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약속"(주님의 성품을 배움),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여성대회, BYU, 2002년 5월 3일★]

소중한 약속
The Precious Promise

  그리스도의 굳건한 기초 위에 서려면 그분의 성품을 열심히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닐 에이 맥스웰 장로 (1926~2004)
   
십이사도 정원회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소중한 약속, 리아호나 2004 4월호, 10, (주님의 성품을 배움))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끌어내려져 쓰러질 때, 힐라맨의 말보다 더 적절한 권고와 약속을 상상하기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이신 우리 구속주의 반석 위에 너희가 너희의 기초를 세워야 함을 기억하고 기억하라. … 만일 사람들이 그 위에 세우면 결코 넘어지지 아니할 기초니라.”(힐라맨서 5:12) 위대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다른 모든 약속은 물론 이 귀한 언약도 이행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굳건한 기초 위에 서려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열심히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 그저 입술로만 찬양을 드리는 것은 아무런 기쁨이나 보장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을 열심히 배우는 것이 열쇠이며, 드러날 우리의 성품이 우리 영혼의 정제된 구조물입니다. 모든 부수적인 가설 구조물을 걷어 내고 나면, 남는 것은 성품입니다.

 

성품 형성의 과정

성품 형성의 중요한 과정에서 강조되어야 할 모든 특성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한 특성을 개발한다면 또다른 특성의 개발이 촉진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각 이상으로 그것을 잘 해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음 말씀에서 영적인 전후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마서 5:3~4) 그리고 소망은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옵니다. 만일 여러분과 제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을 무엇이든 겸손하게 받아들인다면, 이 역경은 나중에 훨씬 더 큰“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고린도후서 4:17)으로 우리를 인도해 줄 것입니다.

따라서“이 생에서 우리가 얻은 예지[는] … 부활할 때에 우리와 함께 일어[날]”(교리와 성약 130:18) 것입니다. 예지에 대한 복음의 정의는 형식적인 지능 지수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지는 영혼의 완전성을 의미하며“신성한 성품”(베드로후서 1:4)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부지런하다면, 생활 속에서 신앙, 인내, 경건, 친절,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개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들은 또한“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베드로후서 1:8)의 열매를 풍족하게 맺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다운 성품을 개발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 아버지 [사업]에”진실되게 참여할 자격을 갖게 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일은 표면적으로 평범해 보이는 일상 생활을 통해 매일 아버지의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죽음의 장막을 통해 우리가 가져가야 하며 부활 때에 우리와 함께 부활할 썩지 않을 것들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리스도를 그 모든 것의 중심으로 보지 못함으로써“푯대를 지나[쳤]”다고 기록했고, 그리하여 사람들의 눈이 어두워지고 산만해져 “넘어지지 아니할 수 없[다]”(야곱서 4:14)는 불길한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구세주를 무시하는 태도에는 우리 스스로가 좀더 반석같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다운 성품을 개발하지 못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물론, 복음과 교회로의 개종은 갑작스러운 인식과 성신의 증거를 통해 한 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를 들어 인내와 같은 품성을 한층 더 개발하기 위한 뒤이은 가르침은 시간을 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인내란“그 즉시”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설명하려는 성품 형성의 소중한 과정을 세상이 이해하거나 도와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자비롭게도, 영의 속삭임은 거의 개인적인 과정을 통해 길을 따라가도록 가볍게 토닥거립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강해져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도 강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빌론에서 이민자들이 이주해 올 것이며, 심지어“크고 넓은 건물”(니파이전서 8:26)에서 떠날 자들도 생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성품의 실례들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한 몇 가지 실례는 이미 양심적인 사람들에게까지도 따라야 할 길을 명확히 보여 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으로 보듯, 다른 모든 것 역시 그분의 빛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무신론자들이 어떻게 말하거나 생각하든지 간에 실질적인 현실주의자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는 달리, 여러분과 저는 흔히 혼란에 빠집니다. 예기치 못한 일로 마음이 어지럽혀지거나 미지의 것으로 인해 불안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이 모든 것에 대한 부가적인 관점이 필요합니다! 더구나, 예수께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 전액을 지불하셨는데도, 여러분과 저는 여전히 제자의 주요 속성을 발전시키는 것을 포함한, 제자로서의 수업료 전액을 지불하기를 망설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유혹을 성공적으로 이겨내셨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꾸물거리며, 몇 가지 유혹에 대해 미련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유혹에“개의치 아니하셨다”(교리와 성약 20:22 참조)고 경전이 증거하는 것을 볼 때, 주님의 모범이 갖는 강한 설득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심각한 범법이나 죄를 피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지속적으로 행하지 않는 태만의 죄에 대해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것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태만의 죄라는 영역에서 비록 조용하지만 큰 발전과 장점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특히 양심적인 사람들일수록 더 그러합니다.

 

사랑

하나님 아버지처럼, 예수께서도 완전한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인류 모두에게 조건 없이 주어지는 보편적인 부활의 축복을 포함한 속죄를 이루시기 위해 겸손하고 순종적으로 그분의 뜻을 완전히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일을 생각해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우리도 그 길을 가도록 주님께서 도울 수 있으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분은 그 길을 아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도 심오하고 크셔서 무한한 고통 중에도, 주님께서 견뎌 내야 하셨던 고뇌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고통을 겪던 필멸의 인간을 여전히 양육하셨습니다. 일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공격자의 잘린 귀를 보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상황에서도 주님은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돌볼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곁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한 강도도 위로하셨습니다.

반면에, 여러분과 저는 자기 연민의 늪에 빠져 다른 사람의 필요 사항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우리도 좀더 잘 보고 좀더 잘 양육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사랑의 고리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그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지 상태로 있습니까? 고리 안의 사람들에게 어떤 사랑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안일하게 고정 관념에 의해 사람들을 구분하는 일을 피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을 개인이 아닌 기능이나 고정 관념으로 대하는 것은 참으로 쉽습니다. 발전하고자 노력하는 다른 사람들을 애정어린 인내심으로 기다려 줍니까? 아니면, 조급한 마음에서, 데이지 뿌리가 제대로 내렸는지 보고자 끊임없이 뽑아 봅니까?

브리감 영 회장(1801~1877)은 다른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만약 성도들이 소중히 하고 실행한다면, … 수천 수만의 사람들에게 구원을 입증해 줄 한 가지 미덕, 속성 또는 원리가 있습니다. 저는 용서와,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인내를 수반하는 사랑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1 다른 모든 덕성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사랑의 반영입니다.

 

인내와 오래 참음

또한 예수님은 완전한 인내와 오래 참음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하나의 영원한 원”(교리와 성약 3:2)이라고 하신 주님의 길이 내포한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판에 박힌 일이나 반복은 귀찮거나 따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완전한 사랑을 지니셨기 때문에 그분들의 길은“하나의 영원한 원”이라 해도 결코 따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인내심을 보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의 인내심과 신앙을 시험하심으로써 도움을 주십니다.(데살로니가후서 1:4, 야고보서 1:3 참조)

만일 시험하지 않고 그냥 둔다면, 영원하고 또한 영원히 가져갈 수 있는 그러한 자질들은 개발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겨질 것입니다. 우리가 육적인 자신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때 일어나는 등척성 수축 운동(편집자 주: 어느 특별한 근육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운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비록 축복이 인식하기가 힘든 것이고, 이러한 등척성 수축 운동이야말로 더 인식하기가 힘든 축복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력하는 제자로서 기꺼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까? 주님은 가르침을 주시고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도다. … 내가 너희를 인도하겠음이라.”(교리와 성약 78:18) 그분은 우리가 지닌 참을성의 한계를 아십니다. 때때로 우리 자신은 한계점까지 몰렸다고 느낄 수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께 감사하게도, 그처럼 한때 우리를 힘겹게 했던 어려움들은 멀어져 가는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심지어 뛰어나고 용감했던 예레미야도 한때 낙담했습니다. 조롱 받고 박해를 받으면서, 그는 잠깐 동안 더 이상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 견딜 수 없나이다”(예레미야 20:9)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한계점에 다다랐지만, 꺾이지 않았습니다!

 

온유와 겸손

예수님은 또한 온유와 겸손의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그분이 행하신 업적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첫째 지체나 둘째 지체, 혹은 현재의 셋째 지체 어느 곳에서도,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무수한 세계를”(모세서 1:33) 창조하신 우주의 주님이셨으며, 현재도 주님이십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기꺼이 나사렛의 예수, 목수의 아들로 알려지셨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셨습니다! 그분은 역사상 가장 쓴 잔을 비통해 하지 않으시고 온유하게 드셨습니다.

우리도 각자 자신의 조그만 쓴 잔을 비통해 하지 않고 마실 수 있겠습니까? 특히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데 있어 이는 참으로 훌륭한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지위와 탁월함을 위한 본능적 욕구 또는 단순히 다른 사람보다 앞서려는 세속적인 욕망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성쇠 속에서, 주의 길의 예비자인 침례 요한이 했던 것처럼 온유하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비이기적인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한복음 3:30)

우리의 결혼 생활에서 온유는 어떻습니까? '나'라는 대명사가 우리라는 대명사에게 자주 자리를 내어 줍니까? 자기 중심적인 대명사인 '나'는, “사랑해”, “좋아해”, “듣고 있어”와 같은 상황에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반면에, “요구한다”, “원한다”, “필요하다”의 경우에는 '나'가 빠지는 것이 좋습니다.

작고, 긍정적인 조정이 시간의 과정을 통해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가족이나 교회나 다른 관계에서, 과거가 미래를 볼모로 잡지 않도록 하시겠습니까? 잊는 것이 용서의 한 부분임을 이해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재분류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어려운 과정

그러므로 우리는 성품 형성이 가장 어려운 건축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청사진을 사용하려면 신앙과 인내가 요구됩니다. 또한 과부하된 감정에서 생겨나는 폭주 현상도 있습니다. 실패를 경험한 후에 온유하게 원상 복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교만이 아주 잘하고 있다고 넌지시 암시하고 있을 때, 회개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다운 성품을 키우기보다는 값싸고 인간적인 대체물을 사용하려는 시도가 언제나 유혹적입니다. 선함 대신 교묘함, 진정한 가치 대신 외모와 같은 대체물은 허술한 기초 위에서 비바람이 몰아칠 때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름길을 추구한다면, 끔찍한 침전과 침몰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제자의 길을 따르려면, 분명한 개조가 요구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반석의 특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기초에서 어떠한 균열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분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결코 시들지 않습니다. 그분은 결코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할 분이 아닙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베드로의 권고에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가 너희를 돌보[시니]”(베드로전서 5:7), 여러분의 모든 염려를 그리스도께 맡기십시오. 그렇게 하길 주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반복해서 계속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세금, 혹은 공물을 내기 위해 입에 동전을 물고 있는 특정한 물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7:27 참조) 그 물고기를 발견했을 때, 제자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한 마리의 물고기나 한 닢의 동전에 대해서까지도 알고 계시는 그토록 놀라운 지각은 우리 개개인의 삶의 작은 부분까지도 온전히 알고 계신다는 위안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치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그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무슨 근원을 바라보아야 할지 알게 하려”(니파이후서 25:26) 하기 때문입니다.

 

놓쳐서는 안 될 결정적인 순간들

이제 우리 자신의 가족에 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중에는 연로하신 분도 있고, 중년도 있고, 새로 가족을 이룰 분도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에는 부모도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텅 빈 둥지를 지킵니다. 그렇게 홀로 남게 되는 것도 물론 계획의 한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이 둥지를 떠나간 후, 이제는 돌이키지 못할 과거가 되어 버린 소중한 날들을 기억하고 음미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한때 너무 높고, 날카롭고, 끊임없고, 심지어 짜증난다고 생각했던 자녀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애타는 마음으로 듣고자 하지만 허사입니다. 우리가 한때 소음이라 여겼던 자녀들의 그 귀에 거슬리는 소리들은, 실제로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들어 보고 싶은 감미로운 소리였습니다.

이제 한창 자녀들의 그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파묻혀 사는 여러분, 결정적인 순간들을 잡으십시오. 마리아의 선택과 같은 선택을 더 많이 하고 마르다의 염려와 같은 염려를 더 적게 하십시오. 특별한 대화와 비교한다면, 칼로리가 대관절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음식은 먹고 없어지지만, 가르침의 추억들은 여러분에게서 거두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그분의 사랑

우리가 나이 들었거나 어리거나, 결혼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둥지가 가득하거나 가득하지 않거나 간에, 속죄하신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합니다! 자비롭게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매일같이 그들에게 내 팔을 펼[쳤노라]”(니파이후서 28:32) 그분은 우리를 영접하시고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시며, 후에, 선지자 몰몬이 말했듯이, 우리는“예수의 팔에 안[길]”(몰몬서 5:11) 수 있습니다.

우리와 그분 사이의 남은 거리가 어떻든, 그 거리를 걸어야 할 사람은 우리입니다.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는 디딤돌들이 그 곳에 놓여 있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잠들기 전에 가야 할 수십 리가” 남아 있지만, 그분을 믿는 신앙으로 이만큼 왔으니, 여러분의 신앙이 여러분을 더욱 멀리 이끌어 줄 것입니다.

아버지께 드린 이 감동적인 간청을 깊이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세에서 온유하고 간결하게 “내가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아브라함 3:27)라는 말로 자원하신 바로 그 예수님의 간청입니다.

“아버지께 대한 변호자가 되는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는 아버지 앞에 너희 문제를 변호하고 있나니 -

“아뢰기를,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신 자요 아무 죄도 범하지 아니한 자가 겪은 고난과 죽음을 보시옵소서. 당신 아들의 흘린 피를 보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친히 영광을 얻으시려고 주신 자의 피로소이다.

“‘그러하온즉 아버지여, 나의 이름을 믿는 이 나의 형제들을 살려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내게 나아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옵소서 하느니라.”(교리와 성약 45:3~5)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께 그분의 이름을 믿는 인간들을 용서하셔서,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와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간구하셨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들을 생각하십니다! 저는 그분의 사도의 한 사람으로 이같이 증거합니다.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소중한 약속, 리아호나 2004년 4월호, 10 (주님의 성품을 배움))

2002년 5월 3일에 유타 주, 프로보에서 가진 브리감 영 대학 여성 대회에서 하신 말씀에서.

1. 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브리감 영(1997), 217~218쪽.
2. Robert Frost,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in The Poetry of Robert Frost, ed. Edward Connery Lathem(1969), 2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