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해롤드 비 리(1899-1973), 설교와 저서와 발췌문 1973년★]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해롤드 비 리 회장 (1899~1973)
   교회 회장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해롤드 비 리 회장(1899-1973), 너희는 거룩한 곳에 설지어다: 설교와 저서와 발췌문, 330~339)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 교사로서의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는 우리 각자를 인간의 신체 네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갑주를 입은 무사로 묘사했습니다. 이 네 부분은 물론 사탄과 그 추종자들에게 가장 취약한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를 통해 의의 적들은 인간의 영혼에 접근하여 침투하는 것입니다. 여기 그의 영감 받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구원의 투구[] 가지라” (에베소서 6:14~15, 17)

여러분은 보호해야 할 신체의 네 부분이 어디인지 아시겠습니까?

1. 허리에 띠를 띤다.

2. 가슴에 호심경(가슴판)을 붙인다.

3. 발에 신을 신는다.

4. 머리에 투구를 쓴다.

 

허리는 갈비의 아래 부분과 엉덩이 사이에 있어 중요한 생식 기관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또한 경전과 다른 영감 받은 기록에서 허리가 덕과 도덕적인 순결 그리고 활력을 상징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 이 가르침은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가슴(마음)일상 생활의 행동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태복음 12:34~35)

발은 인생의 여정에서 가야 할 길을 상징합니다. 머리는 물론 지성을 나타냅니다.

갑주의 여러 부분들을 만드는 재료를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덕성과 활력을 보호하려면 진리로 여러분의 허리 띠를 매어야 합니다. 진리가 어떻게 가장 치명적인 죄 중의 하나인 불순결로부터 여러분을 보호할 수 있습니까? 우선, 진리에 대한 정의를 살펴봅시다. 진리는 지식입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사물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식이니,(교리와 성약 93:24) 젊은이들의 영원한 적인 부도덕을 피하게 할 절대적인 지식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시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후손이며 그의 형상에 따라 필멸의 인간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육신의 첫 번째 부모에게 주어진 첫 계명 중 하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계명은 신성한 가르침으로서 충실하고 참된 모든 후기 성도 부부에게 반복되어 왔습니다. 이 거룩한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창조주께서는 모든 진실한 남자와 여자의 마음에 서로를 끌어당기는 강한 힘을 주셨으며, 서로 알게 되면 우정이 싹트고, 그런 다음에는 구애의 로맨스를 통해 결국은 결혼으로 성숙해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그러한 계명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분은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심으로써 그것을 살인 다음으로 중하게 다루셨습니다.(그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모든 불법적인 성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간음과 사통이라는 말을 번갈아 사용하시면서 성적인 불순결을 정의하셨으며, 그것은 모든 경륜의 시대에 권능을 갖고 있는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강력하게 정죄되었습니다.)

성전에서 현세와 영원을 위한 새롭고도 영원한 결혼 성약을 맺기에 합당하도록 준비하는 사람은 영원히 계속되는 해의 왕국에서 영원한 가족을 위한 최초의 초석을 놓은 것입니다. 그들이 받게 되는 보상은 “저희 머리 위에 영광이 영원토록 더하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온 마음을 다해 믿을 경우 이 영원한 진리는 여러분이 생명을 보호하듯 덕을 보호하기 위해 허리에 두르는 띠가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사탄의 방법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위에서 인용한 진리의 정의를 말씀하신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더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태초부터 거짓말하는 자인 저 사악한 자의 영이니라.(교리와 성약 93:25)

여러분이 복장을 단정하게 입지 않거나 깨끗하지 않은 또는 음란한 언어를 사용하거나 구애를 함부로 하도록 유혹 받을 때 여러분은 사탄의 놀이를 하는 것이며, 그의 거짓된 혀의 희생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 결혼의 신성한 목적, 그리고 영원한 미래에 대한 견해를 의심하게 하는 인간의 헛된 논리를 허용할 경우 여러분은 거짓의 아비의 희생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을 위험에서 구해 주는 진리에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생에서 마음이나 행동을 보호하는 호심경(가슴판)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가슴판이 '의'라고 불리는 것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의롭지 아니한 사람보다 우위에 있지만 겸손하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나타내지 아니하고 벗은 것을 감추듯이 덕을 감춥니다. 의로운 사람은 매일매일 자기의 잘못이나 게으름을 뉘우치고 회개해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발전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얻는가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해 더 걱정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일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하루를 끝낼 때에는 자신의 영혼과 하나님께, 그가 그 날 행한 모든 일들을 최선을 다해 행했노라고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 그의 몸은 방탕한 삶이 가하는 짐으로 인해 낭비되거나 약화되지 않습니다. 그의 판단은 젊음의 어리석음으로 불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한 비전과 예리한 지성과 튼튼한 몸의 소유자입니다. 그의 마음은 깨끗하기 때문에 의의 가슴판은 그에게 큰 힘을 줍니다.

 

갑주에 대해 계속하겠습니다. 인생의 목표 또는 목적을 나타내는 여러분의 발은 신을 신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신을 신습니까?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습니다. 이 글을 쓴 사도는 실제 경험-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준비가 승리하는 길이요 영원한 경계가 안전의 열쇠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은 준비하지 않고 기회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형벌입니다. 말씀을 하든 노래를 부르든, 신체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전쟁을 하든 최종적인 승리는 준비한 사람의 것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6)고 말한 것을 보면 고대의 철학자들은 이 준비를 인생의 초기에 시작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옛 속담은 같은 진리를 말해 줍니다. “강을 따라가면 바다에 이른다.” 또 다른 것은 이러한 경고를 해 줍니다. “쉬운 길을 따라가면 사람과 강이 굽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율법자인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전한 “너희는 … 말라”는 분명하고도 금지를 나타내는 계명으로서, 나중에 산상수훈에서는 “… 하라”는 긍정적인 내용으로 선포된 바, 이는 여러분의 삶의 훌륭한 지침이 됩니다. 복음의 계획은 우리에게 기도하고, 올바르게 생활하고, 부모에게 순종하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게으름을 그치라고 말해 줍니다. 악한 날에 견딜 수 있도록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가르침의 준비로 신을 신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을 극복함으로써” 평안을 얻는 방법을 찾습니다. 그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연고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24~25 참조) 그러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으며 갑작스런 공격에 정복되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비상시에 대비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갑주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알아 봅시다. 우리는 투구를 머리에 씁니다. 머리는 몸을 통제하는 지체입니다. 이는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잠언 23:7)이라는 말과 같이 원수로부터 잘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투구가 효력을 발생하게 하려면 정교하게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모든 의의 적과의 영원한 전쟁에서 효율적인 것이 되도록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것은 “구원의 투구”여야 합니다. 구원이란 필멸의 세상에서 선한 생활을 한 보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의 면전에서 살 수 있는 영원한 권리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의 눈이 궁극적으로 성취해야 할 것으로 바라보는 구원의 목표와 더불어, 행동을 결정하는 생각과 결정은 영광스러운 미래의 상태를 위태롭게 하는 것에 항상 도전할 것입니다. “구원의 투구”도 없이 지적인 것만 갖고 있는 사람은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지식은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며 무덤은 생명에 대한 승리요, 희망과 포부와 인생의 성취를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먹고 마시고 즐기라 우리는 내일 죽으니”라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입니다.

 

몇 년 전 이 나라를 휩쓸었던 “학생 자살”풍조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유명한 성직자로 이루어진 한 위원회가 도달한 결론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이 밝혀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목숨을 끊은 학생들은 종교에 대해 결코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며, 시련이 닥쳤을 때 매달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비참한 모습과 반대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필멸의 상태에서 자신이 바친 노력에 대해 영원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고대하는 사람은 깊은 시련을 통해 꾸준히 자신을 지탱해 나갑니다. 시련을 당했을 때 그는 자살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절망하지 않습니다. 전쟁과 파괴가 미래를 앗아갔을 때 그는 낙담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높은 곳에 살며 구원에 대한 목표를 결코 잃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호되는 우리의 지성인들은 항상 다음과 같은 복음의 기준에 의해 학문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것은 옳은가? 그것은 고무적인 일인가? 그것은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가? 인생의 모든 선택, 즉 친구, 교육, 직업, 배우자 등을 선택하는 모든 일과 그 이상의 것들은 영생만을 전념하여 구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교제가 영감을 주고 고무적이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생각부터 고무적이고 순수해야 합니다. 살인을 하지 않으려면 먼저 화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성적인 죄를 짓지 않으려면 부도덕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도죄로 감옥에 가는 형벌을 피하려면 탐내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위대하신 교사요 구주이신 예수께서도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5:21~28 참조)

“오 악한 자의 저 간교한 계획이여! 오 사람들의 헛됨과 나약함과 어리석음이여! 그들이 학식을 얻으매 자신이 현명하다 생각하며, 하나님의 권고를 듣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들이 스스로 아는 듯 여겨 하나님의 권고를 옆으로 제쳐 놓음이라. 그런즉 그들의 지혜는 어리석음이요, 그것이 그들을 유익하게 하지 못하나니 그들이 멸망하리라. (니파이후서 9:28)

머리에 구원의 투구를 쓴 성약의 자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승리의 기쁨이 그들 안에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입고 있는 갑옷에 대해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후방을 보호할 수 있는 아무런 갑옷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영원한 전쟁에 필수적인 또다른 특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게 아닐까요? 적으로부터 도망을 침으로써 전쟁에서 이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쟁은 마주 대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지난 세계 대전 때 제일회장단은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분명하게 권고해 주었습니다. “젊은 형제 여러분, 자신을 깨끗이 지키십시오. 깨끗하게 죽는 것이 더럽게 되어 귀향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옳은 것에 대한 용기와 결의와 끊임 없는 적극성은 인생의 전쟁에서 필요한 특성이며, 그 외에 우리의 보호를 위해 세상에서 제언하는 모든 갑옷은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처럼 안팎으로 무장을 하고 나면 우리는 준비가 갖추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살펴 봅시다. 우리는 싸워야 할 무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적의 공격 목표일 뿐입니까? 위대한 사도이자 교사인 바울이 우리가 지녀야 할 무기에 대해 말한 것을 읽어봅시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에베소서 6:16~17)

 

믿음의 방패에 대해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사이며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아무리 밤이 어둡더라도 등불을 갖고 있는 사람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등불을 믿음이라고 부른다.사업적인 위기와 관련하여 위대한 산업 분야의 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썼습니다. 믿음의 방패가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인생의 몇 가지 문제를 살펴보고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적의 협공 작전과 같이 아무런 쓸모 없는 세상의 가르침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옳고 그름 간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전쟁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으며,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행복해 지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시험 받고 검증된 검소와 자기 희생, 그리고 절약의 미덕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무모한 소비와 이기심을 비롯해 일반적인 사회의 덕성과 도덕의 표준을 무시하는 등의 악덕을 이겨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기 위해 임시 막사를 짓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그들의 노력에 대해 축복을 간구한 것은 개척자 조상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농작물이 자라나 수확을 거둘 수 있도록 비가 내리고 땅이 비옥해지며 파괴적인 힘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드렸습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보호하심에 대해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했습니다. 죽음과 슬픔 속에서, 홍수와 폭풍우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임하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신앙으로부터 그들에게는 여러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믿는 신앙을 갖고 그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서든 성공한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위대하신 창조주의 후손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똑같은 표시로써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은 전쟁 시에 증오를 몰아내고 그 대신 원수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 있는 질투는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면 단지 어린이가 고통 가운데 성장하듯 더 나은 이해의 과정으로 성숙해 가면서 어른이 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으로써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의 장애와 실망을 극복하고, 우리가 성공하지 못할 때 경험과 발전에 필요한 것으로 해석하며, 우리 개인의 능력에 의지하게 되는 것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우리의 능력은 기대하지 않던 발전을 가져오게 됩니다. 신앙에 의해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의 개척자가 되며, 이웃을 위한 봉사의 대가가 순교자의 면류관이라 하더라도 기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믿음의 방패”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이 어떻게 “의의 무기를” 가진 사람의 손에서 완벽하게 협력하여 함께 일하는지 살펴보십시오. 경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백병전에서 칼도 없이 오직 방패만 갖고 싸우는 사람은 곧 싸움에서 지듯이, 경전과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지 않은 우리의 신앙은 자신들을 “자유주의자”라고 부르는 현대적 파괴주의자들 앞에서 약해지게 됩니다. 신앙을 방패로 삼을 때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으로 알려진 계명은 단순한 철학자의 말씀에서 위에서 임하는 우뢰 같은 권능의 음성이 되며, 경전의 가르침은 우리를 해의 왕국의 집으로 인도하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우리가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 (로마서 13:1~2)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국법에 순종하는 것은, 시민의 의무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하게 되면, 인생의 전쟁과 고단함으로 인해 사라진 젊은 날의 꿈과 희망이 우리를 비통하게 하거나, 좌절하게 만들고, 절망에 빠져 “오, 무엇 때문에 애를 쓰는가?”라고 부르짖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은 신앙으로써, 우리는 인생을 영혼의 훈련을 위한 위대한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주관하심 아래, 우리는 “우리가 겪는 것”을 통해 배우고,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힘을 얻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두려움을 정복해야 합니다. 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8)고 하신 예수님의 높은 표준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인생에서 우리가 겪는 과정이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라 하더라도 우리의 유익과 영원한 혜택을 위한 것임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라. (히브리서 12:6)

그처럼 암흑의 세력과 영적인 사악함에 맞서도록 훈련 받고 단련된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고린도후서 4:8~9)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로마서 13:12~13)

시온의 청년들이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십시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해롤드 비 리, 너희는 거룩한 곳에 설지어다: 설교와 저서와 발췌문, 330~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