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01월 11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신갈와드 성찬식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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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11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신갈와드 성찬식 말씀)"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7:19)

 

말씀 주제로 성약을 새롭게 함이라는 주제를 받았습니다. “성약이란 단어는 무슨 의미입니까? 이는성스러운 약속의 줄임 말로 하나님과 맺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성약의 백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아브람이 사래와 결혼했을 때 사래가 임신을 하지 못해 슬하에 자식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브람이 환상 중에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15:2~3)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4, 6)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17:1~8)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7:15~19)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그러자]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 마지막 문장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이것이 바로 성약의 의미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언약이 바로 성약이며 그로 인해 우리가 성약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모든 계약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쌍방간 계약의 경우 한쪽에서 그 계약 조건을 어기면 계약이 파기됩니다.  성약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성약에는 또 하나의 필수 계약조건이 있습니다.  이 조건은 성약을 단순한 계약이 아닌 성약으로 만드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입니다.  이것이 빠지면 성약은 결코 성약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빠지면 이 성약은 앙꼬없는 진빵, 김 빠진 콜라,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로마서 418~22절에서 그 답을 찾아봅시다.

(4:18~22)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혼한 이후 평생 동안 한 번도 아내가 임신하지 못했고 이제 90세나 된 아내 사라가 도저히 임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주님께서 하신 이 약속 즉 아들을 낳아주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백세, 아내 사라가 90세나 되어 낳은 이삭이 아직 어릴 때에 주신 주님의 명령과 그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의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다음은 창세기 22장의 기록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이 이 기록을 여러 차례 읽으셨겠지만,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받았을 충격과 고뇌의 순간이 얼마나 되었을 지를 헤아리면서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 22:1~18)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받았을 충격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왜 일찍 일어났을까요?  아마도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번민하며 새벽을 맞았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잠을 잘 부모는 아마 없을 것이며 아브라함도 그랬을 것입니다.)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아브라함은 나무를 쪼개면서 이 나무가 자신의 아들을 태울 나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의 손이 떨리지 않았을까요?)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삼일이나 여행하는 동안에 아브라함이 느꼈을 번민과 고뇌가 얼마였을까요?  그리고 번제 장소인 모리아 땅의 그 산이 보이는 곳에서 멀리 그 산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 말을 할 때 이삭도 옆에서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사람은 아마도 평생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들 이삭을 바치기 위해 단 둘이 떠나면서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완수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아마도 아브라함은 번제 나무만큼은 자기가 직접 지고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독자인 이삭의 마지막 가는 길에 무거운 나무를 지우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아브라함이 너무 노쇠해서 혹은 지난 3일동안의 번뇌에 너무 지쳐서 도저히 나뭇단을 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무거운 나뭇단을 진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칼은 아들을 죽이기 위한 도구였고, 불은 그 아들을 태워 하나님께 바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이를 직접 손에 들고 떠나면서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들 이삭이 이 질문을 했을 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아마도 찢어지는 듯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이 역시 아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으며 아브라함은 아들 앞에서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겠지만 그 마음은 아마도 처절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경전에서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이 구절도 가만히 읽어보면 최소한 여러 시간이 소요되는 일 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러 주신 곳에 도착하는 시간과 제단을 쌓는 시간에만도 아마도 여러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나무를 벌여 놓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겠지만 이삭을 결박하고 칼을 잡고 내려치려 하기까지 얼마만큼의 정적과 망설임과 고뇌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느꼈던 안도감은 얼마나 컸을까요? 참으로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지옥과 천국을 모두 느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 (이삭의 결박을 풀어주었다는 구절이 경전에는 없지만 분명히 제단 위에 묶여 있었던 이삭의 결박을 풀어주고 내려오게 한 뒤 아마도 아브라함과 이삭이 서로 껴안고 크게 울지 않았을까요?  그러고 난 뒤에 눈물 젖은 눈을 들어 보니 숫양을 발견하고 번제로 드린 것이 아닐까요?)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것이 바로 성약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성약을 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성약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성스러운 약속입니다.

 

모든 약속과 계약은 한쪽에서 그 약속과 계약을 지키지 못할 때 깨지게 됩니다.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도 그 약속은 깨지게 됩니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법도 사실상 국가에 대한 개인의 약속입니다.  국법을 어기는 사람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어서 검찰의 조사를 받던 중 자살했다는 뉴스가 나오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됩니다.  이제 죄를 묻고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할 당사자가 죽었으므로 검찰은 기소를 중지하고 사건을 종료하게 됩니다.  법을 어겼는데 죽으면 더 이상 그 법의 집행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왜 일까요?

교리와 성약 132: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계약은 사람이 죽을 때 끝이 남이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맺는 모든 약속인 일체의 , 의무, 맹세, 서약, 계약, 약속, 의례, 결합, 결연, 이행, 관계, 교제, 예약등 모든 약속은 주님께서 임명하신 종을 통하여 현세와 영원토록 약속의 성령으로 인봉되지 않는 한 사람이 죽을 때 모든 관계에서 해방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습니다. 로마서 71~3절의 말씀입니다.

(7:1~3)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국가와 개인이 맺은 계약인 법은 사람이 살 동안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그는 법에서 해방이 됩니다.  그러나 성약은 이와 다릅니다.  성약은 죽음을 넘어서며 대대손손에게 영향을 미치는 영원한 것입니다.  모든 계약은 두 쌍방 중 한쪽에서 파기하면 계약이 무효가 되지만 성약은 두 쌍방인 하나님과 나 가운데 나만 약속을 지키면 절대로 파기되지 않는 영원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성약은 사람이 죽어도 끝나지 않습니다.  그 약속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내세까지 이어지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성약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까지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약속은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 나 자신과의 약속이 그것입니다.

해마다 새해가 되면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시작합니다.  하지만 작심삼일이라고 며칠 가지 못하고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연약한 의지력을 탓하게 됩니다. 새해에 무엇인가를 성취하겠다고 목표를 세우는 것은 자기 자신과 약속하는 것입니다.  자신과의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의지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연약한 자신에 대하여 비난하게 됩니다.  이 세가지 약속이 각각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구주의 속죄가 함께할 때 우리의 모든 약점은 고쳐질 것이며 온전하고 깨끗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성약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약속에 대해 정직해야 하며 그 약속을 잘 지키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잘 지키기 위해 우리의 의지를 굳세게 단련해야 하며 우리의 신앙을 키워야 합니다.

성약을 새롭게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침례성약, 신권성약, 성전성약, 결혼성약 등 모든 성약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하기 위해서 잊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경전을 상고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맺은 성약을 기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성찬을 매주 취하는 것, 봉사의 부름을 받아들여 헌신하는 것도 성약을 기억하는 활동입니다.

 

법을 잘 알아야 법을 어기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일까요?  법 없이도 법 조문 없이도 법을 어기지 않고 사는 분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양심의 지시에 따라 사는 분들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정직하며 베푸는 삶을 산다면 법을 어길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삶을 살면서 그에 더하여 하나님과 맺은 성약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선한 삶을 추구하는 분들과 연합하여 이 사회에 더 나은 기여를 하겠다는 소망과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왕국에 헌신하겠다는 소망, 뜻 깊은 일을 성취하겠다는 열망, 선한 일을 이루어 이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소망 등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는 원동력은 우리가 노력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힘이 우리가 맺은 성약을 새롭게 해 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실패하게 할 수도 있는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거룩한 속죄로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간증)

2015111, 수원 스테이크 신갈와드 성찬식에서, 구승훈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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