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07월 12일 "티끌에서 일어나라 나의 아들들아" (서울남스테이크 서초와드 성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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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7월 12일 "티끌에서 일어나라 나의 아들들아" (서울남스테이크 서초와드 성찬식)

티끌에서 일어나라, 나의 아들들아” (니후1:21)

 

제가 이 부름을 통해 지방의 여러 스테이크와 와드/지부를 순회하며 많은 성도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들의 모습과 얼굴과 말씀과 태도 및 언행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그 분들이 매우 순수한 어린아이와 같은 분들이라는 점입니다.  이 복음이 그분들을 그렇게 만들었고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 곧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는 말씀대로 그렇게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약 4년전인 20115월에 서초와드를 방문했었습니다.  잠깐 여러분과 함께 간단한 앙케이트 조사를 하겠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4년 전 제가 이 연단에서 말씀할 때 이 와드에 다녔던 분은 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30%가 되지 않는 회원들이 손을 들었음)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이 유념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과거 수원 스테이크 회장으로 봉사할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약 50% 정도의 회원들이 불과 4~5년 사이에 스테이크에 전입해 온 회원들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수원 스테이크 초창기부터 자리를 지킨 토박이 회원들은 채 10%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론 우리 한국사람들이 수시로 이사를 자주 다니는 것도 이유이겠지만, 우리 회원들은 서로를 잘 모를 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회원은 여러분을 잘 알지 못하는 새로 전입한 회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잘 알고 있습니까?  일반적인 생각으로 우리는 친척 친지는 1년에 2~3차례 만나지만 교회 회원들은 매주, 1년에 52주를 만나므로 친척친지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진급할 때 각 학년에 약 15개 정도의 반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의미는 3학년에 될 때 2학년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가 같은 반이 될 확률이 1/15밖에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모두 낯선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친구들을 사귑니까?  대화를 나누고, 함께 먹고, 운동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저희 집 막내아이가 중3이 되어 새벽 세미나리를 시작하였는데 청소년 5명이 함께 저희 집에서 세미나리를 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는 걸어서 오고 다른 3명은 부모님이 차에 태우고 오는데, 첫 날 세미나리에 아이들만 올라오고 부모들은 모두 주차장에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그 부모들도 올라오게 하여 아이들이 세미나리 할 동안에 부모들도 경전을 공부하며 여러 주제로 토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토론에 함께하는 한 형제님과 저는 같은 와드에서 약 10여년 동안 함께 지낸 사이였습니다.  저는 그가 어떤 회사에 다니고 자녀가 몇 명이고 어떤 차를 타고 어디에 살고 있는 지 알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축구도 했고 교회 활동에도 참여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이 새벽토론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매일 약 3~40분 정도씩 벌써 약 4개월 째 이 토론을 계속하면서 저는 이제 이 형제님이 어떤 생각을 하는 형제인지 그에 대하여 좀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서로 친구가 되려면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자매님들은 아마도 이러한 부분에 형제들보다는 좀 더 나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은 형제들끼리 함께 운동하고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그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서로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그들의 고민과 생각을 서로 잘 알아야 합니다.

 

3~40년 전에는 교회에 많은 청소년들과 독신들이 침례를 받고 교회에 들어왔었습니다.  그 때 수많은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교회에 쏟아져 들어온 계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처음 구도자 시절 선교사들과 함께 교회에 방문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 교회는 전세건물 2층에 있었던 아주 작은 지부였습니다.  지금은 동 스테이크 길음와드에 흡수되어 없어진 삼선지부라는 작은 지부였습니다.  1층에는 중국요리집이 3~4층에는 학원이 있었던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매우 초라한 건물이었습니다.  지부에 참석하는 회원들은 6~70대 할아버지 한 분, 가족회원 1가족을 제외하면 모두가 청소년과 독신들이었습니다.  3~40명의 회원들이 있었고 지부회장님은 선교사였습니다.

이 작은 지부에서 저는 성도들의 사랑과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가면 그들은 저에게 친절했고 사랑을 보여주었으며 그곳에서 저는 이곳에 속하고 싶다는 느낌을 느꼈습니다.  그러한 사랑은 처음 교회에 방문하는 구도자인 저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고 회원들 서로에게도 그러한 사랑을 보이는 것을 저는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 청소년들과 독신들이 교회에 잘 나오지 않고 개종자가 잘 나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많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저는 바로 성도들이 서로에게 또 처음 교회에 나오는 분들에게 보이는 사랑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친절과 사랑을 보이는 정도가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에 과거와 다른 침례 분포와 숫자를 현재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은 시인이 지은 그 꽃이라는 짧은 시 한편을 한 지인이 제게 카톡으로 보내주었는데 여러분과 함께 낭송해 보고 싶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그 꽃” - 고 은 -

 

올라갈 때는 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로지 정상에 오르겠다는 생각에
미처 볼 겨를도 없었고
숨이 차고 힘들어서 볼 여유도 없었습니다
참 아쉽습니다
올라갈 때 보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기도하고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어떤 모양인지 무슨 색깔인지 자세히 보면서
그 꽃들과 대화도 나누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내려올 때에야 보였습니다
목표를 다 이루고 난 후 천천히 내려오니 그 때서야 보였습니다
내려올 땐 그나마 볼 수 있어 다행인데 그래도
여전히 꽃들과의 대화는 어려운 일이 됩니다
안타깝게도 그냥 스쳐 지나가고야 마는 순간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성취만을 위해서 일만 바라보고 부지런히
올라갈 때에는 주위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보이질 않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난 이후에 내려갈 때에야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꽃은 그대로 일지 모르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 멀어지고 떠나고 없습니다
사람은 올라갈 때 보지 못하면 그렇게 사라지는 겁니다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다시 주어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소중한 사람들은 다시 볼 수 없습니다
올라갈 때 보십시오 올라갈 때 만나십시오
올라갈 때 챙기십시오 올라갈 때 보살피고 쓰다듬어 주십시오
주위의 그 소중한 사람은 내려갈 때는 이미 없습니다
올라가는 길이 다소 늦어지더라도
때론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더라도
행여나 끝까지 못 올라갈지라도
꽃보다 아름다운 주위의 사람들만은
당신은 보고, 만나고, 대화하고, 살피고, 챙기십시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화향 즉 꽃향기는 백리를 가지만 인향 즉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답니다..!
(맨 위 한 줄의 짧은 시가 고은의 시이고 나머지 부분은 어떤 사람이 적은 해석의 글임)

이 시를 들으시면서 어떤 분은 챙기지 못했던 자녀들, 지금은 헤어진 친구들, 이제 다시 보지 못하는 우리 주변의 교회 회원들을 생각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활동이나 프로그램을 한다 하더라도 직접 그 사람들을 챙기지 못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팩스라는 기계를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  이 기계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종이에 출력해 주는 기계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팩스 메시지를 기다리기 위해 팩스 기계 앞에서 하루 종일 서 있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들고 다니는 이 휴대폰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문자, 카톡, 메일, 통화 등 이 휴대폰은 만능 통신기기로 항상 휴대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문자나 카톡이 오면 즉석에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러한 휴대폰의 문자, 카톡 등은 마치 팩스와 같아서 우리가 필요할 때 확인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찬식 모임 시간에 이 휴대폰으로 오는 문자, 카톡 등을 확인하고 메시지를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 저는 성찬식 모임 중에는 휴대폰을 꺼내지도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전화벨이 진동으로 울려도 받지 않습니다.  나중에 모임이 끝난 후에 전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패드, 노트북 등의 사용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무실에서나 학교에서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경건해야 할 성찬식 모임 중에 이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주의해야 하는 일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기억납니다.  주인공 장교가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함께 떠날 대원들을 차출하는 장면입니다.  한 대원은 부대의 행정병으로 근무하는 대원이었습니다. 그에게 통보하고 함께 떠나자고 할 때 그가 사용하던 수동식 타자기를 가지고 가려 하는 것을 본 이 장교가 연필 한 자루를 꺼내서 그에게 보여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교의 뜻을 캐치한 이 대원은 타자기를 버리고 연필을 챙겨 함께 떠났습니다. 사실 전쟁터에서 타자기로 문서를 작성한다는 것은 매우 거추장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연필과 종이 한 장이면 될 일인 것입니다.  성찬식 모임에서의 기록도 마찬가지 입니다.  연필과 종이면 충분합니다.

 

안식일의 법 계명을 주시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주님께서는 안식일의 법이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대의라는 표현은 generations 이라는 단어이고, “표징sign 이란 단어의 번역입니다. 개역 성경을 우리 교회에서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표징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이 번역은 성전에서는 표시로 번역하여 활용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안식일의 법은 우리와 주님 사이에 대대로 보일 표시라는 뜻입니다.

교회의 여러 계명 가운데 안식일의 법은 매우 독특한 계명입니다. 다른 모든 계명은 잘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순결의 법을 지키는 지, 지혜의 말씀을 지키는 지, 십일조의 법을 지키는 지 등은 회원과 접견을 하는 교회의 지도자가 아니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법은 다릅니다.  이 계명은 그 계명을 잘 지키는 지 아닌 지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안식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 회원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회원이 안식일을 경건하게 보내는 지, 성찬식 모임에서 경건하게 보내는 지 우리는 금방 볼 수가 있습니다.  단상에 앉아 있으면 회원들의 여러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찬식 모임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집중하고 있는 지 그렇지 않은 지 우리는 서로 모두 볼 수 있습니다.

휴대폰이나 노트북 혹은 패드 등을 들고 만지작거리면서 무엇인가 열중하고 있는 회원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 가운데 일부는 아마도 말씀을 적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타이핑이 손 글씨보다 빠른 젊은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말씀을 열심히 적어서 교회 오지 않은 어떤 저활동 회원에게 보내려고 적고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멀리서 보는 회원, 혹은 처음 교회에 온 구도자들은 아마도 이 회원이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인터넷 서핑이나 SNS를 주고 받고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찬식 모임에서 휴대폰, 전자기기 등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회원들에게 잘못된 표시, 잘못된 메시지를 보일 수 있는 행동입니다.  우리의 복장도 마찬가지 입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다니던 시절에는 가난했고 젊은 독신으로써 넥타이 매는 법도 몰랐기 때문에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교회 모임에 참석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가 살만 해졌고 옷이 매우 저렴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채 교회 모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여름이 더우므로 넥타이를 풀고 근무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습니다.  관공서나 대기업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 에어컨을 틀어놓고서 넥타이를 단정히 매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에서 안식일을 경건하게 지키는 지 아닌지를 다른 사람들과 주님께 표시로써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겠다고 말씀하신 주님께 아브라함이 여쭈었습니다. 

18:24~32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마지막으로 주께서 말씀하신 의인 10명으로 인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겠다고 하신 그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들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 백성이 회개하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도 필요한 최소한의 의인의 숫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최소한 이 정도의 인원이 있어야 주님의 사업이 진행되는 한계점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심리학 용어에 “3의 법칙이라는 법칙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한 명이나 두 명이 어떤 행동을 하면 아무도 관심이 없다가, 3명 이상이 같은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 하게 된다는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것은 만약 이 서초와드에 3명의 의로운 회원들이 일어서서 주님의 뜻을 준행하고 순종하며 모범을 보인다면, 이 와드가 시온의 와드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 도시가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키는 데 의인 10명이 필요했다면 이 와드가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데 3명이면 될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의인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모르는 사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알고 있지만 그것을 못해보고 죽는 사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고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이 그것입니다.  의인이라면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교리와 성약 137편에는 형인 알빈 스미스가 복음이 회복되기 전에 침례도 받지 않고 죽었는데 해의 왕국의 승영을 상속받은 것을 시현으로 본 조셉 스미스가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성 137:9   이는 나 주가 모든 사람을 그들의 행위에 따라, 그들 마음의 소원에 따라 심판할 것임이니라.”

우리가 행한 행위로 인해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에는 모두 이의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소원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소원으로 번역된 영어 단어는 Desire 입니다.  이 단어는 주로 욕구”, “욕망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이전 번역에서는 소망으로 번역되었었습니다.  행위에는 좋은 행위가 있고 나쁜 행위가 있지만 소원이라는 우리말은 좋은 뜻만 연상되는 단어라서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쁜 소원이 잘 연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욕구”, 즉 좋은 욕구, 나쁜 욕구 혹은 욕망으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품은 소망에 의해, 소원에 의해, 욕구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의 욕망을 아시고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신다]”(대상28:9)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의 은밀한 생각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며칠 전에 읽은 리하이의 권고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니후1:21, 23) “나의 아들들아, 티끌에서 일어나라. 그리고 대장부가 되며 한 뜻과 한 마음으로 굳건히 되며 모든 일에 단합하여, 너희가 사로잡힘에 빠지지 않도록 하[],

깨어나라, 나의 아들들아, 의의 갑주를 입으라. 너희를 묶고 있는 그 사슬을 떨쳐 버리고 어둠 속에서 나아오며, 티끌에서 일어나라.”

우리가 떨치고 일어나야 할 티끌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입어야 할 갑주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떨쳐버릴 사슬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합니까?

저는 제 임기 동안에 우리 지역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저로 인함이 아니라 이 와드에 3명의 의로운 성도가 일어나서 모범을 보여야 일어날 수 있는 변화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간증)

2015712, 서울 남 스테이크 서초 와드 성찬식에서, 지역칠십인 구승훈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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