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06월 23일 몰몬의 소망 모로나이의 신앙 (신갈와드 성찬식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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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6월 23일 몰몬의 소망 모로나이의 신앙 (신갈와드 성찬식 말씀)

몰몬의 소망 모로나이의 신앙

 

소망이라는 단어는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단어같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이를 목표라고 부를 것입니다.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이 목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큰 힘이 나도 알지 못하는 목표를 향해서 나를 몰고 간다.  그 목표가 완성되지 않는 한 나는 흔들리지 않는 불사신이다.  그러나 그 목표에 내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면 파리 한 마리라도 충분히 나를 넘어뜨릴 수 있다.” (나폴레옹, 나폴레옹 평전, 조르주 보르도노브 저)

신앙이 모든 일의 원동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표가 없으면 어떤 일도 성취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목표소망이 없으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망의 다른 비슷한 말로 확신이라는 단어는 어떻습니까? 이더서 124절에서 이더는 소망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더12:4) "그런즉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는 자는 반드시 더 나은 세상, 곧 참으로 하나님의 우편의 처소를 바랄 것이요, 이 소망은 신앙에서 비롯하여, 사람의 영혼에 닻이 되어, 그들로 확실하고 굳건하며, 늘 선행이 넘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라 하였더라."

이더는 소망이 신앙에서 비롯되며 사람들을 확실하고 굳건하게 해 준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이 경우 확신이라는 단어는 소망에서 비롯된 확실하고 굳건한 신앙이라는 뜻이 됩니다.

 

소망의 또 다른 비슷한 말로 신뢰라는 단어는 어떻습니까?  제임즈 이 파우스트 장로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망은 우리 영혼의 닻입니다“소망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이자, 우리가 지금 행동한다면 미래에는 바라는 축복이 성취되리라는 신앙입니다” (제임즈 이 파우스트, “소망, 영혼의 닻”, 리아호나, 2000 1월호, 70~72)

파우스트 장로님은 소망이란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신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닌 몰몬경은 10살 때 앰마론이란 선지자로부터 택함을 받은 몰몬이,24살 때부터 시작한 기록입니다.  몰몬은 아들을 낳았을 때 아들의 이름을 니파이인 역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장군인 모로나이의 이름을 따서 모로나이라고 지었습니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누구나 똑같을 것입니다.  몰몬은 아들이 모로나이 장군처럼 용감하고 큰 신앙을 지니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을 잘 가르쳤습니다.  나중에 모로나이가 홀로 남아 기록을 마무리 할 때, 그는 부친 몰몬이 교회 회당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때 신앙, 소망, 사랑에 대해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기록했습니다.  그 기록인 모로나이서 7장의 내용은 단순히 기억하여 기록할 수 있는 정도의 분량이 아닙니다.  저는 아들인 모로나이가 부친 몰몬의 당시 말씀을 상세히 기록하여 늘 지니고 다니다가, 몰몬경 판을 마무리할 때 이 훌륭한 말씀을 후세에 남겨 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옮겨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모로나이서 7장은 신앙, 소망, 사랑의 관계에 대한 몰몬의 위대한 가르침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40절과 42절에서 몰몬은 소망과 신앙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모로7:40, 42) “그리고 또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내가 소망에 관하여 너희에게 말하고자 하노라. 너희가 소망을 갖지 아니하고 어찌 신앙에 이를 수 있느냐?

그런즉 사람이 신앙을 가지려면 반드시 소망을 가져야만 하나니, 이는 신앙 없이는 아무 소망도 있을 수 없음이라.”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신앙과 소망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갖지 않고는 신앙에 이를 수 없고, 신앙이 없이는 아무 소망도 없다는 이 가르침을 보면, 우리의 신앙을 키우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브르스 알 맥콩키 장로님은 이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신앙과 소망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먼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이요, 그 다음에 신앙이 있음으로 인해서 구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소망이 부풀어 오릅니다.” (브르스 R 맥콩키)

 

아들인 모로나이도 신앙과 소망에 대한 부친의 가르침을 잘 이해한 것이 분명합니다.  모로나이서 10 20절에서 그는 다시 이렇게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모로10:20) “그런즉 반드시 신앙이 있어야 하며, 반드시 신앙이 있어야 할진대 또한 반드시 소망이 있어야 하며, 반드시 소망이 있어야 할진대 또한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하느니라.”

모로나이는 신앙과 소망이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두 가지 은사를 갖추게 되면 마지막으로 사랑이라는 은사도 갖추게 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앙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불신앙이 아니라 바로 두려움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일 것입니다.  소망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머리속에 답을 떠올리면서 모로나이의 다음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모로나이서 1022절입니다.

(모로10:22) “또 만일 너희에게 소망이 없으면 너희가 반드시 절망하리니, 절망은 죄악으로 인하여 오는도다.”

소망의 반대는 절망이지만 모로나이의 가르침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죄악이 바로 소망을 약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절망은 죄악으로 인하여 오는도다

절망이란 단어는 소망이 끊어졌다”, 혹은 소망에서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소망은 마치 단단한 밧줄처럼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줄입니다.  소망이 약해졌다는 말은 이 줄이 느슨해져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학장시절에 산악부 활동으로 암벽등반을 했었습니다.  등반할 때 선행등반자를 Top 이라 부르고, 뒤이어 오르는 등반자를 Second 이라고 부릅니다.  Top이 먼저 올라간 다음 Second이 따라가는 데, 둘 사이에는 Seil 이라는 등반용 밧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Second이 올라갈수록 Top과 연결된 Seil이 느슨해지는데 이를 팽팽히 당겨달라고 SecondTop에게 부르는 외침이 있습니다.  “Anchor 바싹”, Anchor에 연결된 줄을 바싹 당겨달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외치면 TopSeil을 끌어올려 팽팽히 당겨줍니다.  그래야 등반자가 미끄러져도 다치지 않게 됩니다.  만약 Seil5 미터 정도 늘어지면 미끄러질 때 약 10 미터를 추락하게 됩니다.

소망이 약해지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Seil이 늘어져서, 삶에 위기가 닥치거나 큰 유혹에 직면할 때 추락하여 떨어지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절망즉 소망의 Seil이 끊어지면 우리는 떨어져 죽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우울증도 바로 이 절망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죄악란 과연 무엇일까요?  를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살인하지 말지니라.” 이 계명을 어기는 것은 가장 큰 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외아들인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묶어놓고 제물로 바치려고 칼을 들어 내려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잘 아는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아브라함을 직계비속 살인미수죄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죄를 지었다고 비난 받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믿음의 조상으로 칭송 받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죄의 정의가 아주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죄를 지으면 우선 두려움이 임하게 됩니다. 규칙과 계명 혹은 규범을 어기면 심장이 떨리게 됩니다.  교통법규를 어겼는데 저 앞에 교통경찰이 서서 손짓하며 여러분을 길가로 세우는 경험을 운전자라면 한번쯤은 해보셨을 겁니다.  가슴이 콩닥콩닥거리는 느낌이 아닙니까? 신앙의 반대가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으면 우리의 신앙이 약해집니다.  신앙과 소망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죄를 지으면 또한 절망하게 되며 낙담하게 됩니다.

모든 규범, 규칙, 원칙을 어기면 우리는 낙담하게 됩니다.  이러한 규범이나 규칙은 하나님만이 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생님, 부모님, 혹은 교회지도자의 권고를 어겼을 때에도 역시 우리는 낙담하게 됩니다.

지상에서 누가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까?  그 답은 바로 우리에게 권고와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기도하면 조셉 스미스처럼 하나님의 응답을 직접 받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서 주십니다.  우리를 선도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손길이며, 하나님의 계명이며, 하나님의 규칙이 됩니다.  그러한 분들의 권고의 말씀을 어기는 것은 어떤 면에서 죄가 되기 때문에 역시 우리의 소망을 약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망을 강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커다란 시련을 극복하고 위대한 목표를 성취한 수많은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역사에 등장하는 위인들뿐만 아니라, 큰 성공을 거둔 스포츠 선수, 연예인, 대기업을 일군 오너, 교회의 지도자, 더 나아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우리는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절망스러운 상황에 있던 사람이 바로 몰몬과 모로나이일 것입니다.  몰몬은 한 평생 백성들을 선도하려 하였으나 백성의 멸망을 직접 목격해야 했습니다.  그의 아들 모로나이는 혼자 남아 백성들의 슬픈 멸망의 기록을 정리했습니다.  그 기록이 바로 몰몬경입니다.  모로나이는 몰몬서 82절부터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8:2-5) “또 이제 이렇게 되었나니 쿠모라에서의 대격전 이후에, 보라, 남방 땅으로 도피하였던 니파이인들은 레이맨인들에게 수색당하여 결국은 모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또 나의 부친 역시 저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며, 내가 다만 홀로 남아 나의 백성의 슬픈 멸망의 이야기를 기록하노라. 그러나 보라, 그들은 갔고, 나는 나의 부친의 명령을 이루노니, 저들이 나를 죽일 것인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기록하고 이 기록을 땅에 감출 것이라, 그리고는 내가 어디로 가든지 상관이 없도다. 보라, 나의 부친이 이 기록을 만드셨고 또 그 의도를 기록하셨나니, 보라, 내가 판에 여백이 있으면 나도 그 의도를 기록할 것이나, 판에 여백이 없고, 또 광석도 내게 없으니, 이는 내가 홀로 있음이라. 나의 부친과 나의 모든 친족은 전투에서 죽임을 당하였으며, 나는 친구도 없고 갈 곳도 없나니, 어느 때까지 주께서 나를 살려 두실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에 처해있던 모로나이가 그의 마지막 기록에서 소망의 중요성에 대해, 소망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사랑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름답고도 장엄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 여러분,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니파이 백성이 모두 멸망한 뒤에도 무려 37년간이나 모로나이 홀로 떠돌아 다녀야 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친구도 부모형제자매도 없이 홀로 지낸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1년도 못 가서 큰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모로나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신앙을 유지, 아니 소망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찬송가 80장에서 그 답을 찾고 싶습니다.  모로나이의 그 긴 시간 동안의 외로움과 절망적인 상황을 기억하면서 이 찬송가 가사를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세상 근심에서 풀리네
내 모든 소망 주 앞에 낱낱이 주께 고하네
괴로울 때나 슬플 때 내 영혼 위로 받으며
내 기도하는 은혜로 모든 유혹을 이기네
내 기도하는 은혜로 모든 유혹을 이기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당신의 품안에 안기네
믿음이 충만할 때에 주 축복 언약 하시네
주님을 찾고 믿으라 나에게 명령 했으니
내 근심 걱정 맡기고 기도로 기다립니다
내 근심 걱정 맡기고 기도로 기다립니다 (찬송가 80내 기도하는 그 시간”)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더라도, 주님께 우리의 소망을 간절한 마음과 진실한 마음으로 낱낱이 고한다면, 우리는 위로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죄와 유혹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모로나이는 아마도 37년 동안 기도로써 위안을 받았을 것입니다.

 

모로나이서 9장에는 아들 모로나이에 대한 아버지 몰몬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로나이서 9장은 니파이인과 레이맨인이 범한 가장 끔찍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어서, 몰몬경에서 자주 인용되지 않는 장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 끔찍한 기록의 끝 부분에는, 아버지 몰몬의 아들에 대한 강한 소망이 담긴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로나이서 922절부터입니다.

(모로9:22, 24~25) “그러나 보라, 내 아들아, 내가 하나님께 너를 천거하노니, 나는 네가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신뢰하노라. 또 나는 하나님께서 네 목숨을 살려 두셔서 그의 백성이 그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나, 아니면 그들의 온전한 멸망을 목격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노니, 이는 그들이 회개하고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반드시 멸망할 것을 내가 앎이라.

“…그러므로 만일 네가 살아 남고, 내가 죽어 너를 보지 못하거든, 대략 몇 가지를 기록하라. … 내 아들아, 그리스도 안에서 충실하라. 그리고 내가 쓴 것이 너를 비통하게 하여 너를 억눌러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기를 바라며, 또 그리스도께서 너를 들어 올리시기를 바라며, 또 그의 고난과 죽으심과 우리 조상들에게 그의 몸을 보이신 일과 그의 자비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그의 영광의 소망과 영생의 소망이 영원히 네 마음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노라.”

아마도 모로나이가 37년간 소망의 끈을 놓치지 않은 것에, 부친인 몰몬의 이 기도가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의 영광의 소망과 영생의 소망이 영원히 네 마음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노라.”

아버지가 전쟁 중에 보내준 이 편지를 모로나이가 그의 마지막 기록에 포함시켰을 정도로, 그는 부친의 이 기도문을 마치 축복문처럼 소중히 간직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모로나이는 부친 몰몬의 이 기도대로 끝까지 살아남아 백성의 기록을 완성했으며, 나중에 부활한 천사의 모습으로 조셉 스미스에게 나타나, 몰몬경과 함께 이 복음의 회복을 이루는 천사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전세계 거의 대부분의 성전 꼭대기에는 모로나이가 나팔을 부는 형상으로 조각되어 올려져 있는데, 예배당에 십자가조차 걸지 않는 우리 교회에서 유일하게 건물외부에 올리는 조각이 바로 이 모로나이 상입니다.  아버지 몰몬의 이름을 딴 몰몬경과, 복음의 회복을 알리는 천사의 상징이 된 아들 모로나이 천사상은, 우리 교회를 세상의 여러 교회와 구분 짓는 가장 독특한 모습일 것입니다.  이 두 위대한 선지자이자 부자관계인 몰몬과 모로나이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처절한 시대에 태어나, 여러모로 고민하고 좌절과 낙담에 휩쓸려야 했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남긴 기록에서 우리는 그들의 위대한 신앙과 굳건한 소망 및 큰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찬송가 78은밀한 기도3절과 4절을 음미하면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낙담과 절망의 바다를 우리 헤쳐 지날 때
하나님 내 기도 들으심 영혼의 위롤세
내 갈 길 가시 많고 또 원수가 많아도
은밀히 기도 하오면 내 구주 도우시네

날마다 기도하여 이 생명 은혜 받고
내 영혼 하늘에다 맺어 놓고 싶어라 (찬송가 78은밀한 기도”, 3~4)

우리의 영혼을 하늘에 맺어 놓기 위해서는 우리의 소망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키워주며 우리의 사랑을 온전케 해 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굳건한 소망을 지니고 항상 기도하여 낙담하지 않는 강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몰몬은 몰몬경의 기록을 요약한 선지자입니다.  모로나이는 천사로 부활하여 조셉 스미스를 통하여 이 복음의 회복을 이룬 선지자입니다.  조셉 스미스는 몰몬경을 통해 이 복음을 회복시킨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입니다.  이 세 분의 선지자야말로 몰몬경의 기록을 시작한 니파이와 함께 제가 다음 세상으로 가게 되면 가장 만나 뵙고 싶은 네 분입니다.  저는 이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이 말일에 회복되도록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선지자들임을 분명히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 드립니다.  아멘.

(2013623, 수원 스테이크 신갈와드 성찬식에서, 구승훈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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