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10일 (곡반정) "[말씀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말씀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 견딜 수 없나이다

사랑하는 곡반정 와드 형제 자매 여러분,

지난 스테이크 대회에 많이 참석하여 주시고, 또 여러 책임을 맡아 훌륭하게 봉사해 준 모든 형제 자매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대회에서 제가 말씀을 할 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하신 고통 부분을 읽으면서 제 감정이 조금 격해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성역은 겟세마네에서의 고통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계속해서 선행을 베푸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고뇌에 찬 기도 후에, 유다가 배반하여 무리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주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칼을 휘둘러 어떤 사람의 귀가 잘렸습니다.  주님은 그의 귀를 붙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3: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중 하나가 뉘우칠 때, 주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그분의 어머니를 보시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시면서 자신의 사후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는 그 해석이 나와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가복음4:16)

워스린 장로님은 돌밭의 의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형태의 토양, 돌밭은 희생이나 시련의 징조가 처음 나타날 때, 대가를 치르지 않기 위해 마음의 상처를 받고 도망하는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조셉 비 워스린, “전진하라”, 174차 반연차대회, 리아호나 2004 11월호, 101)

희생이나 시련의 징조가 나타날 때, 대가를 치르지 않고 그것을 회피하는 사람이 바로 '돌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남김없이 모든 대가를 치르셨는데, 우리는 우리의 작은 시련에 대가를 치르거나 인생의 시험에 수업료를 내는데 망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맥스웰 장로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경우를 예로 들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뛰어나고 용감했던 예레미야도 한때 낙담했습니다. 조롱 받고 박해를 받으면서, 그는 잠깐 동안 더 이상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견딜 수 없나이다”(예레미야 20:9)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한계점에 다다랐지만, 꺾이지 않았습니다!”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소중한 약속”, 리아호나 2004 4월호, 10)

브리감 영 회장님은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증명하는 혹독한 시련을 주시지 않고는 뛰어난 축복을 그들에게나 개인에게 결코 내려 주시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고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19)

야고보서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3~4)

스코트 장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행사가 성품을 만들어 줍니다. 강화된 성품은 신앙을 행사하는 여러분의 능력을 넓혀줄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시련을 극복하는 여러분의 자신감은 더욱 강해집니다. 그리고 강화시키는 이러한 순환 작용이 계속됩니다. 여러분의 성품이 강화되면 될수록, 더 큰 신앙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리차드 지 스코트, “불확실과 시험의 시기에 지켜주는 신앙의 힘”, 173차 연차대회, 리아호나 2003 5월호, 75)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마가복음4:17)

““가시떨기는 세상의 염려와 부, 그리고 욕[]에 의해 미혹되어 발전이 멈추는 교회 회원을 나타냅니다.” (조셉 비 워스린, “전진하라”, 174차 반연차대회, 리아호나 2004 11월호, 101)

세상의 염려는 근본적으로 교만이라고 위스린 장로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7년 전인 1989 4월 연차대회에서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님께서 교만을 조심하십시오라는 주제로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그분의 말씀을 인용하여 교만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교리와 성약은 몰몬경이타락한 백성들의 기록”(교성20:9) 임을 말해줍니다. 왜 그들은 타락 했습니까? 그것이 몰몬경의 주요 메시지의 하나입니다. 몰몬경은 끝 부분의 장에서 이와 같이 답해줍니다. (모로나이서 8;27) “이 나라 곧 니파이 백성들의 교만함을 보라. ... 이 교만으로 인하여 멸망하리로다.” 우리가 그 타락한 백성들로부터 나온 중요한 몰몬경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게 하시려, 주님은 교리와 성약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교만을 조심하여 옛 니파이인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하라.”(교성38:39)

우리는 대체로 교만을 자기 중심, 자만, 자랑, 거만함 또는 오만함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죄의 요소들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교만의 중심적인 양상은 적대감,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적대감입니다.  적대감이란 증오의 감정, 적개심, 또는 반목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능력으로 사탄은 우리를 지배 하고자 합니다.

교만한 자는 다른 사람보다는 자신의 지성과 의견, 행실, , 재능 또는 기타 세상적인 평가 기준을 내세움으로써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듭니다. ‘시 에스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만은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 데서 즐거움을 얻기보다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다. 비교하는 것, 즉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다는 즐거움은 인간을 교만하게 한다. 비교의 요소가 사라지면, 교만도 사라진다.“(순수한 기독교 정신,109-110p)

노아 왕은 선지자 아빈아다이를 풀어주려 했으나, 그의 사악한 제사들이 그의 교만에 호소하여 아빈아다이를 불길 속에 처넣게 했습니다. 헤롯은 침례 요한의 목을 베라는 그의 아내의 요청을 받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곁에않은 자들에게 좋게 보이려는 교만한 욕망이 요한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교만은 다른 사람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나 우리자신에 있는 것은 거의 인정하려 들지 않는 죄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교만이란 저보다 못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부자나 학식 있는 자와 같은 높은 사람들의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사이에서 훨씬 더 흔히 보게 되는 문제는 밑에서 올려다 보는 사람들에게 서 나타나는 교만입니다.  그것은 결점 찾기, 험담, 비난, 불평, 분수에 넘는 생활, 질투, 탐심, 배은망덕, 용서하지 않고 시기함 등 너무나 많은 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만의 다른 모습은 논쟁하는 것입니다. 말다툼, 싸움, 불의한 지배, 세대 차이, 배우자 학대, 이혼, 폭동 및 소요... 이러한 모든 것은 교만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경전은 교만한 자는 쉽게 화를 내며 악의를 품는 다고 증거해 줍니다. (니일16:1-3 참조) 그들은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 두고 용서하지 않고 상처받은 그들의 감정을 정당화 시키려 듭니다.

교만은 우리의 모든 관계 즉, 하나님과 그의 종과 우리와의 관계, , 하나님과 그의 종과 우리와의 관계,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고용주와 고용인, 교사와 학생의 관계 등 모든 인류의 모든 인류의 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교만은 때와 정도를 가리지 않고 영향을 미칩니다. 이제 여러분은 세상의 교만을 나타내는 리하이의 꿈에서 본 건물이 왜 그처럼 크고 넓었으며 그곳으로 들어간 무리들이 많았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니파이일서8:26,33,11:35-36)

교만은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 죄이며, 큰 악입니다.   교만의 치료제는 겸손, 즉 온유함과 순종입니다.

앨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겸손해지는 자에게 복이 있으리니.” (앨마서 32:16)

스스로 겸손해지도록 합시다.

우리는 형제 자매에 대한 적대감을 없애고 그들을 우리 자신과 같이 존중하며, 우리와 같이 또는 더 높이 올려 줌으로써 스스로 겸손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권고와 징계를 받음으로써 스스로 겸손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상하게 한 사람들을 용서해 줌으로써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헌신적으로 봉사함으로써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교사로 나가 다른 사람들을 겸손하게 할 수 있는 말을 전파함으로써 스스로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좀더 자주 성전에 들어감으로써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버려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 태어남으로써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성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맡겨 교만한 육으로 된 자기를 버리고” “주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성도가 되며” “어린 아이같이 되어 유순하고, 온유하며, 겸손하게 되어야 합니다.(모사이야서3:19, 앨마서13:28 참조)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 “교만을 조심하십시오”, 159차 연차대회, 리아호나 1989 7월호, 4)

 

마지막으로 애쉬튼 장로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저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좋은 점을 말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말하지 마십시오."

가장 큰 사랑은 우리가 서로에게 친절할 때,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어떤 범주 속에 집어넣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노하기보다는 좋은 의도가 있겠지라고 단순히 생각하거나 조용히 있을 때 생기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차이점과 약점과 단점을 수용하거나 우리를 실망시키는 사람들에게 인내심을 갖고 대하거나 다른 사람이 우리가 바라던 대로 어떤 일을 처리하지 않을 때 화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가장 좋고 가장 명확한 지표는 바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마빈 제이 애쉬튼(1915~1994),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162차 연차대회, 성도의 벗 1992 7월호, 18)

 

최근 몇 년간 리아호나에 실려있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메시지를 제가 소홀히 한 것 같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오늘 말씀 드린 것과 같은 참으로 귀한 말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복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권능을 지닌 하나님의 참된 복음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생의 시련을 하늘로부터 오는 교훈으로 알고 인내하며 견딜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남편과 아내로서, 부모와 자녀로서, 형제와 자매로서, 우리의 이웃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됩시다.  곡반정 와드의 회원들 모두가 서로에게 친절하고 사랑을 베풂으로써 이곳에 하나님의 시온이 건설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2006 12 10, 수원 스테이크 곡반정와드 성찬식에서, 스테이크 회장구승훈 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