽, 남아프리카, 남미, 남태평양 및 기타 지역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했다. 유럽에 있는 동안, 그는 런던과 스위스에 있는 성전 건축에 관한 준비를 하였다. 제일회장단에서의 봉사가 끝나기 전에, 그는 교회 회원들에게 축복과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거의 전세계 모든 곳을 방문했다.

맥케이 회장은 모든 성도들에게 매해 최소한 한 명의 새로운 회원을 교회로 데려 오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격려하면서 선교 사업에 대해 재차 강조했다. 그는 “모든 회원은 선교사입니다.”라는 권고의 말씀을 반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1952년, 복음 선교 사업의 효율을 증대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공식적인 전도 계획이 처음으로 전세계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보내졌다. 그 계획은 “복음을 가르치기 위한 체계적인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것에는 영으로써의 가르침이 강조되었고 하나님의 특징, 구원의 계획, 배도와 회복 및 몰몬경의 중요성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는 일곱 가지 선교사 토론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개종한 사람들의 숫자는 놀라운 속도로 증가되었다. 1961년 교회 지도자들은 모든 선교 부장들을 위한 첫번째 세미나를 가졌는데, 선교부장들은 가족 회원들이 친구나 이웃과 우정 증진을 한 다음 그들을 자신의 집에서 선교사와 공부하게 할 수 있게 하도록 가족 회원들을 격려하라는 가르침 받았다.

맥케이 회장이 봉사하던 기간 동안, 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교회 회원들에 의해 아시아에서의 성장을 위한 씨앗들이 심어졌다. 한국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던 유타 주 아메리칸 포크 출신의 한 사병은, 일단의 미군 병사들이 자신들이 조그만 길을 지나가는 동안 한국 민간인들을 옆으로 비켜서게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젊은 교회 회원은 그와 반대로, 길을 비켜서서 한국인들이 그 길을 지나가도록 해주었다. 그는 또한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들의 곁을 지나갈 때 그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어느 날 그는 친구 다섯 명과 함께 영내에 있는 식당에 갔다. 음식을 기다리는 줄이 매우 길었기 때문에, 그는 식탁에 앉아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한 한국인 노무자가 음식이 든 식판을 들고 그에게 나타났다. 그는 막대기가 하나뿐인 그의 팔의 계급장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저는 단지 사병에 불과합니다.” 그러자 그 한국인이 대답했다. “받아주십시오. 당신은 최고의 기독교인입니다.”17

1967년까지 선교사들과 군인 형제들이 한국에서 복음을 매우 효과적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몰몬경이 한국어로 번역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그 땅에 스테이크와 와드가 조직되었다.

선교사들은 또한 일본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 성도들은 몇 년 동안 교회의 대표자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전쟁 후에 일본에 주둔했던 후기성도 군인 형제들은 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1945년, 타추이 사토는 홍차를 정중히 거절했던 후기성도 군인 형제들에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그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침례 받게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그의 가족들도 침례의 물가로 인도되었다. 엘리옷 리차즈가 타추이 사토 형제에게 침례를 주었으며, 당시에는 군인이었으나 나중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원이 된 보이드 케이 패커 형제가 사토 자매를 침례했다. 사토 형제의 가정은 많은 일본인들이 회복된 복음의 메시지를 처음으로 들었던 장소로 쓰였다. 얼마 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인들과 대항하여 싸웠던 후기성도 선교사들이 선교 사업을 행하기 위해 일본의 여러 도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필리핀에서의 교회 성장도 마찬가지로 2차 세계 대전 후에 주둔했던 미국인 군인 형제들의 노력이 컸는데, 1961년부터 교회가 매우 급속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교회 회원이 아니었던 한 젊은 필리핀 여성은 몰몬경에 대해 듣게 되었으며, 몇 명의 후기성도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녀는 자기와 잘 알고 지내던 정부 관리들을 만나야 한다는 강한 느낌이 들어 그들에게 필리핀에 후기성도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에 대한 승인이 내려졌으며, 몇 개월 후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고든 비 힝클리 장로가 선교 사업을 위해 그 땅을 재헌납했다.

1950년대 동안 교회의 극적인 성장의 결과, 맥케이 회장은 신권 협의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해롤드 비 리 장로를 위원장으로 한 이 위원회는 교회의 프로그램들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에 적합한지 알아보기 위해 그 프로그램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철저하게 연구하도록 임무 지명을 받았다. 1961년 제일회장단의 승인에 따라 리 장로는 모든 교회 교과 과정 자료의 계획, 저술 및 시행을 관리할 정책들이 개발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미 많은 자료들도 이전에 교회 보조 조직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이러한 새로운 지시가 내려진 것은 복음이 전세계에 있는 언어와 연령이 다른 모든 회원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가르쳐지기 위해 프로그램과 공과 자료의 불필요한 중복을 피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교회는 또한 교회의 사명을 보다 잘 수행하기 위해 복지 사업, 선교 사업 및 가족 역사 사업 등이 포함된 모든 프로그램과 활동들을 더욱 더 효과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다른 변화들을 가져왔다. 조셉 스미스 시대부터 교회의 중요한 사업 중 하나였던 가정 복음 교육이 영적, 물질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교회 회원들을 돌보기 위한 방법으로 1960년대에 재차 강조되었다.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집회소 도서실이 설립되었고, 교사 훈련 프로그램이 또한 시작되었다. 1971년 교회는 총관리 역원의 감독 하에 어린이를 위한 프렌드, 청소년을 위한 뉴이라 그리고 성인을 위한 엔사인 등 세 개의 영어 판 잡지를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교회는 여러 선교부마다 독립적으로 발행해 왔던 외국어 판 잡지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지금은 한 종류의 잡지가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지고 있다.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은 행복의 근원과 현대 생활의 시련과 유혹에 맞설 가장 확실한 방패로서 가정과 가족 생활의 중요성을 오랫동안 강조해 왔다. 그는 종종 그가 자신의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의 아내 에머 래 자매로부터 받은 끊임없는 내조에 대해 이야기했다. 맥케이 회장은 봉사 기간 동안에 부모가 그들의 자녀들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고 자녀들에게 복음의 원리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매주 월요일 저녁에 갖는 가정의 밤을 시행하는 문제를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상호부조회는 가정과 가족의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선지자를 지지했다. 나부에서 처음 창립되었을 때부터, 상호부조회는 수천 명의 회원들을 포함하여 크게 발전해 왔다.이 여성들은 상호부조회를 통해 받는 가르침과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로 인해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가족과 더불어 축복을 받았다. 1945년부터 1975년까지 벨 에스 스패포드 자매가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봉사했다. 유능한 지도자인 스패포드 회장은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미국 여성 평의회 회장으로 봉사하는 동안 전국적으로 인정을 받기도 했다.

맥케이 회장은 1970년 1월에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거의 20년간 교회를 관리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교회 회원 수가 거의 3배로 증가했고 전세계에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Notes

1. 서지 에프 밸리프, 대회 보고, 1920년 10월, 90쪽에서 인용

2. 제임스 알 클라크 편,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제일회장단 메시지, 6권 (1965~1975년), 4:222

3. “편집자란”, 임프르브먼트 이라, 1936년 11월, 692

4. 제일회장단, 대회 보고, 1936년 10월, 3쪽

5. 제이 루벤 클라크 이세, 스테이크 부장 특별 모임, 1936년 10월 2일

6. 더 자세한 내용은 글렌 엘 러드, 참된 종교: 1930년 이후의 교회 복지에 관한 이야기(1995년) 참조

7. 빈센초 디 프란체스카, “책을 불태우지 않으렵니다!” 엔사인, 1988년 1월호, 18쪽

8. 조지 앨버트 스미스, 대회 보고, 1948년 4월, 162쪽

9. 조지 앨버트 스미스, 다른 사람들과 복음을 나눔, 프레스튼 니블리, (1948년), 110~112쪽

10. 조지 앨버트 스미스, 대회 보고, 1947년 10월, 5~6쪽

11. 글렌 엘 러드, 참된 종교, 248쪽 참조

12. 에즈라 태프트 벤슨, 대회 보고, 1947년 4월, 154쪽

13. 게리 애반트, “전쟁은 분리시키고, 복음은 화합시킴,” 처치 뉴스, 1995년 8월 19일, 5쪽 인용

14. 더 자세한 내용은 글렌 엘 러드, 참된 종교, 254~261 참조

15. 조지 앨버트 스미스, 대회 보고, 1949년 4월, 10쪽

16. 르웰린 알 맥케이,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의 가정 회상 (1956년), 5~6쪽에서 인용

17. 조지 더런트, “제일의 기독교인,” 임프르브먼트 이라, 1968년 11월호, 82~84쪽

 

 


세계적인 교회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93세가 다 된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이 교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는 조셉 에프 스미스 전 교회 회장의 아들이었다.

소년 시절, 조셉 필딩 스미스는 주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여, 열 살이 되기 전에 몰몬경을 두 번이나 읽었으며, 걸어다닐 때도 경전을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다. 무도회장에서도 그가 보이지 않으면, 친구들은 건초 저장 창고에서 경전을 읽고 있는 그를 찾아내곤 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어렸을 적을 돌이켜 보면, 처음으로 글을 읽을 수 있었을 때부터, 이 세상의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경전을 연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 관한 글을 읽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루어진 사업을 알아보는 데서 더욱 큰 기쁨과 만족을 느꼈습니다.”1

이처럼 어려서부터 연구한 덕분에 경전과 교회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쌓게 되었으며, 이는 그의 말씀과 거의 스물 네 권이나 되는 저서와 교리를 주제로 한 수많은 중요한 기사의 토대가 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중에, 아시아(일본 동경)와 아프리카(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첫번째 스테이크가 조직되었다. 교회 회원 수가 늘어나자, 스미스 회장과 그의 보좌들은 전세계적으로 지역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지역 대회를 여는 관례를 시작하여 회원들이 총관리 역원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그러한 대회가 열린 곳은 영국의 맨체스타였다. 전세계 사람들에게 더욱 훌륭하게 봉사하기 위해, 보건 담당 선교사들이 부름을 받아 기본적인 건강 원리와 위생 설비를 가르쳤다. 이내 많은 나라에서 200명 이상의 보건 선교사들이 봉사하게 되었다.

1912년 이래, 교회에서는 미국 서부 지역에서 고등학교에 인접한 건물에서 열리는 세미나리 공과를 후원했다. 1920년대에는, 후기성도가 많이 다니는 단과 및 종합 대학에서 신학 연구원 과정이 시작되었다. 1950년대에는, 세미나리 새벽반 공과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스에서 시작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1,8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다니게 되었다. 이 사실을 목격한 비회원들은 15~18세의 후기성도들이 종교 학습반에 다니기 위해 일주일에 닷새를 새벽 다섯시 반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1970년대 초에, 가정 학습 세미나리 프로그램이 소개되어 전세계의 후기성도 학생들은 종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스미스 회장의 관리 기간 동안, 세미나리와 대학부 등록수는 극적으로 증가되었다.

1972년 4월 연차 대회에서, 스미스 회장은 마지막으로 행한 대중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에는 세상의 온갖 폐악을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평화를 희망하며, 현실적 영적인 번영과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원히 거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회복된 복음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어느 누가 하고 있는 일이라도 복음을 전파하고 지상에 교회와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2

교회의 회장으로 이년 반 동안 봉사한 후에,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은 그의 딸 집에서 95세를 일기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평생을 담대하게 주님께 봉사했다.

 

해롤드 비 리 회장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날, 십이사도 정원회의 선임 회원인 해롤드 비 리 회장의 가족은 가정의 밤 시간을 가졌다. 가족 중에서 누군가 그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되겠는지 물었다. “참되게 신앙을 지켜라.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친 대로 복음에 따라 살거라.”하고 그는 대답했다. 그 메시지는 모든 교회 회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교회 회장으로서 가진 첫 기자 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이러한 험난한 시대에 개인과 나라의 구원은 그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3

해롤드 비 리 장로는 1972년 7월 7일에 73세의 나이로 교회의 회장이 됨으로써 히버 제이 그랜트 회장 이후 최연소로 회장이 된 사도가 되었다. 그는 교회 복지 프로그램(109쪽 참조)을 지도하라는 부름을 받은 1935년 이래로 교회의 행정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그는 또한 교회 프로그램의 단일화와 상호 관련화를 유도한 교회의 프로그램과 교과 과정 검토 작업에서 막중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하늘로부터 받은 영감에 신속히 대응하는 깊은 영성의 소유자였다.

리 회장과 그의 보좌들은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두 번째 지역 대회를 관장했다. 이 대회에 모인 교회 회원들은 후기성도들 가운데 새로운 제일회장단을 가장 먼저 지지한 성도들이 되었다. 리 회장은 모임이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것은 “교회를 놀랍게 성장시키는 데 도구가 되어온… 많은 사람들의 훌륭한 노고를 인식하고 치하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에 사는 성도들에게 멕시코시티에서 지역 대회가 열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느 자매는 집집마다 다니며 빨래를 해주겠다고 했다. 다섯달 동안 그녀는 이웃의 옷을 빨아 주고 돈을 모아 대회장에 갈 수 있었으며 모든 모임에 참석했다. 많은 성도들은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저축했으나 음식을 살 돈이 없어 대회 기간 동안 기꺼이 금식을 하기도 했다. 그처럼 희생을 치룬 성도들은 거대한 영적인 힘을 보상으로 받았다. 어느 회원은 대회가 “내 생애에서 가장 훌륭한 경험”이 되었다고 말했다.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서 대회 기간 동안에 느꼈던 사랑을 잊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4

리 회장은 재임 기간 중에 성지(팔레스타인 지역)를 방문했는데, 이 경륜의 시대에 교회 회장 자격으로 그 곳을 방문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또한 비교적 소규모의 성전들이 곧 건립될 것이며 장차 온 세상에 성전들이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73년의 성탄절 다음날, 리 회장은 교회 회장으로서 18개월 정도밖에 봉사하지 못하고 별세했다. 영적인 거인이 그의 영원한 처소로 돌아간 것이다.

 

스펜서 더블류 킴볼 회장

리 회장이 서거한 후에 십이사도 선임 회원이었으며,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익히 알고 있던 스펜서 더블류 킴볼 장로가 교회의 회장으로 지지 받았다. 그의 성대는 암으로 인해 대부분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나지막하면서도 쉰 음성으로 말을 해야 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 음성을 좋아했다. 겸손과 헌신, 업무 추진 능력 및 “행하라”라는 자신의 슬로건으로 잘 알려진, 킴볼 회장은 전력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다.

스펜서 더블류 킴볼 회장은 회장으로서의 첫 말씀을 교회의 지역 대표들에게 했는데, 참석한 모든 이의 가슴에 깊이 각인될 만한 말씀이었다. 그 모임의 한 참석자는 말씀이 시작된 직후의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영적인 임재하심에 놀랐습니다. 무언가 범상치 않은, 강력하고, 다른 차원의 것을 듣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 그것은 마치 그분이 전능자의 목적을 가리운 장막을 거두어 내는 것 같았으며 그분과 더불어 우리에게도 복음의 운명과 성역의 시현을 보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킴볼 회장은 지도자들에게 “[교회 회원들이]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만큼 충실하게 생활해 오지 못했으나, 어떤 면에서 우리는 처해진 상황에 만족해 하며 자족감을 느껴왔다”는 점을 지적한 뒤, 바로 그런 때에 지금은 유명한 슬로건이 된 ‘걸음의 폭을 넓히십시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는 청중들에게 지상의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도록 권고했다. 그는 또한 각자 자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선교사들의 수를 대폭 증가시켰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은 설교를 마치면서, “참으로, 여기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계십니다”라고 선언했다.5

킴볼 회장의 적극적인 지도력 하에서, 더 많은 회원들이 복음 선교사로 봉사했으며, 교회는 온 세상을 향해 함차게 뻗어 나갔다. 1977년 8월에 킴볼 회장은 바르샤바로 여행을 하던 중에 폴란드 땅을 헌납하고 주님의 사업이 전진해 나갈 수 있도록 그 백성들을 축복했다. 선교사 훈련원이 브라질과 칠레, 멕시코, 뉴질랜드 및 일본에 세워졌다. 1978년 6월에 그는 전세계적으로 선교 사업에 크게 힘써야 한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발표했다. 오랜 세월 동안 아프리카인의 후예들에게는 신권이 거부되었으나, 이제 신권과 성전 축복은 모든 합당한 남성 회원들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이 계시는 전세계의 모든 충실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바라온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첫 흑인인 윌리엄 폴 대니얼스는 1913년 초에 교회를 알게 되었다. 그는 유타로 여행하여,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으로부터 특별한 축복을 받았다. 스미스 회장은 충실하게 생활한다면, 이 생에서나 다음 생에서 신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약속한 적이 있었다. 대니얼스 형제는 충실한 교회 회원으로 생활하다가 1936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1978년에 신권에 관한 계시가 있고 난 후 그의 딸이 아버지를 위해 성전 의식을 받았다.6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서적이나 기적적인 체험을 통해 복음이 참되다는 간증을 키워나갔으나, 복음의 모든 축복을 누릴 수는 없었다.

1978년 6월 계시가 있기 전 여러 달 동안, 킴볼 회장은 그의 보좌들과 십이 사도들과 아프리카인의 후예들에게 신권의 권능이 거부되는 것에 관해 논의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복음의 온전한 축복이 합당한 교회 회원들에게 부여될 수 없는 세계의 여러 지역에 선교부를 개설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서, 킴볼 회장은 이렇게 말씀했다. “저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저는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극히 중요한 어떤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우리가 주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합당해야 하고, 그러한 계시를 받을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계시를 받으면 훌륭하게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매일같이 저는 혼자서 참으로 순연한 마음으로 성전의 다락방으로 올라가, 제 온 영혼을 다하여 그리고 온 힘을 다하여 그 문제를 기도드렸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주님께 그 문제를 말씀드리고 ‘주님, 저는 옳은 일만을 하기를 원하나이다.’하고 말씀드렸습니다.”7

킴볼 회장은 그의 보좌 및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들과 함께 성전에서 특별 모임을 갖고, 흑인 남자들에게 신권을 부여하는 것에 관해 기탄없이 의견을 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제단 주위에 무릎을 꿇고 킴볼 회장이 소리내어 기도드렸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브르스 알 맥콩키 장로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그때에, 끊임없는 간구와 깊은 신앙으로, 때가 되고 시간이 이르렀으므로, 주님은 그 누구도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기이한 방법으로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에게 성신을 부으셨습니다.”8 모든 합당한 남자는 신권의 충만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때가 되었음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밝혀지게 된 것이다.

제일회장단은 1978년 6월 8일자로 신권 지도자들에게 주님께서 “교회의 합당한 모든 남자 회원은 인종이나 피부색에 관계없이 신권에 성임될 수 있다”고 계시하셨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1978년 9월 30일에, 연차 대회에 모인 성도들은 지도자들이 취한 조치를 만장 일치로 지지했다. 이 서한은 교리와 성약에 선언문 2로 나와 있다.

이러한 발표가 있은 이후로, 수많은 이프리카인 후예들이 교회로 들어 왔다. 아프리카에서 어느 개종자가 경험한 것은 주님이 이 백성들을 얼마나 축복하시는가를 잘 대변해 준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고 있던 그 형제는 첨탑인듯도 싶고 탑인 듯도 싶은 것이 달린 큰 건물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후에 그는 여행을 하다가, 후기성도 예배당을 보고는 이 교회가 그의 꿈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느껴, 그 교회의 일요 예배에 참석했다. 모임이 끝난 후에, 선교부장의 부인이 그에게 소책자를 보여 주었다. 그것을 펼쳐본 그는 솔트레이크 성전 사진을 보았는데, 그 성전은 바로 꿈에서 본 건물이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울고 있었습니다.… 그 느낌은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자신이 모든 구속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전부터 자주 다니던 곳에 간 기분이었습니다. 이제야 집에 돌아온 것입니다.”9

킴볼 회장의 재임 기간 동안, 칠십인 제일 정원회가 재조직되었으며, 세 시간으로 통합된 일요일 모임 일정이 시행되었고, 성전이 빠른 속도로 건립되었다. 1982년 당시, 전세계적으로 22곳의 성전이 설계 또는 착공 단계에 있었는데, 그때까지의 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수였다. 또한 킴볼 회장은 쉴 새 없는 여행 계획을 세워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지역 대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모임에서,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돌보지 않은 채 가능한 한 빠짐없이 각 지역의 성도들을 만나 힘을 북돋워 주고 축복해 주는 기회를 가졌다.

많은 나라의 교회 회원들이 성전에서 베풀어지는 성스런 구원의 의식을 받기를 열망했다. 그중에는 여러 선교부에서 봉사하고 선교부장으로 일한 바 있는 스웨덴 출신의 한 후기성도도 있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재산의 상당 부분을 스웨덴 성전 기금에 헌납했는데, 그것은 교회에서 그 나라에 성전에 건립되리라는 것을 발표하기 오래 전의 일이었다. 킴볼 회장이 성전 건립을 발표했을 때, 그가 헌납한 기금에 이자가 발생하여 상당한 액수가 되었다. 성전이 헌납된 직후, 생전에 엔다우먼트를 받았던 이 충실한 형제는 돈을 바쳐서 성전 건립에 도움을 주었던 바로 그 성전에서 그의 부모에게 인봉되었다.

싱가포르의 어느 부부는 가족을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인봉을 받고 성전 축복을 받기로 결심하고,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끝에, 성전에 갈 수 있었다. 그들은 예전에 그들을 가르쳐 주었던 선교사의 집에 머물렀다. 식품점에 들른 동안 그 자매는 남편과 선교사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들이 그녀를 찾았을 때, 그녀는 샴푸병 하나를 들고 울고 있었다. 그녀는 성전에 가기 위해 무려 7년 간을 샴푸 한번 써보지 못한 희생까지 한 것이 슬퍼서 울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주님의 집에서 의식을 받음으로써 가족이 함께 영원히 결합하게 된 것을 알게 된 지금, 자신의 희생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리 크지도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킴볼 회장의 재임 기간 동안인 1979년에도 또 하나의 큰 발전이 있었다. 교회가 새로운 영어판 흠정역 성경을 발행한 것이다. 본문은 변함이 없었으나, 성경을 공부할 때 몰몬경과 교리와 성약과 값진 진주를 전후 참조할 수 있도록 각주가 추가되었다. 대형 주제별 색인과 성경 사전이 현대의 경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되었다. 이 판에는 각 장마다 새로운 머리말이 들어갔으며 흠정역에 대한 조셉 스미스의 영감역에서 발췌한 것이 포함되었다.

1981년에는 몰몬경, 교리와 성약, 값진 진주를 새롭게 합본한 경전이 발행되었다. 여기에는 새로운 체계를 갖춘 각주와 장과 편에 대한 새로운 머리말, 지도 및 색인이 포함되었다. 이때 쯤 해서, 교회는 또한 다른 여러 나라 말로 말일의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킴볼 회장은 몸소 모범을 보이고 또한 가르침으로써 교회 회원들에게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 브리감 영 대학교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그는 “나는 이 대학과 교회 교육 기구에서 드라마, 문학, 조각, 미술, 과학 및 모든 학문 분야에서 눈부신 스타들이 나오게 되기를 소망하며 바랍니다.”10 하고 치사했다. 그는 또한 후기성도 화가들이 회복된 복음의 이야기를 강력하고도 설득력 있게 들려주기를 소망함을 피력한 적도 있었다.

킴볼 회장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봉사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그는 남북 아메리카의 원주민들과 폴리네시아 제도의 주민들에게 각별한 정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을 돕기 위한 각종 사업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조지 앨버트 스미스 회장으로부터 그들을 돌보라는 가르침을 받은 일도 있었으므로, 교회의 회장으로서 그는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원들에게 복음 전도를 위해 중남미의 여러 나라를 헌납 또는 재헌납하는 일을 맡겼다. 그 이후로 중남미 지역에서 수십만의 백성들이 복음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그의 인품을 그대로 나타내 주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혼잡한 비행장에서 날씨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던 한 젊은 아기 어머니가 두 살 난 딸과 함께 줄 뒤 쪽에 서서 목적지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임신 두 달째라 어린 아이를 안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어린 딸을 바닥에 내려 놓고 있었는데, 이 아이는 배고픔에 지쳐 울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선뜻 이들을 도와 주려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이를 울게 내버려 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조차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어떤 신사분이 우리에게 와서 친절한 어조로,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제의를 받아 들였습니다. 그는 차가운 공항 바닥에서 울고 있는 어린 딸아이를 안아 올려 포근히 감싸고 등을 토닥거려 주었습니다. 그는 딸 아이에게 껌을 씹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딸아이가 진정하자, 그는 아이를 그대로 안고서 제일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제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동의를 하는 듯이 보였으며, 그는 다시 앞에 있는 비행기표 확인대로 가서 직원에게 자초 지종을 설명하고 곧 떠나게 되어 있는 비행기 좌석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는 저를 의자로 데리고 가 제가 완전히 평정을 되찾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저는 스펜서 더블류 킴볼 사도의 사진을 보았는데, 그가 바로 비행장에서 처음 보았던 그 분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11

킴볼 회장은 운명하기 전 몇 달 동안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고통을 받았으나, 그는 고통속에서도 항상 인내와 오래 참음과 근면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는 교회의 회장으로 12년 동안 봉사하고 1985년 11월 5일에 별세했다.

 

Notes

1. 조셉 필딩 스미스, 대회 보고, 1930년 4월, 91쪽

2. 조셉 필딩 스미스, 대회 보고, 1972년 4월, 13쪽; 또는 엔사인, 1972년 7월호, 27쪽

3. 프랜시스 엠 기븐스, 해롤드 비 리(1993년), 459쪽

4. 제이 엠 토드, “놀라운 멕시코시티 지역 대회”, 엔사인, 1972년 11월, 89, 93, 95쪽

5. 더블류 그랜트 뱅거터, 대회 보고, 1977년 10월, 38~39쪽; 또는 엔사인, 1977년 11월호, 26~27쪽

6. 이 데일 르배런, “검은 아프리카”, 몰몬 유산, 1994년 3/4월호, 20쪽.

7. 스펜서 더블류 킴볼의 가르침, 에드워드 엘 킴볼(1982년), 451쪽

8. 브르스 알 맥콩키, “만인은 하나님에게 똑같습니다”, 종교 교육자의 책임, 2판 (1981년), 153쪽

9. 이 데일 르배런, “검은 아프리카”, 24쪽

10. 스펜서 더블류 킴볼, “브리감 영 대학의 제2세기”, 1975년 올해의 말씀, (1976년), 247쪽

11. 스펜서 더블류 킴볼, 에드워드 엘 킴볼 편, 앤드류 이 킴볼 이세, (1977년), 334쪽

 

 


현대의 교회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

스펜서 더블류 킴볼 회장이 서거한 후, 에즈라 태프트 벤슨 장로가 교회 회장이 되었다. 그는 재임 초기에 몰몬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다. 그는 “몰몬경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다 줍니다”라고 강조하고, 이 책이 “우리 종교의 종석이고, (인간이) 다른 어떠한 책보다도 이 책의 교훈 대로만 살아 간다면 하나님 앞으로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역설한 조셉 스미스의 말씀을 재확인했다.1

1986년 연차 대회에서, 벤슨 회장은 이렇게 말씀했다. “주님께서는 그의 종 로렌조 스노우에게 재정적인 구속으로부터 교회를 구원하기 위해 십일조의 원리를 재강조하라는 영감을 일깨우셨습니다.… 이제, 우리 시대에 주님은 몰몬경을 재강조해야 할 필요성을 계시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약속드리건대, 우리가 매일 그 책을 펴들고 그 계율에 따라 생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모든 자녀와 교회에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축복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2 전세계의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제의를 받아들여 약속된 축복을 받았다.

벤슨 회장은 교만을 피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1989년 4월 연차 대회에서, 그는 교회 회원들에게 니파이 민족이 멸망 당한 원인으로 “교만”을 꼽고 “교만을 정복하여 그릇의 안을 깨끗이”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교만의 해독제는 겸손, 곧 온유함과 순종”이라고 권고했다.3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은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 봉사하던 중에 복음 생활의 모범을 보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52년,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의 격려에 힘입어, 그는 미국의 드와이트 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농림 장관의 부름을 수락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이 미국 대통령의 각료로 일한 것은 교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8년 동안 그 자리에서 일하면서, 미국 정부의 농업 정책을 지도하며 수행해 나가는 전문적인 능력을 지닌 데다 고결한 인품까지 갖추어 국내외로부터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각국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전세계에 있는 교회의 대표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벤슨 회장의 지도 하에, 교회는 전세계적으로 중요한 면에서 발전했다. 1987년 8월 28일에, 그는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에서 프랑크푸르트 성전을 헌납했는데, 1964년에서 1965년까지 프랑크푸르트에 본부를 둔 유럽 선교부의 선교부장으로 봉사했던 그로서는 뜻깊은 특권이 되었던 셈이다.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에 있는 프라이버그 성전은 1985년 6월 29일에 헌납되었다. 이 헌납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성전 건축을 가능케 한 기적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68년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이었던 토마스 에스 몬슨 장로는 독일 민주 공화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 곳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명에 참되고 충실하게 생활하신다면, 다른 나라의 교회 회원들이 누리는 모든 축복을 여러분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975년에, 똑같이 이 나라를 지명 받고 방문한 몬슨 장로는 영감을 받아 주님에게 그 땅을 헌납하는 자리에서, “아버지시여, 이 시간이 이 땅에 있는 당신의 교회의 회원들에게 새로운 날의 시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는 “성전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 성도들의 진심어린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간구했다. 그의 영감에 찬 약속과 예언의 뜻이 담긴 헌납 기도 내용이 실현되었다.4

1989년 3월 마지막 날에, 후기성도 선교사들에게 독일 민주 공화국에 입국이 허락되었다. 1989년 11월 9일에, 많은 성도들의 신앙과 기도가 응답되어 동서 유럽에 놓여 있던 장벽이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개종자의 침례와 교회 건물의 건축이 증가되기 시작했다. 1990년 5월 1일에 독일 드레스덴에 새로 완성된 예배당의 일반 공개 때 방문해 보고 교회에 대하여 처음 알게 된 개종자가 있었다. 선교사와 공부를 하고 침례를 받은 지 1주일도 되지 않아, 그는 몰몬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 읽었으며, 복음의 진실성에 대한 강한 간증을 받았다.5

1991년 6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몰몬 태버내클 합창단의 연주회를 마친 후에 가진 연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부통령은 그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교회를 인정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로써 교회는 이 거대한 공화국 내에서 대중적 기반을 얻게 되었다. 1990년대에, 수많은 소비에트 연방 국가들과 중부 및 동부 유럽 제국들, 즉 알바니아, 아르메니아, 벨라루스,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헝가리,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등이 복음 전파를 위해 헌납되었다. 이들 국가에서 임대 또는 신축 교회 시설물이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충만한 복음의 간증을 얻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래로 폴란드에 처음으로 세워진 후기성도 집회소의 헌납식에서,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장로는 집회소가 “고통 받는 영혼들에게 평화의 대피소가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안식처”6가 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이 축복은 많은 나라에서 복음의 평화와 기쁨을 찾은 성도들의 생활에서 성취되고 있다.

교회의 회원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벤슨 회장이 선교 사업을 강조한 결과, 그의 임기 말에는 약 48,000명의 선교사들이 295개 교회 선교부에서 봉사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재임 기간 동안에, 교회 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전세계의 다른 종교를 믿는 회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원조를 더욱 늘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원조는 고통을 구제하고 장기적인 면에서 자립심을 키워주는 것이다. 많은 양의 식량, 의복, 의료품, 담요, 현금 및 기타 물품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으며, 보건 사업, 문맹 퇴치 교육 및 기타 봉사 업무를 펴는 장기적인 사업이 제공되었다. 이 자선 사업은 오늘 날 세계 여러 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시행되고 있다.

연로하여 병약해진 데다 사랑하는 아내 플로라를 잃고 상심한 벤슨 회장은 주님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담대하게 마치고 1994년 5월 30일에 94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뒤를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으로 봉사하던 하워드 더블류 헌터 장로가 승계했다.

 

하워드 더블류 헌터 회장

1994년 6월 6일, 회장으로 부름 받은 뒤 가진 첫번째 기자 회견에서, 하워드 더블류 헌터 회장은 그의 교회 관리와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주제를 발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모든 교회 회원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모범, 특히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소망과 자비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관심을 가지고 생활하시기를 권고드립니다.

“저는 우리가 서로 더욱 친절하고, 더욱 예의 바르고 더 겸손하고 인내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대하기를 간구합니다.”

그는 또한 교회의 회원들에게 촉구했다. “주님의 성전을 회원됨의 위대한 상징으로서 그리고 가장 성스러운 성약을 위한 거룩한 장소로 정하십시오. 내 마음속의 가장 깊은 바람은 교회의 모든 회원들이 성전에 가기에 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7 수많은 교회 회원들이 이러한 메시지를 그들의 생활에 실천하여 더욱 깊이 있는 영성으로 축복 받았다.

헌터 회장은 철저하게 발전할 수 있는 정신의 소유자였다. 이는 교회에 대해 대단히 소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그의 모든 기량을 요구하는 임무를 지명 받았다. 그는 성지에 교회에서 역점을 둔 브리감 영 대학교 예루살렘 근동 연구 센터를 설립할 대지를 구입하기 위해 협상하고 이 건물의 건축을 감독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센터는 감람산에서 뻗어나온 스코프스 산에 위치해 있다. 그 곳에는 이 선택 받은 땅과 그 백성들(유대인과 아랍인), 그리고 예수님과 고대의 선지자들이 걸었던 장소에 대하여 깊이 있게 연구하는 학생들이 거주하고 연구 활동을 하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센터는 그 안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으며, 건물의 아름다움은 그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헌터 회장은 또한 하와이 라이에에 있는 브리감 영 대학교-하와이 캠퍼스에 인접해 있는 폴리네시안 문화 센터의 개발에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그는 교회에서 소유하고 운영하는 이 문화 센터의 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 센터는 42에이커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로서 방문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이 문화 센터는 폴리네시아의 문화를 보전하고 학생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주고자 하는 취지에서 세워진 것이었다. 1963년에 세워진 이 아름다운 곳은 현재 매년 백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방문하여, 폴리네시아 제도의 음악과 춤과 미술품과 수공예품을 즐기고 있다.

헌터 장로는 교회 회장이 되기 전에, 현재의 가족 역사부의 전신인, 유타 계보 협회의 회장으로 8년 간 봉사했다. 이 시기에, 그 협회에서는 1969년에 개최된 기록에 대한 세계 대회를 후원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이 대회를 통해 “교회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좋아졌고 온 세계에 우리의 사업을 위한 문호가 열렸다”고 말했다.8 그는 산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크나큰 사랑을 보였으며, 우리 모두가 하나의 대가족에 속해 있다고 자주 가르쳤다. 그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을 지닌 사람으로 알려졌다.

헌터 회장은 일생 동안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는 신앙과 강인함으로, 위중한 건강상의 문제와 장기간의 만성 질병과 첫번째 부인과의 사별 및 기타 다른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견뎌내었다. 이러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극적으로 주님께 봉사했으며, 교회의 업무를 관장하며 수없이 여행하고 많은 일을 했다. 그의 모범은 다음과 같은 그의 메시지와 일치했다. “빗나간 자녀 때문에 가정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재정적인 곤란과 감정적인 긴장으로 가정과 행복이 위협당한다면, 생명이나 건강을 잃어야 하는 경우, 여러분 영혼에 평안이 있기를 빕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시험을 받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우회하는 길과 절망은 즐겨 부르는 찬송가와 같이 주님께 이르는 곧고 좁은 길입니다.”9

헌터 회장이 1994년 11월 11일에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서 교회의 2,000번째 스테이크의 창설을 관장한 것은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 곳에 모인 회중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은 그분의 종을 통하여 이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이 사업은 힘차고 활기 있게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 선조 리하이와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그들의 후손에 관한 약속은 멕시코에서 성취되었으며 계속되어 나갈 것입니다,”10 당시 헌터 회장은 총관리 역원으로 봉사하고 있었으며,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는 극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가 교회의 회장이 되었을 때, 멕시코, 브라질 및 칠레 등의 국가에는 150만명 이상의 후기성도들이 있었으며, 그것은 당시 유타에 살고 있던 교회 회원들보다 더 많은 수였다.

헌터 회장은 단 9개월 동안 교회 회장으로 봉사했으나, 그의 자비심과 오래 참음과 그리스도와 같은 생활을 하는 훌륭한 모범으로 그를 기억하는 성도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

헌터 회장이 운명한 다음 고든 비 힝클리 장로가 교회의 회장이 되었을 때, 그는 제일회장단의 중점 사항이 무엇이 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아가세!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앞서 사셨던 분들이 더욱 크게 이루셨던 위대한 사업들을 계속해 나아가자는 것에 역점을 둘 것입니다. 가족의 가치를 세우십시오. 그렇습니다. 교육에 온 힘을 모으십시오. 그렇습니다.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인내와 관용의 정신을 보이십시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십시오.”11

교회의 지도자로서 힝클리 회장이 광범위하게 경험을 쌓은 것은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하는 데 좋은 준비가 되었다. 그는 1961년에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으로 지지되었으며, 1981년부터는 스펜서 더블류 킴볼 회장,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 하워드 더블류 헌터 회장의 보좌로 봉사했다. 제일회장단 보좌로 봉사하는 동안에, 회장들이 연로하였기 때문에 그는 매우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젊은 시절에, 고든 비 힝클리 장로가 영국에서 선교 사업을 하고 있었을 때, 그가 받은 몇 가지 권고의 말씀은 어려운 책무를 수행해 나간 그 기간 동안에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다소 실망을 하고 있던 그는 부친에게, “저는 제 시간과 아버지의 돈을 축내고 있습니다. 제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편지를 올렸다. 얼마 후에 그는 아버지로부터 다음과 같은 짧은 서신을 받았다. “사랑하는 고든, 얼마 전에 네가 보낸 편지를 받아 보았다. 단 한 가지만 충고하마. 네 자신을 잊고 일하러 나가거라. 사랑을 전하며 아버지가.”

힝클리 회장은 그 당시의 일을 이렇게 말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위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가복음 8:35) 나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편지와 연결되어 그 말씀, 그 약속은 나를 이층으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내 자신을 잊어버리고 일하러 가겠노라고 주님과 성약을 맺게 했습니다. 제가 그 때 그러한 결심을 한 이후로 선한 모든 일이 제게 일어났습니다.”12

힝클리 회장은 항상 하나님과 미래를 믿는 불굴의 낙천가로 유명하다. “힝클리 회장은 ‘만사가 잘될 것입니다.’라는 말로 가족과 친구들과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고 되풀이해서 확신을 줍니다. 그 분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속 노력하십시오. 믿음을 가지십시오. 낙담하지 마십시오. 행복한 사람이 되십시오. 만사가 잘될 것입니다.’”13

어떤 기자가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당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요 또한 가장 훌륭한 문제는 성장에 따르는 문제입니다.” 그는 교회가 크게 성장함에 따라 더 많은 성전을 포함하여, 더 많은 건물이 필요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지금은 성전 건축에 있어서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입니다. 성전의 건축이 현재 진척되고 있는 추진력으로 시행되어 나갔던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47개의 성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설계부터 건축까지의 과정에 있는 성전은 13개입니다. 우리는 성전을 계속해서 지을 것입니다.”14 교회가 계속 성장해 감에 따라 몰몬경을 여러 나라 말로 번역할 필요성이 있었다.

힝클리 회장은 교회의 극적인 성장에 개인적으로 연관된 경험이 많다. 1967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했을 때, 그는 많은 젊은이들이 섞여 있는 청중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에게서 나는 일본 내의 교회의 미래를 봅니다. 위대한 미래를 봅니다. 우리는 겨우 시작 단계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느껴왔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이 위대한 나라에 시온의 스테이크가 설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15 한세대도 지나지 않아, 일본에는 100,000여 명의 후기성도와 수많은 스테이크와 선교부, 지방부 및 성전이 들어섰다.

힝클리 회장은 또한 필리핀에서의 교회 성장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1973년, 마닐라에 스테이크가 처음 세워졌다. 20년 후, 그가 교회의 회장이 되었을 때는 300,000명 이상의 필리핀 회원들이 복음의 축복을 받았으며, 그 나라에 성전도 들어섰다. 힝클리 회장은 한국과 중국 및 동남 아시아를 포함한 아시아 각국에서의 교회의 성장에도 큰 관심을 보여 왔다.

아시아에서 영성을 지닌 회원들이 얼마나 많은가는 필리핀의 어느 스테이크에서 새로운 스테이크 부장을 부르도록 지명 받은 한 총관리 역원의 경험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여러 명의 신권 소유자들을 접견하고 난 그는 이십 대 중반의 형제를 스테이크 부장으로 불러야겠다는 영감을 받았다. 그는 젊은 형제에게 옆방으로 가서 잠시 시간을 갖고 보좌들을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 형제는 30초만에 돌아 왔다. 총관리 역원은 그가 잘못 안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으나, 새로운 스테이크 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주님의 영을 통해서 제가 스테이크 부장이 되리라는 것을 한달 전에 알았습니다. 저는 이미 제 보좌들을 선택해 놓았습니다.”

전세계에 교회의 설립을 돕기 위해 그처럼 많은 일을 한 힝클리 회장이 그의 재임 기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통계 전문가들은 현재 추세가 계속된다면, 앞으로 몇 개월 남지 않은 1996년 2월에는 미국 밖의 회원들이 미국 안의 회원들보다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변화는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노력의 결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16

힝클리 회장이 교회 관리에 있어서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훌륭한 가정 생활의 중요성인데, 그것은 흔히 가족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지도하에,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평회회는 가족을 주제로 하여, 세상에 특별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가족은 하나님이 제정하여 주신 것이다. 남녀간의 결혼은 그의 영원한 계획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자녀들은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태어나 결혼 서약을 완전하고 성실하게 지키는 부모에게 양육 받을 권리가 있다. 가족 생활의 행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근거를 둘 때 가장 훌륭하게 성취될 수 있다.…

“우리는 순결에 관한 성약을 어기거나, 배우자나 자녀를 학대하거나, 가족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 책임지게 되리라는 것을 경고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가족이 붕괴할 때 개인과 지역 사회와 국가에 고대와 현대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재난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한다.”17

1995년 4월 연차 대회에서, 힝클리 회장은 훌륭하게 봉사한 교회의 지역 대표들이 1995년 8월 15일에 해임되고, 새로운 직분, 곧 지역 관리 역원이 신설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지역 관리 역원은 스테이크 대회를 감리하고, 스테이크를 재조직 또는 창설하며, 스테이크 부장, 선교부장 및 지방부장을 훈련시키는 책임을 맡는다. 이 새로운 직책은 교회 지도자들이 회원들과 더욱 가깝게 생활하면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전세계적으로 교회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일을 맡는다.

어느 총관리 역원은 어떻게 모든 성도들이 힝클리 회장을 가장 잘 보필할 수 있는지 설명했다. “선지자요, 선견자요, 계시자요, 관리 대제사이자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회장이라는 거룩한 직분에 부름 받은 그 분을 지지하기 위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일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아가세, 나아가세, 나아가세!’라고 말하며 중단하지 않고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18

 

Notes

1. 에즈라 태프트 벤슨, 증거와 경고(1988년), 3, 21쪽; 또한 교회사, 4:461 참조

2. 에즈라 태프트 벤슨, 대회 보고, 1986년 4월, 100쪽; 또는 “거룩한 책임”, 성도의 벗, 1986년 7월호

3. 에즈라 태프트 벤슨, 대회 보고, 1989년 4월, 601137; 또는 “교만을 조심하십시오”, 성도의 벗, 1989년 7월호

4. 토마스 에스 몬슨, 대회 보고, 1989년 4월, 66쪽; 또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성도의 벗, 1989년 7월호 또는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들”, 성도의 벗, 1986년 1월호

5. 개럴드 및 노마 데이비스, “벽이 무너짐”, 엔사인 1991년 6월호, 33쪽

6. 처치 뉴스, 1991년 6월 29일, 12쪽

7. 하워드 더블류 헌터, 처치 뉴스, 1994년 6월 11일, 14. “하워드 더블류 헌터 회장- 독수리의 자취”, 성도의 벗, 1994년 9월호

8. 일리어노 노울즈, 하워드 더블류 헌터(1994년), 193쪽

9. 하워드 더블류 헌터, 대회 보고, 1987년 10월, 71쪽; “문을 여는 것과 닫는 것”, 성도의 벗, 1988년 1월호, 62쪽

10. 처치 뉴스, 1994년 12월 17일, 3쪽

11. 처치 뉴스, 1995년 5월 18일, 10; “고든 비 힝클리 회장 - 굳세고 용감하게 서 계십니다”, 성도의 벗, 1995년 6월호, 특별 부록 2쪽

12. 고든 비 힝클리: 품위있는 분, 제15대 교회 회장, 비디오 카셋트 (1994년); “고든 비 힝클리 회장- 굳세고 용감하게 서 계십니다”, 성도의 벗, 1995년 6월호

13. 제프리 알 홀런드, “고든 비 힝클리 회장”, 엔사인 1995 6월호, 5쪽; “고든 비 힝클리 회장 - 굳세고 용감하게 서 계십니다”, 성도의 벗, 1995년 6월호, 특별 부록 2쪽

14. 처치 뉴스, 1995년 3월 18일, 10쪽.

15. 고든 비 힝클리, “말씀”, 시청각 자료 1801; 후기성도 교회 기록 보관소.

16. 고든 비 힝클리, 대회 보고, 1995년 10월, 92-93쪽, “그 길에 머무르십시오-신앙을 수호하십시오”, 성도의 벗, 1996년 1월호, 70쪽

17.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평의회, “가족: 세상에 전하는 선언문”, 성도의 벗, 1996년 6월호, 10쪽.

18. 제프리 알 홀런드, “고든 비 힝클리 회장”, 13쪽; “고든 비 힝클리 회장 - 굳세고 용감하게 서 계십니다” 성도의 벗, 1995년 6월호, 특별 부록 2쪽

 

 


결론

 

우리는 각기 교회 역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떤 회원들은 대대로 복음을 믿고 주님의 방식대로 자녀를 키운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하면, 처음으로 복음을 듣고 침례의 물에 들어가,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서 자신의 몫을 수행하기 위해 거룩한 성약을 맺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회원들이 교회가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은 지역에 살면서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신앙의 유산을 창조해 내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 여건에 처해 있든지, 시온을 건설하는 대업에서 중요한 부분을 맡아 구주의 재림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는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에베소서 2:19)이다.

새로운 회원이거나, 오래된 회원이거나,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 가신 분들로부터 신앙과 희생의 유산을 물려 받고 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자녀를 비롯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직 듣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현대의 개척자가 된다. 우리는 온 세상에서 주님의 사업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기여하고 있다.

부모는 그들의 자녀를 의의 원리 안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교육시킨다. 가정 복음 및 방문 교사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아 준다. 많은 가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인생의 귀중한 시기를 바칠 것을 선택한 자녀가 선교 사업을 떠난다. 헌신적인 신권 및 보조 조직 지도자들이 봉사하라는 부름을 기꺼이 받아 들인다. 수많은 시간을 말없이 봉사하여 조상의 이름을 찾아내고 거룩한 성전 의식을 수행하여 얻는 축복은 산 자와 죽은 자에게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다음과 같은 사명을 성취시켜 나가는 일을 돕고 있는 것이다.

“진리의 표준이 세워졌습니다. 어떠한 간악한 손도 이 사업이 나아가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박해가 들끓고 폭도들이 연합하여 군대가 모이고 중상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는 모든 대륙에 퍼질 때까지 담대하고 고결하고 굳세게 전진할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고 위대하신 여호와께서 사업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모든 나라를 찾아 가고 온 세상 모든 나라를 휩쓸며 모든 귀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1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생애 동안에는 교회가 매우 소규모였으나, 그는 교회가 지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왕국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로 온 세상을 가득 채울 운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최근에 교회가 극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아 왔다. 우리가 영원히 설 왕국인,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도록 우리의 신앙과 희생을 바칠 수 있는 시기에 산다는 것은 큰 특권이다.

 


우리의 유산, Our Heritage, 35448 320, 1996년 11월 31일 초판 발행,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