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수레 부대


마틴 손수레 부대 관련 일지 포함


2008년 1월 18일


정 태 걸


중 부 종 교 교 육 원

한국교회교육기구

손수레 부대의 배경

유럽에서 개종한 수많은 가난한 성도들의 이주가 지체되고 있고, 본토에서의 십일조도 감소함에 따라 브리검 영 회장은 1855년 10월 “(영국) 리버풀에서 미국(뉴욕)으로 배를 타고 와서 아이오와시까지 기차를 타고 온 ‘가난한 성도’들은 거기서부터 ‘짐을 끌고 걸어서’ 유타로 넘어오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에 따라 1856년, 다섯 그룹의 그와 같은 손수레 부대가 조직되었는데, 그들은 아이오와시의 서부행 기차 종점에서 솔트레이크까지2092킬로미터(1300마일)을 걸어서 횡단해야만 했다.

처음 486명의 이주자가 끄는 96대의 손수레로 구성된 두 부대가 1856년 9월 26일 솔트레이크에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이 시도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여졌다. 그들의 여행을 16주 안에

끝냈다. 아마도 그 해에 유타로 넘어 올 마지막 부대로 여겨졌던 세 번째 부대는 320명으로 구성되어 64대의 손수레 부대를 끌고 10월 2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 때 이미, 늦게 위험한 출발을 감행하여 여행 도중에 있던 233대의 손수레를 이끄는 980명에 달하는 회원들이 아이오와 평원에  있었다. 이 중 하나는 제임스 G. 윌리가 이끄는 부대로서 7월 15일에 아이오와를 건너 네브라스카 주 플로렌스(오마하)로 갔고, 거기서 일주일 뒤에 아이오와 평원으로 들어섰다. 마지막 부대는, 에드워드 마틴 휘하의 부대로서 8월 25일 플로렌스를 떠났다. 이와는 별도로 세 그룹의 독자적인 마차 부대도 390명 이상의 이주민을 태우고 늦은 출발을 하였다.

마틴 손수레 부대가 떠난 일주일 뒤에, 유럽 선교부 회장으로서 손수레 부대의 조직을 위해 애썼던 사도인 프랭클린 D. 리차즈 장로 역시 열여섯 명의 귀환 선교사들과 함께 플로렌스를 떠나 유타로 향했다. 그러나 말과 사륜 마차를 탄 이들은 9월 7일 마틴 손수레 부대를 앞섰고, 9월 12일에는 윌리 손수레 부대를 앞선 뒤, 10월 4일에 솔트레이크에 도착하게 된다.

리차즈 장로가 솔트레이크 지도자들에게 전한 수많은 이주민들이 지금 유타를 향해 오고 있다는 보고는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늦게 출발한 이주민들은 필경 그들에게 들이닥칠 엄청난 한파를 이겨낼 옷 한 번 변변히 없을 것이기 때문이요, 또한, 이미 앞서 짐을 가볍게 한 손수레부대의 특성 상, 음식도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것이고,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주자부대를 위하여 정기적으로 산속으로 물자를 날라주던 마지막 보급품 마차마저도 이미 철수한 뒤였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둔 브리검 영 회장은 그때 행해진 연차 대회에서 남자와 여자를 가동하여 즉각 대규모 구조대를 준비하도록 명하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200대의 구조마차와 구조팀이 이 과업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구조대를 이끈 지휘관들 중 몇몇은 조지 D 그랜트를 포함하여 동부에서 말을 타고 들어온지 5일도 되지 않은 선교사들이었다. 그로부터 2주 뒤, 미국 관측 사상 가장 빨리 생성된 것으로 알려진 대폭설(블리자드)이 와이오밍 한 가운데 있는 로키 산맥으로 들어오고 있던 손수레 부대와 마차 부대에 들이닥쳤다. 며칠 동안 계속된 맹렬한 폭설이 기후에 그대로 노출된 손수레 부대원들을 할퀴고 지나가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에게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그랜트의 구조대가 앞이 안 보이는 눈보라 속에서 윌리 손수레 부대를 발견한 것은 10월 21일이었다. 식량이 떨어진 지 이미 하루가 지난 뒤의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험란한 여정이 남아있었다. 하루의 휴식과 식량을 보급받은 후, 그들은 북풍의 한파 속에 사우스패스(해발2301m)의 길고도 가파른 동쪽 능선을 넘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다행히 그곳을 넘어선 후, 충분한 음식을 취하고, 이제는 빈 보급품 수레를 타고 오를 수 있게 된 그들은 원기를 회복하였을 때, 속도를 내어 솔트레이크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 11월 9일의 일이었다. 대원 중 404명이 살아남았고, 68명이 사망하였으나, 많은 대원들이 심한 동상에 걸려있었고, 아사 직전의 상태였다.

대원의 3/4이 여자와 아이들, 노인들로 이루어진 마틴 손수레 부대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였다. 10월 19일 폭설이 불어닥치자, 그들은 야영을 결정하고, 적게 할당된 음식으로 폭설이 지날 때까지 9일간을 버텨야 했다. 그랜트의 구조대는 윌리 손수레 부대에 보급품과 구조대원들을 남겨두고, 8대의 마차를 가지고 마틴 손수레부대를 찾기 위해 동쪽으로 더 깊숙이 눈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차에 앞서 보낸 정찰대가 그들을 발견한 곳은 사우스 패스 동쪽 240킬로(150마일) 지점이었다.

이미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부대원들은 야영을 풀고 즉시 떠나도록 명받았다. 보급품 마차가 행진 중에 당도했으나, 식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거기서 약 99킬로미터(55마일)를 힘들여 더 전진한 뒤, 데빌스게이트 근처에서, 보급품이 도착할 때까지 다시 한 차례 더 야영을 해야 했다. 반면에 구조 노력은 차츰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구조팀들은 다시 시작된 대폭설 속에 며칠씩 지체하면서, 더 나아가길 두려워하며, 이주 (손수레) 부대나 그랜트가 이끌고 나간 (8대 마차의) 선발대가 (그들에게로 오지 않고) 겨울을 지낸 뒤에 오기로 했거나, 아니면 이미 폭설 속에 전원 사망하였기에 오지 않는 것이라고 합리화하였다.

마틴 부대는 5일간이나 야영을 하며 기다려도 보급품이 오지 않자, 비탄에 잠겨 더욱 약화된 상태에서 행군을 재개해야 했다. 결국 그들이 발견되기까지 56명이 사망하였으며, 사망률은 급격히 증가되기 시작하였다. 구조는 가까스로 필요 시간 내에 이루어졌다. 그랜트가 서쪽으로 사람을 한 사람 보내어 구조를 포기하고 돌아가던 구조팀 일부를 되돌린 것이다. 마틴 부대가 그토록 윌리 부대를 힘들게 했던 사우스 패스의 그 험준한 지역을 오르려하고 있을 때 마침 최소한 30대의 (구조대) 마차가 도착하였다. 굶주리고 얼어붙어 기진한 상태에서 그들의 영마저 눌려져 있는 그 시점에 많은 사람이 걷지 조차 못하는 그 때, 사람들은 그 한계점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따뜻한 옷과 음식으로 기운을 차리고,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은 마차에 태운 뒤, 마틴 부대는 속도를 낼 수 있었다. 104대의 마차로 이루어진 마틴 부대가 마침내 솔트레이크에 도착한 것은 11월 30일이었다. 576명 중에서 적어도 145명이 사망하였고, 윌리 부대와 마찬가지로, 생존한 많은 사람도 동상과 기아 상태에서 큰 고통을 당하였다.

세 무리의 독립 마차 부대와 구조팀 일원들은 12월 중순까지에 걸쳐 산발적으로 솔트레이크로 올 수 있었다. 단, 스무 명의 남자들은 다니엘 W ,존스의 지휘 하에, 마차 부대가 놓고 간 짐들을 지키고, 마틴 부대원 중에 기운이 소진된 사람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데빌스 게이트에서 겨울을 났다. 존스 일행 역시 이곳에서 혹심한 기아 속에 곤궁에 처했었다. 생가죽을 씹어야 할 상태에까지 처했을 때, 우호적인 인디언들이 버펄로 고기를 주어 견딜 수 있었다.

이 1856년 이후, 여섯 그룹의 손수레 부대가 더 평원을 건넜다. 이런 방식의 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1857년 이른 봄에 70명의 선교사가 반대로 솔트레이크 쪽에서부터 수레를 끌고 동부로 왔다. 총 1076명의 이주민이 223대의 손수레로 구성한 다섯 그룹의 손수레 부대 (1857년에 둘, 1859년에 하나, 1860년에 둘)가 별 어려움 없이 평원을 건넜다. 도합 2962명의 이주민이 손수레를 끌고 유타로 들어온 것이다. 그중 약 250명 가량이 여행 중에 사망하였다.

[Daniel H. Ludlow ed., Encyclopedia of Mormonism Vol. 2, "Handcart Companies," p. 571-572, Macmillan Publishing Co. 1992]

 

 

다음은 그 당시의 기록에서 발췌하여 재구성한 기록이다.

 솔트레이크 - 브리검 영 회장 - 1856년 10월 4-6일

 1856년 10월 4일 토요일:

        프랭클린 디 리차즈 형제 일행이 긴박한 소식을 가지고 솔트레이크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즉시 브리검 영 회장을 찾아뵈었고, 그날 저녁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솔트레이크로 지금 들어오고 있는 이주민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드렸다. 즉각적인 구조작업이 취해져야만 했다. 영회장님은 손수레 부대 및 마차부대가 대략 어디쯤 있는지 물었고, 그들의 수와 장비상태를 꼼꼼이 알아보신 후, 구조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따져보셨다.

 1856년 10월 5일 일요일:

        브리검영 회장은 연차대회를 위해 태버나클에 모인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오늘부터 이번 대회기간 동안 말씀하실 장로들에게 드릴 대회 주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렇습니다.  1856년 10월 5일 현재, 많은 형제 자매들이 손수레를 끌고 평원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곳으로부터 약 1,100킬로(70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데, 그들은 반드시 이곳으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구조대를 보내야 합니다. 이번 (대회의) 주제는 ‘그들을 이곳으로 인도하자’입니다.  저는 말씀하실 형제님들이 그들의 주제가 평원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것임을 주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주된 관심사는 겨울이 오기 전에 사람을 보내 그들을 이곳으로 모두 데려오는 것입니다. .... 그것은 저의 귀중한 의무이며, 제게 임하신 성신의 가르침이십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지금 갈망하고 있는 구원입니다.  구조대를 보내지 않으면 필경 죽음에 이르거나, 심대한 고통에 처하게 되고 말 우리의 형제들을 구하러 나갑시다. ...

        저는 오늘 감독님들에게 요청할 것입니다.  60개의 좋은 노새 팀과 12 내지 15개의 마차가 필요합니다.  내일이나 모레까지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황소를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좋은 말이나 노새가 필요합니다.  우리 지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찾아내야 합니다.  또한 밀가루 12톤과 짐승을 부릴 수 있는 40명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제 세분해서 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마차를 몰 줄 아는 40명의 젊은이가 필요합니다.  이들은 현재 아떻게 모는지 모르는 남자와 여자, 심지어 어린이들이 몰고 있는 마차들을 대신 가서 몰아야 합니다.  둘째로, 60 내지 65마리의 튼튼한 노새와 말에 마구를 채우고, 채찍과 멍에...등을 갖추어 줄 것이며, 셋째, 12톤의 밀가루...가 필요합니다. ...” 

        다음날(10월 6일,월) 이어진 정기 연차대회에서도 같은 주제가 계속되었다.  영 회장은 최우선적인 임무는 현재 평원에 있는 형제들에게 즉시 구조활동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꺼이 가기를 원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마차를 보낼 사람들은 연단으로 나와 명부에 기재해달라고 요청하셨다. 지원자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 회장님은 대회를 끝내고, 당신이 직접 킴볼 형제와 함께 구조활동을 시작하겠다고 하셨다. ...

        제일회장단 제일보좌이셨던 킴볼 형제님은 유머 감각을 발휘하셔서, 대회를 연기하고 그와 회장님이 즉시 이주민들을 돕기 위해 떠날 것인지에 관한 문제를 발의에 붙이셨다. 

        발의에 붙여졌을 때, 회중은 전원 “반대” 지지를 하였다. 

 

솔트레이크 - 성도들의 반응 - 1856년 10월 7일

 1856년 10월 7일 월요일:

10월 7일 아침, 네 마리 한조로 구성된 튼튼한 노새 팀 16조와 27명의 건장한 젊은이들이 조지 D. 그랜트의 지휘 하에 첫 번째로 구호물자를 싣고 동쪽으로 향했다.  그들을 뒤따를 더많은 구조대원을 모으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Leroy R. Hafen and Ann W. Hafen, Handcarts to Zion: The Story of a Unique Western Migration, 1856-1860,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Lincoln and London: 1960]]

일시

역사 일지(Journal History: JH) - 마틴 손수레 부대

구조대 일지

1856.

10. 9. 목

장 쟈크 일지 - 라라미  요새

“많은 형제들이 요새에서 물건을 샀다.  나도 가서 가지고 있던 시계를 13불에 팔고, 대신 요새 군수품 담당자한테서 비스켓 20파운드에 15센트, 베이컨 12파운드에 15센트, 쌀 3파운드에 17센트,...등 필요한 물건을 구입했다.  우리 (손수레)부대는 내일 라라미 요새를 떠날 것이다.  멀리 보이는 라라미봉이 록키 산맥에 대한 우리의 첫 느낌을 잘 말해주는 것 같았다.  웅장하지만, 음산하고, 신비스러운 느낌......

 배에 기별이 안 갈 정도이기는 해도 이때까지는 밀가루가 매일 1파운드씩 규칙적으로 지급되고 있었다.

 먹는 것은 대평원을 걸어 횡단하는 이들에게는 최고이자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 번도 충분한 음식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1856. 

10.14 

장 쟈크 일지- 플랫강

 

“32킬로(20마일) 정도 여행.  플랫강변에서 설영. ..... 몸이 말이 아니었다.  팔, 다리가 부어올랐고, 자꾸 숨이 찼다.  질파가 거의 온종일 내 수레를 끌어주었다.  아침엔 길이 험하더니, 오후엔 좋아졌다.”

1856. 

10.16 

역사 일지(Journal History) - 캐스퍼 동쪽

 

“오전 7시 30분에 여행 재개.  오후 1시경 우리는 또다시 남쪽으로 강을 건너 지나가야 했다.  35킬로(22마일) 정도를 여행한 뒤 저녁 7시 15분에 설영.  식량이 바닥났다.

1856. 

10.17 

장 쟈크 일지 - 캐스퍼 동쪽, 디어크리크 근처

 

“..... 이민자들의 체력이 점점 약해짐에 따라 가지고 갈 짐의 양이 침구류 및 주방용풍을 다 포함하여 어른-4.5킬로(10파운드), 8세 미만 아이-2킬로(5파운드)로 제한되었다.  결국 가장 절실한 물건임에도 가지고 갈 수 없게 된 (두껍고) 좋은 담뇨와 침구류, 옷들은 모두 불태워졌다.  이 추위를 뚫고 걸어가야할 길이 아직도 644킬로(400마일)나 남아있기 때문이다.

1856. 

10.18 

역사 일지(Journal History) - 와이오밍  캐스퍼

 

“아침 9시에 출발.  24킬로(15마일) 여행 후, 저녁 6시 플랫 강변에 설영.  음식은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1856. 

10.19 

장 쟈크 일지 - 폭설 급습

 

“10월 19일 우리는  레드버트에서 마지막으로 플랫교가 놓여진 위치에서 8킬로 정도 위 지점으로 플랫강을 건넜다.  지독히도 추운 날씨였다.  갑자기 겨울이 찾아들었고, 그 첫날이 바로 이날었다.  강은 넓었고, 물살은 세었다.  물은 얼음같이 차가왔으며, 깊은 곳은 물이 마차 속의 이부자리에까지 차올랐다.  강둑은 온통 자갈밭이었다.  일부 성인 남자들은 여자들을 등에 업거나 팔에 태워 나르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여자들은 치마를 질끈 동여매고 이제까지 건넜던 수많은 강,샛강들과 똑같이 이 넓은 강을 마치 여전사라도 되는 듯이 건너갔다.  겨우 다 건넜을 무렵에 지독한 북풍한파가 몰아치며 우박과 진눈깨비가 섞인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여 우리는 강을 건너 그 근처에서 캠프를 쳐야 했다.  스톤이라는 한 노인은 설사로 인해 몸에 힘이 없자, 강물을 헤치고 걸어가는 대신, 8킬로정도 떨어진 플랫교로 강을 건넌 뒤 다시 우리 팀과 합류하겠다고 하고 떠났는데, 아마도 가는 도중에 힘들고 지쳐서 주저앉았던 모양이었다.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동사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우리가 찾아내었을 때는 늑대들에게 찢겨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시신의 일부만이 발견되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일시

역사 일지(Journal History) - 마틴 손수레 부대

구조대

일지

1856.

10.19일

페이션스 일지

“.....마틴 대장님은 손수레 부대원들이 오후, 아니면 저녁까지는 모두 강을 건너야 한다고 명하셨다.  강 가운데쯤 건너고 있을 때, 한 가엾은 아저씨가 옆에서 아이를 등에 업고 건너가다가, 그만 미끄러져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익사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도와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도 죄송하다.  하지만, 자기 몸 건사하기에도 힘이 들만큼 다들 물에 빠져죽을 지경이었기에 남을 돕는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환자가 환자수송용 마차 인원 이상으로 많이 생겼다.  마틴 대장님은 이 평원을 다녀본 경험이 많고, 또 선교사업도 몇번씩 다녀오신 워드 형제님에게 환자들을 돌보는 임무를 맡기셨다.  워드 형제님은 그들을 데리고 아침에 일찍 출발하였다.  하지만 가엾게도 이 분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지독한 날씨였고, 온종일 눈이 왔으며 겨울바람이 불어댔다.  우리들 본대가 캠프를 친 뒤에도 워드 형제님 일행의 기척이 보이지 않자, 마틴 대장님은 사람을 풀어 그들을 찾게 했다.  거의 어두워질 무렵에야 사람들은 추위에 떠는 19명의 사람을 찾아 데리고 돌아왔다.  이들이 아침에 떠난 사람들 모두인지는 잘 모르겠다.......불을 때야 했으므로, 나와 동생은 나무를 구하기 위해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거의 1마일 정도 헤매어야 했다.  마른 나무는 눈에 덮여 보이지 않고, 오직 푸르른 삼나무들 뿐이었다.  그거라도 가져가겠다고 생각하여 같이 간 형제님들에게 나무가지를 쳐달라고 부탁했다.....어머니와 다른 동생들은 춥고 배고픈 속에 우리가 나무를 구해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셨던 모양이었다.....나는 얼른 나무를 패어 불을 지피고, 가지고 있던 늙은 소머리로 국을 끓였다.  나를 위해서는 물론 엄마와 가족들을 위해서 그동안 먹을 만한 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들었었다. 우리는 소머리가죽을 벗기고, 할 수 있는 만큼 잘게 잘라 그릇에 넣고 눈을 넣은 뒤 오랫동안 끓였다.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국을 먹을 수 있었다.  맛이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불쏘시개로 사용한 쑥과 생 삼나무 타는 냄새가 잔뜩 베어있었다.  하지만 요리해서 그만큼이나마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참으로 감사하였다. 소금이나 후추가 있었다면 더 맛이 있었겠지만, 그것은 벌써 오래전에 잊어버린 사치였다......”

 

1856. 

10.20 

역사 일지(Journal History) - 캐스퍼 서쪽 레드버트

 

“오늘 아침 땅에 눈이 쌓여 움직일 수가 없다.  소들은 오후에 수레로 둘러친 진 속으로 몰아넣었다.  12마리 아니면 14마리의 소가 없어졌다.  오후 3시부터 눈이 다시 오기 시작하여 한동안 계속되었다.”

1856. 

10.22 

장 쟈크 일지 - 레드버트 서쪽

 

“3일간 눈이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탈진상태였기에 향후 며칠간은 더 전진하지 말고, 캠프에 머물러 체력을 회복하자는 의견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다.  다들 눈과 함께 온 추위가 겨울의 전조일 뿐 곧 사그러들고 따뜻한 날씨로 바뀌길 원했지만 그러한 바램은 잘못된 것이었다.  밀가루 배급이 하루 4온스(1/4파운드,약 110g)로 줄었다.  또한 소를 잡아 대원들에게 배급해주었다.  하지만 소들 역시 먹지를 못해 비쩍 말라 살이 거의 없었다.......이런 모습에서 사람을 고무시킬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토록 좌절할 만한 상황임에도 대원들이 절망 속에 빠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 이럴 수가...  오히려 희망에 차고 생동감이 넘치는 분위기가 캠프를 가득 메웠다.  이때 캠프가 깊은 곤궁에 빠져있었음에도, ‘시온의 노래’는 캠프 내에서 자주 울려퍼졌다.  사람들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들의 영은 고무되어 마치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전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1856. 

10.23 

역사 일지(Journal History) - 레드버트

 

“날씨가 매우 차고매서웠다.  전날 저녁 호젯 대위부대의 제시 헤이븐이 와이즈먼 박사에게 보이기 위해 데려온 윌리암 업톤이 34세의 나이에 심장 탈저증으로 죽었다.  캠프는 눈 때문에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무렵 소들이 몇마리씩 죽어넘어갔다.”

 

역사 일지(Journal History) - 마틴 손수레 부대

구조대 일지

1856. 

10.25 토

 

엘리자벳 하롴스 잭슨 킹스포드 - 레드버트

첫번째 구조대- 세 번의 횡단지, 동쪽 하단 - R.T.버튼 기록

“라라미를 떠나 플랫강에 이르는 동안 나의 남편은 이미 병들어 있었다.  고산열이었다....그의 야망은 사라져버렸다.  그의 힘을 북돋우고자 했던 모든 노력이 다 허사였다......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10월 25일이라고 생각된다.  해질무렵이 되어서야 캠프에 도착했다.  근 며칠간 남편의 건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자꾸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날의 상태는 더더욱 심각하였다.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무엇이든 그가 먹을 수 있을 것을 준비하였다.  남편은 먹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먹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삼킬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빨리 잠자리에 뉘이는 것이 상책이었다....  남편은 금방 잠에 빠진 듯 했다.  9시쯤 나도 잠이 들었다.  옷입은 체 아무 이부자리도 없이....  그런데 한밤중이 되었을까,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지독히도 추웠다.  눈이 떠진 나는 가만히 남편의 숨소리에 귀기울여보았다.  그냥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에 손을 얹어보았다.  그 몸서리쳐지던 순간, 나는 제일 두려워했던 상황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남편은 이미 죽어있었다.   죽음의 품 안에서 차게, 뻣뻣이 굳어있었다....옆 텐트에 소리쳐 도움을 청하였지만, 나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아침이 될 때까지 시신 옆에 혼자 있을 수밖에 없었다......오직 남편을 지키며 새벽이 올때까지 기도드릴 뿐이었다.... 아, 그 잔인한 시간들, 어찌도 길게 느껴졌던지......여명이 트자, 형제들이 나와 매장준비를 하였다.  오, 그런 식의 매장에 그런 식의 장례식이라니.  사람들은 남편이 걸친 옷도 벗기지 않았다.  그냥 담요로 둘둘 싸서는 그날 죽은 다른 13명의 시신과 함께 차곡이 쌓아놓았다.  눈이 그 위로 덮였다.  땅이 꽁꽁 얼어붙었기에 무덤만들 땅을 팔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거기 누워 있었다.   주께서 나팔을 부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깨어 첫째 부활의 아침에 나올때까지 평화롭게 잠들어 있으라.  그때가 되면 우리 다시 함께 만나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으리.  그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세 아이가 딸린 과부로 전락해버리고 만 내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심정을 글로 남기고 싶지 않다.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다만 기록하는 천사가 계신다면, 복음을 지키기 위해 겪었야 했던 내 모든 고통들을 빠짐없이 다 기록하였으리라고 믿는다....

“쾌청함, 다소 추위가 누그러짐.  출발.  스위트워터강 세 번의 횡단지 하단에 캠프를 침.  여전히 눈이 깊게 쌓여있음.  3마일 떨어진 곳에서 들소떼 발견.”

1856. 

10.26 

 

첫 번째 구조대 - 데빌스 게이트  -  하비 H 클러프 일지

미리 보낸 구조대원들이 데빌스 게이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또한 손수레 부대원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딜레머에 빠졌다.  솔트레이크까지는 6백5십킬로 내지 8백 킬로(4,5백 마일)가 남아있고, 약 천명에 달하는 손수레 부대원들은 황량한 평원 어딘가에 있는데, 겨울 추위는 이미 들이닥쳐있는 상태이니......”


일시

역사 일지(Journal History) - 마틴 손수레 부대

구조대 일지

1856. 

10.27 월

 

첫 번째 구조대  - 데빌스 게이트  -  R. T. 버튼 기록

"계속 같은 장소.  식량은 그럭저럭 충분함.  손수레부대원들을 찾기 위해 또다른 구조대원들-조셉 A. 영, 아벨 가, 단 존스-을 플랫강의 다리쪽으로 급파.  상황을 신속히 보고토록 조치.”

1856. 10.28 화

장 쟈크 일지

플랫강 마지막 횡단지 / 레드버트

구조대에서 파견된 구조팀 -

캐스퍼 근처 레드버트 - 다니엘 존스

“10월 28일...예기치도 않았던 조셉 에이 영, 다니엘 더블류 존스, 아벨 가 형제가 이주민들의 박수와 눈물과 미소와 웃음 속에 쏜살같이 캠프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솔트레이크에서 보낸 구조대 중 최선봉 그룹이었다.  그들은 데빌스 게이트에 10대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다면서 보조품과식량과 의복이 가까이 준비되어있다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다.....모두가 아침에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

“다음날 정오 무렵 말을 타고 되돌아오고 있을 때였다.  길이 허락하는 한 최대의 속도로 우리는 달렸다.  20킬로(12마일)쯤 달린 뒤에 우리는 백인들의 발자국을 찾을 수 있었다.  영 형제가 소리쳤다.  ”저기 있다.“  전속력으로 달리자 곧 레드버트의 캠프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에드워드 마틴의 손수레 부대, 벤 호젯의 마차부대였다.  플랫강 횡단지 근처에 아직도 또다른 마차부대가(헌트 부대) 있었다.  이들은 처음 만났던 윌리 부대와 거의 흡사한 지경이었다.  그들은 거의 포기하려는 찰나에 있었다.  식량은 바닥날 지경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지치고 병들어있었다.  우리가 들이닥치자 그들은 다투어 악수를 청하였다.....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늘이 보내준 천사라고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이같은 상황에서는 우리가 천사보다도 더 나은 존재일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솔트레이크로부터 그들을 돕기 위해 온 건장한 사람들이며, 우리 대원들과 식량을 실은 마차들은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내 생각에 이러한 말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위안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영 형제는 사람들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매일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기운을 차리고 다시 한데 모여 즉시 움직이자고 하였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그들은 다음날 아침 이동을 시작하기로 동의하였다.....”

[Daniel W. Jones,  Forty Years among the Indians  (Salt Lake City: Juvenile Instructor Office, 1890), p. 64-65.)]

페이션스 일지

“......영 형제님은 내게 우리 중에 얼마나 죽었고, 지금 얼마나 살아있는지 물으셨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는 눈물을 터뜨리며 대장님의 천막이 어디냐고 물으셨다......그는 마틴 대장님에게 목전에 충분한 식량과 의복이 있으니 갖고 있다면 오늘 밤 밀가루를 1인당 1파운드씩 모두 배급해 주고, 소 역시 잡을 수 있다면, 그 또한 1인당 1파운드씩 나누어주라고 말하셨다.  또한 내일은 이곳을 떠나야 하며 40킬로(25마일)정도를 더 여행하면, 그곳에는 우리를 도울 사람들이 있으며, 환자들을 태울 수 있는 천막씌운 마차도 준비되어 있다고 말하셨다.......우리는 참으로 고무되었으며, 밤이 되기 전, 모두들 밀가루와 쇠고기를 지급받아 요리하기 바빴다. 참으로 비참한 지경에서 절망에 빠진 우리를 돕기 위해 와준 형제들과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으니, 그때까지 겪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이 너무도 심하였기 때문이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때보다도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우리는 확신하였다.”

일시

역사 일지(Journal History) - 마틴 손수레 부대

구조대 일지

1856

10.31 

장 쟈크 일지 - 그리스웃 크리크

1856년 11월 13일자역사일지 -

그리스웃크리크

아침에 바람. 오후 맑음

...오후에 C.H.휠롴 장로와 다니엘 존스,데이빗 가아 장로를 만났다....밤이 되어서야 그리스웃 크리크에 도착하였다.  플랫강의 마지막 횡단지에서부터 5-60킬로(3-40마일) 떨어진 지점이었다.  그곳에 조지 D.그랜트, 찰스 데커, C.G.웹, R.T.버튼 형제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여섯 대의 마차에 밀가루와 기타 구호물자들을 가득 싣고 뒤늦은 이주민을 돕기 위해 솔트레이크 계곡으로부터 나와있었다.  참으로 기쁨의 순간이었다.  그들 중에 일부는 우리를 돕기 위해 2-3킬로나 앞서 나와 대원들의 마차를 끌어주었다.  이곳에서 대원들에게 양말이며 부츠, 옷가지들이 지급되었고, 약간의 양파도 배급되었는데 최고 인기였다.  아울러 밀가루도 1파운드씩 지급되었다. 

곧 그랜트 형제가 도착하여 캠프 이동을 준비했다.  그는 조셉 A. 영에게 “네 아버지가 여기 계셨으면 어떻게 할 것 같나?”하고 물으셨고, 조셉은 “제 아버지가 여기 계셨다면, 그분은 이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이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책들과 그밖의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모아 광에 집어넣을 것입니다.”하고 말하였다.  모두 그 제안에 동의했다..... 

페이션스 일지

...하루종일 눈 속을 걸었다....캠프에 도착하였다. 5-6명의 형제님들이 마차를 갖고 와 그곳에 캠프를 치셨다.  그들은 장작을 잔뜩 쌓아놓고 있었고, 우리를 위해 이미 열두곳도 더 되는 곳에 모닥불을 지펴놓고 있었다.  깨끗한 물도 있었다.  눈녹인 물만 마셔왔던 우리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융숭한 대접이었다....따뜻한 불과 장작을 마련해준 그분들이 참으로 고마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동생 마리아와 나에게 장작 줍는 일이 주어졌었는데, 오늘같이 하루종일 힘들게 눈속을 수레를 끌고 와서 밤에 장작을 구하러 다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너무도 좋았다.  밤늦게 캠프에 도착했는데, 또다시 밀가루 1파운드씩이 배당되었다.  좋은 일이다.  앞서 말한 형제님들이 여러 가지 물건이며 옷가지를 나누어주셨다.  고맙게도 나는 잘짠 두건을 받았는데, 참 따뜻했다.  슬리퍼도 받았다.  거의 맨발로 걷다시피 했던 나였다....

일시

마틴 손수레 부대 일원의 일지

구조대 일지

1856

11. 2

페이션스 일지 - 데빌스 게이트

11. 2일자 조지 D.그랜트의 편지

장작을 배급받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느라 옷이 뻣뻣이 굳었고, 내 낡은 스타킹과 신발은 내 발에 붙은 체 얼어버린 것 같았다.  가엾은 우리 어머니는 우리가 불땔 장작을 가져오기만을 기다리며 앉아계셨다.  장작을 잘게 쪼개어 불을 지피고는 내일을 위해서 젖은 스타킹을 벗어 말렸다.  저녁 밀가루 배급은 한참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던 중에 한 좋게 생기신 형제님이 우리 모닥불가로 오시더니 우리가 한 가족인지를 물어보셨다....어머니가 그에게 딸 넷, 그리고 아들 하나, 그리고 어머니 자신까지해서 모두 여섯이라고 말해주셨다.  그는 어머니에게 남편이 없느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두달전 남편이 죽어 평원에 장사지냈다고 답해주셨다.  그는 뒷짐을 지고 서있었는데,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저녁 식사때 사용하라고 소고기 한첩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떠났다가 또다시 소뼈를 하나 가져오셔서는, “이걸로 스프는 끓이실 수 있을 거요, 불평하지는 마쇼.”하시며 건네주셨다.  그가 우리가 음식을 가지고 불평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에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 형제님, 우리는 음식이 적다고 불평해본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희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고기를 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구조팀을 급파하였고, 손수레 부대의 상황을 파악하는 대로 내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들의 안전 또한 고려해야했기에 인디펜던스롴 넘어서까지는 가지 말고 그곳에서 부대를 기다리라고 권고했다.  후에 그곳에 가서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아무 정보도 알아내지 못하였고, 우리는 함께 2-30센티 두께로 쌓인 눈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우리는 또다른 구조팀을 플랫교 쪽으로 보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놀랍게도 모든 부대원들이 플랫강 마지막 횡단지 근처에서 눈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그들 말을 빌린다면 소들도 기운을 차리게 해줄겸 9일간이나 머물러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뒤 우리는 바로 이동을 시작하여 10월 31일 그리스웃 크리크에서 마틴 부대를 만났다....우리는 마틴 부대에게 가지고 간 옷가지 등을 전했으며, 다음날 아침, 우리의 마차에 병자, 노약자, 어린이들을 태우고는 오후에 귀향을 시작했다.......

눈이 삽시간에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늦게까지 계속 내렸다.  한 번 상상해보라.  5-6백명의 남녀노소가 다 낡은 옷을 걸친 체 눈 ,진흙덩이 속을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을....곁길로 빠지기도 하고, 추위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며, 아이들은 우는데, 손발은 꽁꽁 얼어가고, 발에서는 피가 난다.  맨발로 얼음길을 걷는 이도 있었다....우리 구조대가 도움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필요에 비하면 정말 조족지혈일 뿐이다.  어림잡아 볼 때, 마틴 부대원 중에 1/3도 걷지 못했던 것 같다.  허풍이라고 할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단코 사실 그대로다.  게중에는 물론 굳은 용기과 선한 영을 지닌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어린애처럼 되어버려 스스로조차 감당해내지 못할뿐더러 그들 앞에 무엇이 놓여있는지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찰스 데커 형제는 이 길을 마흔아홉번이나 여행한 형제인데, 스윗워터강 근처에서 이즈음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린 것은 처음 본다는 것이다.[Journal History, 30 Nov. 1856 p. 23ff]

 

1856년 11월 2일 브리검 영 회장 말씀

“...이제 저는 정해진 기간 이후에 평원을 너머 이주를 시작하려는 장로들에게 부과될 징계가 따르는 지침을 내리는 바입니다.  그 징계란 바로 교회에서의 제명을 뜻할 것입니다.  이는 제가 그와 같은 뒤늦은 출발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주가 늦은 절기에 이루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부 관계자들의 무지와 실책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알고 있는 최선을 다했읍니다....(손수레) 대원들에게 힘내라고 권고했던 이들은 그 긴 선교사업을 마치고 돌아와 집에 머문지 단 이틀 만에 다시 이미 그들을 구조하러 나아갔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그들의 신앙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 반면에 대원들 중에 일부가 지닌 교만과 오만과 자부심이 사람들을 평원에서 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정신이 그들에게 있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속삭이사 협의회를 열게 하셨을 것이요 그들이 동료들을 그와 같은 고통 속에 빠지게 방치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들을 구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일시

역사 일지(Journal History)

구조대 일지

1856

11. 3

 

첫 번째 구조대 - 데빌스 게이트/마틴스 코브

R.T.버튼 기록       

여전히 같은 장소.  추위 때문에 이동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상황을 보고하고 조언 및 도움을 구하고자 그레이트 솔트레이크 시티로 조셉 영, 아벨 가아 형제가 급파되었다.

1856

11. 6

 

첫 번째 구조팀 - 데빌스 게이트 - R.T.버튼 기록       

가장 추운 날씨다.  온도계가 영하 11도를 가리킨다.  헌트 대장 팀의 물건들을 저장고에 옮겨넣었다.  이동한 부대는 없었다.  너무 추워서 움직일 수가 없다.

1856

11. 7

역사 일지(JH) - 데빌스 게이트/마틴스 코브

첫 번째 구조대 - 데빌스 게이트/마틴스 코브 R.T.버튼 기록       

극심한 추위가 계속되었다.  마차의 짐을 더 풀어 저장함.  47세의 앤 데이비스가 오후 4시경에 사망.  사인은 설사. 

추위 계속됨.  이동할 수 없다.  물건을 옮기고, 사람들과 가축들을 돌보는데 전력.

1856

11. 8

 

첫 번째 구조대 - 데빌스 게이트/마틴스 코브  R.T.버튼 기록       

바람이 그리 세지 않음.  아침에 조금 따뜻해짐.  내일 이동하기 위해 방목해놓았던 말과 소를 찾아냄.  같은 장소에서 야영.

1856

11. 9

장 쟈크 일지 - 데빌스 게이트/마틴스 코브

첫 번째 구조대 - 데빌스 게이트/마틴스 코브  R.T.버튼 기록       

데빌스 게이트에서 평의회(Council)가 열렸다.  이주민들을 이곳에서 겨울을 나게 해야할 지, 아니면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솔트레이크까지 강행군해야할지를 결정짓는 중대한 회의였다.  솔트레이크로의 행군을 계속하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일단 데빌스 게이트에 대원들의 마차가 올라오면, 이미 시작된 겨울을 대비하여 싣고 있던 대부분의 짐을 다 내려 보관해두기로 했다.  다니엘 존스의 지휘하에 모두 20명의 형제가 남아 이 짐을 지키기로 했다.  찬송과 다니엘 존스 장로의 기도로 모임이 열렸고, 그곳에서 다음의 형제들이 선발되었다...

저녁에, 저장해 놓은 물건들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남을 형제들을 호젯 부대 와 헌트 부대원 중에서 뽑기 위해 부대 지휘관들의 모임이 열렸다.  댄 존스 형제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F.M.알렉산더와 벤쟈민 험프톤이 그의 보좌로 선임되었다.  두 부대에서 열일곱명의 형제가 선발되었고, 그들의 임무에 관한 교육이 있었다....이곳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매일 저녁 함께 협의하기(Counsel) 위해 모였고, 주님께 이 추위와 폭설을 물러가게 해주셔서 이 사람들이 살게 해달라고 기도드렸다.

 

솔트레이크 -  고든 비 힝클리 회장(당시 제일회장단 제일보좌) - 1991년 10월 5일

 1991년 10월 5일 토요일:

“우리가 오늘 염려해야 할 사람은 와이오밍의 높은 평원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 가족 가운데, 우리 와드와 스테이크, 우리의 이웃과 지역 사회에 많이 있습니다....시온을 우리가 세우려면, 파괴적인 이기심을 없애야 합니다.  안락과 안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극복해야 합니다.  노력과 고통의 과정을 통해 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사랑하는 복음을 위해 믿을 수 없는 용기를 보여준 훌륭하고 용기있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경이로운 유산을 우리가 갖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맙시다.  여러분과 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일을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겸손히 간구드립니다.  아멘.”

 

영적인 교육의 중요성

고든 비 힝클리 회장

 저는 세미나리 대상자 모두가 세미나리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세미나리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줄 교리들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과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고든 비 힝클리,  Stand True and Faithful,  Ensign, 1996년 5월호, 93쪽)

 교육 분야에서, 우리는 교회가 세워지는 곳이면 어디든지 세미나리와 종교교육원 프로그램을 두어왔습니다. 그것은 전세계에 걸쳐 학생들의 삶에 영원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종교교육원에서 대학생 연령의 젊은이들은 행복한 교제를 하게 됩니다. 배움과 사회 경험, 심지어 신앙 안에서 남편과 아내를 찾습니다.  (고든 비 힝클리,  This Great Millennial Year,  엔사인, 2000년 11월호, 67-68쪽)

 복음 이해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십시오. 세미나리와 종교교육원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고든 비 힝클리, 대회 보고, 1982년 4월, 63쪽; 또한 엔사인 1982년 5월호 42쪽 참조)

 우리의 위대한 교회 교육 프로그램은 발전하고 있습니다. 세미나리와 종교교육원 프로그램을 통해서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과업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우리는 대상이 되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활용하기를 촉구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주저없이 약속 드리는 바, 여러분의 복음 지식이 증가될 것이며, 여러분의 신앙은 강화될 것이며, 여러분은 훌륭한 교제와 우정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고든 비 힝클리, 대회 보고, 1984년 4월, 69쪽; 또한 엔사인 1984년 5월호 참조, 47쪽)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그 순간의 기회를 포착하십시오. 여러분이 선택한 학교를 사랑하십시오. 그것을 여러분의 사랑스러운 어머니와 같은 모교로 삼으십시오. 그곳이 제공하는 최상의 것을 취하십시오. 또한 종교교육원 프로그램을 놓치지 마십시오. 친구들과 함께 여기저기에 펼쳐져 있는 이 (교육)시설에 모이십시오. 훌륭하고 능력있는 교사들에게 귀를 기울이십시오. 사교 활동에도 참여하십시오. 연구에 따르면, 여러분이 이렇게 할 때, 교회 소유의 학교 중 하나에 다니는 학생들과 같은 정도로 성전에서 결혼하게 됩니다. · 종교교육원 프로그램은 교회교육위원회의 입장에서 우리의 학생들이 어디에 있든지 종교적 훈육과 교회 내에서의 교제의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한 매우 진지한 시도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고든 비 힝클리,  Be Not Afraid, Only Believe,  [젊은이를 위한 CES 노변의 밤, 2001년 9월 9일], 2쪽)

 우리는 이 프로그램(세미나리와 종교교육원)에 해당되는 모든 사람들이 이를 활용하기를 바랍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이 증가될 것이며, 신앙이 강화될 것이며, 여러분은 훌륭한 교제와 우정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고든 비 힝클리, 대회 보고, 1995년 10월, 73쪽; 또한 엔사인 1995년 11월호 참조, 54쪽)

 저는 교회의 세미나리 시스템과 종교교육원 프로그램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세미나리 프로그램을 활용하도록 촉구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더큰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단과 대학과 종합대학의 학생들은 종교교육원 프로그램을 활용하십시오. 그곳은 여러분의 영원한 동반자를 찾을 수 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장소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평생동안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고든 비 힝클리,  Excerpts from Recent Adresses of President Gordon B. Hinckley,  엔사인, 1995년 12월호, 67쪽)

* 한 사람도 낙오하지 말고, 세미나리라는 대평원을 손수레를 끌고서라도 횡단해 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