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03월 22일 속죄의 기적]

속죄의 기적

1981. 9.23. 수 - 첫 만남

휴학계를 낸 뒤였지만 산악부 부원들과의 관계와 암벽등반 때문에 자주 학교에 들릴 때였다.  매 주말이면 배낭을 매고 산에 갔었다.  아버님이 당뇨병으로 고생하실 때 였으며 돈을 벌기 위해 무슨일이라도 하려던 참이었다.  친구들에게 수소문하여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군입대 영장을 기다리고 있을 때 였다.  동생은 고3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이날도 여늬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기 위해 삼선교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노라니 누군가가 뒤에서 나의 어깨를 ‘툭툭’ 치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허연 피부에 훤칠한 키의 미국사람과 가무잡잡하게 탔으며 작고 야윈 한국 사람이 흰 샤쓰에 넥타이를 맨 단정한 차림으로 웃음을 띄며 서 있었다.

그들은 앨마 Q 헤일 장로와 이인호 장로였다.  그들은 미소를 띄며 나에게 시간이 있는지를 물었고 자신들의 교회에 대해 소개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꾸밈없는 미소와 단정함과 예절바른 태도에 이끌려 그들과의 대화에 동의했다.

그들은 나를 데리고 성북동에 있는 조그만 선교사 숙소 - 그들은 그것을 비둘기 집이라고 불렀다 - 로 데리고 갔다.  아주 작은 집이었지만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지금 생각하니 그곳은 예배당도 겸하는 작은 전도소였던 것 같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나에게 ‘예언자와 사도의 필요성’에 대해 토론했고 Film strip을 보여주며 다음날 다시 만나자고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 였지만 장로교 계통 고등학교를 졸업한 덕분인지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고 꽤 진지한 태도로 경청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1981. 9.24 목 - 토론 내용

다음날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나에게 C토론을 전해 주었다.  이때 나는 요셉스미스와 몰몬경에 대해서 배웠다.  그들이 나에게 요셉스미스의 이야기를 가르치고 나서 ‘이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의 대답은 의외로 긍정적이었다. 

사실 요셉스미스의 이야기는 그 때 처음 듣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국민학교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 아주 어린 시절에 서울 어린이 대공원으로 가는 화양리쪽 어느 지하도 입구에서 어떤 형제 자매들이 - 학생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나에게 작은 팜플렛을 한권 주었었다.  그 책자에서 요셉스미스의 이야기를 읽고 곧 내버린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요셉스미스의 이야기는 나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었고 전혀 거부감을 주지 않았다.  토론이 끝난 후 그들이 다시 만나자고 했을 때 매년 가을 축제기간에 있는 ‘추계 훈련등반’ 때문에 약 10일 후로 약속을 만들었다.  북한산과 도봉산에서 며칠동안 지새며 암벽을 오르내리다가 - 도봉산 선인봉 C - 코스를 Top으로 올라갔었다(일명 노가다 코스) - 내려온 후 약속대로 다시 선교사와 만났다.

 

1981.10. 2. 금 - 잊어 버림

이인호 장로님은 다른 볼일로 어디론가 가고 대신 다른 한국장로가 함께하여 나에게  D토론을 가르쳤다.  토론이 끝나고 몰몬경을 들고 나오면서 다시 약속을 만들었다.  그러나 친구를 통해서 수소문 해 놓았던 일자리가 마침 생겨서 그곳에 취직하느라 약속을 계속 지키지 못했다. 

남산옆 후암동에 있는 어느 작은 인쇄공장이었다.  약 25명 정도의 공원들이 함께 합숙을 하며 일하는 곳이다.   식주 제공 월 6만원의 문선공 - 활자를 뽑는 일 -을 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인쇄소는 서울시내 약 100여군데 교회의 주보를 찍는 곳이었다.  하루에 19시간씩 일하며 고된 노동착취에 시달리며 약 한달 간을 일하고 그만 두었다.  공원들의 대부분이 가출하여 시골서 올라온 청소년 들이었다. 

근 한달만에 집에 돌아오니 선교사로부터 전화가 수십통 걸려 왔다고 한다.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 왔을 때는 전화가 뜸해졌을 때였고, 그 후로 선교사들로 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그들이 선사해 준 몰몬경은 나의 책장 한 구석에 꽃힌 채로 있었고 나는 그들과의 일을 잊은 채 그럭저럭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982년 초 겨울 - 몰몬경

약 3개월이 지났다.  영장은커녕 신체검사 통지서 조차 오지않아 초조하게 기다리던 때였다.  해병대 지원을 생각해 원서를 제출했다.  동숭동 APT에서 지난 겨울 아버님이 갑자기 다리에 마비를 일으키셨다.  당뇨병이었다.  건축일을 더 하실 수가 없었다.  급격히 체중이 줄어드셨다.  시골에 할머니께서 장만해 놓으신 과수원으로 모든 짐을 가지고 이사가셨다. 

나와 동생은 - 그때 동생은 고등학교 3학년 이었다 - 동숭동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삼선교에 전세방 한칸을 마련해 기본적인 취사도구와 세간만 남겨두고 자취하고 있었다.  자취방을 얻기위해 아버님과 동생과 삼선교 부근을 돌아다니다가 방을 얻었다.  지금생각하니 그 쪽에 방을 얻게 된것에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1월이나 2월쯤 된 어느 겨울날이라 생각된다.  집에 돌아와 저녁식사를 한 후 심심해서 책장을 둘러 보았다.  어릴 때 어머님께서 사다주시는 ‘어깨동무’,‘새소년’등으로 책읽기에 취미를 붙인 후 그때까지 많은 책을 읽었다.  주로 과학관계 서적들이 많았다.  읽고 난 책은 계속 책장에 꽂아 놓아 자취방이었지만 두 개의 책장에 가득 책이 있었다. 

재미있는 책을 고르다가 한쪽 구석에서 금박으로 ‘몰몬경’이라고 쓰인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책을 꺼내 들고 뒤적이며 잠시 생각하니 몇 개월전 선교사들과 만났던 일이 머리에 떠올랐고 그때까지도 약속대로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했다. 

책을 들고 책상에 앉았다.  표지와 표제지,앞에 나와 있는 그림,소개 등을 읽은 후 본문 니파이 일서 1장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런 부담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일단 어떤 재미있는 책을 대하게 되면 끝까지 읽는 습관이 나에게 있었다.  니파이 일서를 읽으며 ‘꽤 재미있는 책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계는 자정을 넘었지만 책을 대하는 나의 눈길은 떨어지지 않고 계속 되었다.  니파이 2서로 넘어가면서 전서에서 읽은 니파이의 훌륭한 신앙과 태도에 감명을 받은 채 계속 읽어 나갔다.

무엇에 홀린 듯이 책의 내용은 나를 사로 잡았으며 모든 잠이 달아났고 눈과 뇌를 연결하는 나의 신경계통은 바싹 긴장하고 있었다.  니파이의 말씀 한구절 한구절이 나의 양심을 흔들어 놓았고 구절들을 읽을 때마다 심한 격정,눈물,충격으로 온몸을 떨어야만 했었다.  죄로 점철된 그때의 나의 생활에 몰몬경은 양심을 일깨워준 회초리와 채찍이 되어 주었다. 

읽어 내려가다 이해가 안되면 다시 읽었고 그래도 무슨 뜻인지 모를때는 계속 그 구절에서 멈추어 생각을 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읽으니 니파이 1,2서를 읽는데 무려 열 시간이나 소요되었다.  책상에 앉아 읽다 허리가 아파 이부자리를 펴고 누운채로 계속 읽었다.  동생은 옆에서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책을 읽어감에 따라 나는 내가 하나님의 선하신 율법을 많이 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큰 고통을 느꼈다.  몰몬경의 한구절 한구절이 나의 마음을 마치 날카로운 창으로 찌르며 칼로 베어내는 것 같이 여겨졌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몰몬경은 나에게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 주었지만,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허가하시는 용서와 화평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 책이었다.  다음날 아침 창밖에 희끄무레한 빛이 비치는 것을 보아 내가 밤이 새도록 책을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밤새도록 읽었지만 니파이 1,2서만 읽을 수 있었다.  책을 덮고 그때까지 받은 감동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채로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이 책이 무슨 책이며 나에게 이 책을 준 선교사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그들을 찾아가 이 책에 대해 더 알아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혹 그 다음날 - 찾아감

책을 들고 작고 아담한 성북동 선교사 숙소로 찾아갔다.  벨을 눌렀을 때 어떤 아주머니가 나와 “그 사람들은 다른데로 이사갔어요. 어디로 이사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약간 실망했다.  선교사들을 만나기를 원했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나의 생활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고 과수원에 내려가 아버님일을 도와주고 자취방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약 한달이 지난 어느날 - 두 번째 만남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삼선교 켄터키치킨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늦도록 앉아 있다가 그와 헤어져 혼자 자취방으로 오고 있었다.  자취방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언덕 윗길과 언덕 아랫길이다.  약간 술기운이 감돌아 기분이 좋은채로 언덕 아랫길로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며 계속 길을 걸어가고 있노라니,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 막으며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 교회 선교사입니다. 잠깐 시간 있습니까? ” 

고개를 들어보니 벽안의 훤칠한 미국인 선교사 - 마이클 패트릭 그린 - 였다.  그러지 않아도 그들을 만나고 싶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선교사는 뜻밖이라는 듯 약간 당황하는 눈치를 보이며 함께 있던 한국인 선교사를 부른다.  그분의 이름은 김기용 장로였다.  김기용장로와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을 따라 그 바로 옆에 있는 선교사 숙소로 들어갔다.  작년에 만났던 이인호 선교사의 후임으로 새로 오신 선교사 들이었다.

그때 시간은 거의 전도가 끝날 무렵 - 9시나 10시쯤 - 이었다.  거리는 추웠고 그들은 두꺼운 코트를 입고 손발을 비비며 Street contacting을 하고 있었다.  교회에 대한 그들의 소개를 듣고 내가 그들을 만나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약속을 만들고 그곳을 나와 집으로 갈 때 마음이 몹시 즐거웠다.

그들이 나에게 전해 준 모든 토론의 내용을 지금은 잘 기억할 수 없지만 내가 그 토론들을 모두 이해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토론이 끝나면 그들은 꼭 나에게 ‘질문이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나는 그 완벽한 복음앞에서 한 마디도 질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토론을 하면서 가끔 시골 과수원에 내려가 아버님의 일을 도와 드리기도 했다.  때문에 토론이 길어졌다.

 

1982. 3.14. 일. - 모임 참석

3월이 되었고 초대된 예배모임에 참석했다.  또한 지부 청소년 활동모임에도 참석했고 즐거운 모임을 가졌다.  회원들 모두가 매우 친절했고 상냥했다.  구도자로 있으면서 삼선지부장단 1보좌로 있는 이강석 형제님과 함께 지부건물을 보수하는 일을 도왔었다.  예배모임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1982. 3.21. 일. - 회개

두 번째로 성찬식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간 후 나는 침례에 대해 생각했다.  선교사들이 가르쳐준 복음의 원리에 따라 신앙과 회개에 대해도 생각했다.  선교사와 함께 토론할 때 그들은 나에게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해 소개하며 회개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 속죄 -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죄값을 치루고 내가 용서 받을수 있단 말인가?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너무나도 컸으므로 나는 선교사들에게 ‘설사 그렇다 해도 나의 죄는 너무나 커서 주님도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즉시로 선교사는 ‘아니’라고 말했고 나에게 이사야서 1장 18절을 인용해 주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토론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며 회개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내가 나의 모든 죄를 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밤늦은 저녁 시간에 자취방을 나와 그 옆에 있는 작은 숲으로 들어갔다.  숲이라지만 나무가 듬성듬성 심어져 있는 곳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곳을 찾다가 한군데 자리를 정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죄를 사함받으며 화평과 기쁨을 얻기 바라며 지난 날의 모든 죄악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기억되는 모든 죄를 낱낱이 고백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나의 죄를 기억하며 용서를 빌 때 눈에서는 절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죄의 고백을 마쳤을 때는 통곡하고 있었고 마음이 심히 떨리었다.

기도를 끝내고 눈을 뜨고 앉았을 때 자신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나 마음만 아플뿐 아무런 기쁨이나 평온의 감정이 없었다.  기도가 부족한가 보다 생각했고 전과 같이 무릎을 꿇고 다시 기도했다.  모두 세 번의 기도를 마친 후에는 다리가 저려 일어 설수가 없을 정도였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평온이나 기쁨의 느낌은 찾아 오지 않았다.

 

1982. 3.22. 월 - 고백

다음날 아침 김기용 장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선지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선교사와 토론을 하며 이러한 말도 들은 것이 기억났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을 때는 교회의 지도자나 장로앞에 죄를 고백하며 회개해야 마음의 짐을 덜을 수 있습니다.’  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결심했다.  교회에서 선교사들을 만났고 조용한 곳에 앉아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나를 옥상으로 - 교회는 아파트의 2층이었고 옥상은 4층이다 - 데리고 갔다.  교회와 붙어 있는 학원에서 올려놓은 책상과 의자가 어지러이 널려 있는 한 구석에 돗자리가 있었다.  그것을 옥상 한 가운데 깔고 자리에 앉았다.  화창한 봄 날씨에 하늘은 맑고 푸르렀지만 나의 마음은 심히 괴로웠고 어둡기만 했다.  도저히 두 사람 모두에게 고백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김기용 장로에게 Green장로님이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다.  김장로는 동반자이므로 괜찮다고 하는 것을 간곡히 부탁하여 아래층으로 내려 보내었다.

단 둘이 마주 앉았고 잠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계속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이렇게 고백한다고 해서 나의 죄가 용서될까?  이건 정말 바보같은 짓이다.  이렇게 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이렇게 해서라도 용서받지 못하면 나는 정말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할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어젯밤엔 간절히 기도도 했지 않은가?  이제 마지막 남은 일이다.  용기를 내자! ’  결정을 내렸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을 시작했다.  나의 양심을 괴롭히는 가장 큰 죄 두가지를 이야기했다.  말을 하며 다시 마음에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번엔 어젯밤의 기도때 보다 더 큰 고통이 찾아왔다.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나의 마음을 천갈래 만갈래로  찢는 듯한 후회스러움과 가책과 고통을 겪는 가운데 고백을 마쳤을 때 나는 계속 통곡하고 있었다.  김기용 장로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 고통은 너무나도 나의 마음을 괴롭혔으며 나의 육신까지도 떨게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죽어 없어졌으면, 나의 존재가 사라졌으면 하고 바랬다.  눈물에 젖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하늘이 모두 노란 색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고통으로 떠는 나의 손을 붙잡으며 김기용 장로는 ‘형제님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말했고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의 죄 사함을 비는 그의 간구가 끝난 후 그는 다시 나에게 기도하라고 부탁했다.  이번엔 내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온 마음을 다해 나의 죄 사함을 비는 간절한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쳤고 마음은 몹시 상하였지만 잠시후 마침내 일어섰다.  눈물 자욱을 닦고 아래로 내려왔다.  두 선교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들과 헤어져 혼자 지부 건물을 나섰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일이 그 순간 일어났다.  약 1 Km 정도 떨어진 나의 자취방으로 가기 위해 막 길로 접어 들면서 마음이 괜히 즐거워 지기 시작했다.  이 느낌은 점점 더 강하게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기 시작했다.  채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엔 미소가 떠 올랐고 마침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래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머리속에서는 계속 노래를 부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콧 노래를 흥얼거리며 계속 걸어갔다. 

누군가 그러한 나의 광경 - 웃으며 콧노래를 부르는 - 을 보았다면 분명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온 육신의 손끝 발끝까지 가득 채우는 행복감이었고 즐거움이었다.  불과 조금전에 통곡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 생애에서 죄를 고백할 때 느꼈던 것보다 더 큰 괴로움은 없었으며, 그 후 집으로 돌아가며 느꼈던 것 같은 큰 기쁨과 행복도 없었다.  온 몸이 둥둥 날아갈 것 같았다.  마음이 가벼워졌고 상처입은 나의 영혼이 치료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 치료되었다. 

여기에 분명히 밝혀 두고 싶다.  그때 - 고백 -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내가 과거에 저지른 죄로 인해 전혀 양심의 가책이라든가 후회와 미련을 느껴보지 못했다.  분명 죄를 지은 사실은 기억하는데 전혀 그에 따르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나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기적이다.  아들을 믿는 나의 신앙대로 나의 회개가 받아들여졌고 용서를 받은 것이다.

 

1982. 3.27. 토. - 침례 접견

삼선교 선교사 숙소에서 Griffin장로와 접견을 마쳤다.  접견때 그는 나에게 꼬치꼬치 질문을 했다.  이미 나는 마음으로 강하게 결심했으므로 그의 질문에 모두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질문에 답하며 눈물을 글썽였던 것이 기억난다.

 

1982. 3.28. 일. - 침례

예배모임이 끝난후 회원들과 함께 1와드(용두와드)로 버스를 타고 갔다.  동스테이크 전체의 침례식을 한데 모아서 하는지라 많은 회원,선교사,구도자들이 모여 있었다.  삼선지부에서는 모두 6명이 침례를 받게 되었다.  침례가 시작되었다.  화장실에서 나의 이름을 호명하기를 기다리며 나의 마음은 차분했다. 

드디어 나의 이름이 불려졌고 마이클 패트릭 그린 장로와 함께 침례탕에 섰다.  그의 손을 붙잡았고 기도가 끝났다.  그의 팔에 의지하며 물속에 누울 때 물이 좌우로 갈라지며 나의 몸을 감싸고 다시 합쳐지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물에서 나왔을 때 지부의 회원들과 침례탕 앞에서 참관하던 회원들이 모두 ‘축하합니다’ 라고 외쳤다. 

옷을 갈아 입고 안수를 기다리며 예배당에 앉아 있는데 마음이 정말 고요하고 평온했다.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웃고 이야기하며 떠드는 데도 나의 마음속은 마치 깊은 산속 암자에 앉아 있는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김기용 장로님이 나의 머리위에 손을 얹었고 안수가 시작되었다.  진행하다가 그가 처음부터 다시 안수를 시작했다.  어떠한 축복을 받았었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현재 나는 그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축복을 받고 있다.  침례받은 후 주님은 계속 나를 인도해 주셨고 군생활 3년을 무사히 마치고 지금 선교사로서 1년 반동안 봉사하기까지 나를 보살펴 주셨다.  자신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침례받는 자는 분명 이 생에서 화평을 얻을 것이며 다음 세상에서는 영생을 얻게 되리라.  

(1987년 5-6월경 기록함, 구승훈 장로)

개종 4년 뒤인 1986년 4월 경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