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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고린도후서 3장: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11장. 12장.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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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The gospel surpasses the law of Moses—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

고린도후서 1~5장 소개 및 연대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이 두 번째 서한에서 우리는 일부 고린도 성도들과 바울 사이에 불화가 고조되고 있었다는 증거를 보게 된다. 고린도 교회 회원들의 소수 무리는 바울을 반대하며 그들 가운데에서 바울의 영향력이 축소되기를 바랐다. 바울에게 가해진 비판 중 일부는 그가 이전에 고린도를 방문하겠다고 약속하고서 그것을 취소한 일 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이것을 이유로 일부 사람들은 바울을 불신했다.(고린도후서 1:15~19 참조) 바울은 자신의 행위와 성역을 변호하고(고린도후서 2:12~17; 3:1~6; 4:1~5; 5:19~20 참조), 고린도인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으며,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할 때 얻는 평안을 가르쳤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쳤다. 바울은 독자들이 그의 가르침에 대한 살아 있는 본보기가 되도록 독려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린도후서 3:2)  

고후 3: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Do we begin again to commend ourselves? or need we, as some others, epistles of commendation to you, or letters of commendation from you?

고린도후서 3:1~2. 일부 사람들은 교회 회원들의 모범을 보고 교회를 판단한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자신을 반대하고 자신의 명성을 손상시키려는 사람들에 대응하여, 다음과 같은 수사적인 질문을 던졌다. “내가 합법적인 사도임을 증명하는 추천서가 정말로 필요하겠느냐?” (고린도후서 3:1 참조) 이 질문에서 바울은 새로운 지역 사회를 방문할 때 추천서를 지니고 다녔던 고대의 관습을 언급한 것이었다.(또한 사도행전 18:27; 로마서 16:1~2 참조) 그러한 추천서에는 주로 사람들에 대한 소개, 그들의 성품에 대한 증명, 그들이 불법 침입자나 사기꾼이 아님을 증언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런 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변화된 삶이 이미 최고의 “추천서”가 되며, 성도들의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내신 편지와 같기에, 바울이 올바른 권세를 지녔음이 그것으로 증명된다는 점을 말했다.(고린도후서 3:2~3 참조; 또한 고린도전서 9:2 참조)

교회 회원들이 곧 뭇사람이 읽는 편지와 같다는 바울의 말은, 교회 회원들이 하는 개인적인 행동을 보고 많은 사람이 처음으로 교회를 알고 그 참됨을 판단하게 됨을 시사한다. 가게 주인이 그가 판매하는 상품으로 판단되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가 사는 삶에 따라 판단을 받으신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궁극적 의미에서 복음은 돌판이나 경전이 아니라 충실하고 순종하는 개개인의 몸에 쓰여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진리가 담긴 살아 있는 편지이며, 그들의 삶은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펼쳐진 책과 같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2:414)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이 사업을 좌절시킬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바로 회원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교리와 표준에 불순종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들 각자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 사업은 세상이 우리의 행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판단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대로 생활하고자 하는 의지와,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올바른 일을 하게 해 주는 자제심과,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 앞에서 이 대업을 선포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의를 가질 수 있게 해 주[십니다.]”(“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성도의 벗, 1997년 1월호, 51쪽) 

고후 3: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Ye are our epistle written in our hearts, known and read of all men: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Forasmuch as ye are manifestly declared to be the epistle of Christ ministered by us, written not with ink, but with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not in tables of stone, but in fleshy tables of the heart.

고린도후서 3:3. “육의 마음판”

바울은 모세 율법의 계명이 돌판에 쓰인 반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은 복음을 “육의 마음판”에 쓸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린도후서 3:3)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회장은 복음의 교리가 우리 육의 마음판에 쓰일 때 그것은 우리 “성품의 일부가” 된다고 설명했다.(“경전의 안내에 따라 생활함”, 리아호나, 2001년 2월호, 21쪽) 복음 교리를 내면화하는 이 과정은 성신의 권능을 통해 일어난다. 

고후 3: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And such trust have we through Christ to God-ward: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Not that we are sufficient of ourselves to think any thing as of ourselves; but our sufficiency is of God;

 

고후 3: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Who also hath made us able ministers of the new testament; not of the letter, but of the spirit: for the letter killeth, but the spirit giveth life.

고린도후서 3:6.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새로운 성약을 의미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 칭했다. 그는 모세 율법인 옛 성약을 “조문”으로, 새 성약을 “영”으로 언급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쿠엔틴 엘 쿡 장로는 다음과 같이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계명에서 “영” 또는 “왜”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에 적용하여 설명했다.

“대체로 교리는 ‘왜?’라는 질문에 답을 주며, 원리는 ‘무엇?’이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하는가, 또는 무엇을 하는가에 관한 언급 없이 어떻게 하는가를 강조할 때마다 정도를 지나칠 위험성이 있습니다. 가장 작은 일에서라도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라고 한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고린도후서 3:6)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님은 아론 신권 집사들이 따르는(흰 셔츠를 입고, 가능하다면 넥타이를 매고, 또 단정한 방법으로 성찬을 전달하는 일과 같은) 규칙이 주님께서 성찬식에서 우리가 성취하기를 바라시는 것(성약을 새롭게 하고 경건한 방법으로 속죄를 기억하는 일)을 뒷받침한다는 점을 그들이 이해하도록 그들에게 성찬식의 교리와 원리를 가르치는 예를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아론 신권과 성찬”, 리아호나, 1999년 1월호, 37~40쪽 참조] 여러 면에서 우리는 규칙보다는 교리와 원리의 인도를 받습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나는 그들에게 올바른 원리를 가르쳐 그들이 스스로를 다스리게 합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년), 284]. 우리는 그러한 상황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대해 주님 앞에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정도를 지나쳐”, 리아호나, 2003년 3월호, 24쪽) 

고후 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But if the ministration of death, written and engraven in stones, was glorious, so that the children of Israel could not stedfastly behold the face of Moses for the glory of his countenance; which glory was to be done away:

고린도후서 3:6~17. 새 성약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다

고린도후서 3장 6절 14절에 “언약[testament]”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diathēk의 주된 의미는 “성약”이다. 따라서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명확하게 신약전서[New Testament]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새로운 성약을 의미한 것이었다. 바울이 “구약[old testament: 옛 언약]을 읽”는다고 언급한 것은(고린도후서 3:14) 옛 성약, 즉 기독교인들이 구약전서[Old Testament]라고 부르는 책에 실린 모세 율법을 의미했다.

바울이 새 성약이 사람들의 마음에 쓰인다고 가르친 것은(고린도후서 3:3 참조) 예레미야의 다음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 새 언약을 맺으리라. …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예레미야 31:31, 33) 바울은 또한 구약전서에 나오는 비유를 들어서, 모세의 얼굴에 덮인 “수건”과 경전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덮인 “수건”에 대해 이야기했다.(고린도후서 3:13~16; 또한 출애굽기 34:29~35 참조) 바울은 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율법을 이해하는 데 “완고하[blinded]”다고 가르쳤다.(고린도후서 3:14; 또한 로마서 11:7, 25 참조)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의 조셉 스미스 역, 고린도후서 3장 16절에는 “[이스라엘 자손의] 마음이 주께로 돌아가면 그 [오해의] 수건이 벗겨지리라”라고 나온다. 이것은 마음을 주께로 돌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이는 영이 그들에게 경전과 복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3:16~17; 조셉 스미스—역사 1:73~74 참조) 

고후 3: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How shall not the ministration of the spirit be rather glorious?
고후 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For if the ministration of condemnation be glory, much more doth the ministration of righteousness exceed in glory.
고후 3: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For even that which was made glorious had no glory in this respect, by reason of the glory that excelleth.
고후 3: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For if that which is done away was glorious, much more that which remaineth is glorious.
고후 3: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Seeing then that we have such hope, we use great plainness of speech:

고린도후서 3:12.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소망의 교리에 대해 읽어 보려면, 히브리서 6:11, 18~19 주해를 참조한다. 

히브리서 6:11, 18~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바울은 자신의 독자들이 소망을 품기를 바랐다.

“소망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우리는 ‘의의 일’을 할 경우, ‘이 세상에서는 평화를, 장차 올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교리와 성약 59:23) …

소망의 원리는 영원까지 이어지지만, [일상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도 소망을 통해 감당할 힘을 얻을] 수 있다.”(신앙에 충실함: 복음 참고서[2004], 91쪽)

제일회장단의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장은 수많은 경전 구절을 사용하여 소망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소망은 영의 은사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을 통해 우리가 영생으로 부활한다는 소망이며, 이는 구주를 믿는 우리의 신앙 때문입니다. 이런 소망은 약속의 원리이자 계명이며, 우리는 모든 계명과 함께 그것을 우리의 삶의 일부로 만들어야 하고 소망을 잃게 하는 유혹을 극복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행복의 계획에 대한 소망은 평강, 자비, 기쁨 즐거움으로 이어집니다. 구원에 대한 소망은 보호해 주는 투구이며 신앙의 기초가 되고 우리의 영혼에 닻이 됩니다.”(“무한한 소망의 힘”, 리아호나, 2008년 11월호, 21~22쪽)

고후 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And not as Moses, which put a vail over his face, that the children of Israel could not stedfastly look to the end of that which is abolished:

 

고후 3: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But their minds were blinded: for until this day remaineth the same vail untaken away in the reading of the old testament; which vail is done away in Christ.

 

고후 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But even unto this day, when Moses is read, the vail is upon their heart.

 

고후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at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

고린도후서 3:17. 주님의 영은 자유를 가져다준다

바울은 우리 마음에서 맹목의 수건이 벗겨지면, 주님의 영이 우리 삶에 자유를 가져오게 된다고 가르쳤다.(고린도후서 3:17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대적의 사로잡힘에서 자유로워진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다음과 같이 간증했다. “복음은 너무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억압의 철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욕구를 다스리고 행위를 인도하는 자유의 계획입니다. 그 열매는 달콤하고 그 상은 풍성합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65, 78; 또한 요한복음 8:30~32 주해 참조)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선택의지와 자유를 파괴하려는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라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인간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은 모든 영원으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했던 영원한 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자녀들이 당신을 따르거나 아니면 당신의 율법을 거역하고 루시퍼와 함께 멸망하도록 [전세]에서 선택의지의 율법을 제정하셨다. 그리고 시험의 기간인 이 지상 생활에서 인간에게 선택할 자유, 즉 순종하여 구원을 얻거나 불순종하여 저주를 받을 자유가 다시금 주어졌다. 사탄은 늘 인간의 선택의지를 멸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는 여러 교회와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예배의 자유를 거부하게 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도록 강압한다.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할 개개인의 권한을 축소하거나 거부하는 정부 및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의 권능으로 인도받지 않는 것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2:415–16)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But we all, with open face beholding as in a glass the glory of the Lord, are changed into the same image from glory to glory, even as by the Spirit of the Lord.

고린도후서 3:18.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사도 바울은 주님의 영이 우리 내면에 역사할 때, 우리는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고린도후서 3:18) 그분께 더 가까워진다고 기록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나오는 “변화하다[changed]”(metamorphoō)라는 단어는 마태복음 17장 2절 마가복음 9장 2절에서 “변형하다[transfigured]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변화하다[transformed]”로 번역된 말과 같은 의미이다. 이 단어는 극적이며 근본적인 변화, 탈바꿈을 나타낸다.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당신처럼 영화로운 존재가 되게 하는 수단이다. 앨마도 이와 유사한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영적으로 태어날 때 우리의 모습에서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고 가르쳤다.(앨마서 5:14; 로마서 8:29 주해 참조)

“영광에서 영광에”라는 문구는 “점점 더 영광을 더하여” 또는 “더 높은 등급의 영광에”로도 번역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점차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되는 인간의 잠재력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녀가 될 때 우리는 우리 영의 아버지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용모, 성품을 띠기 시작한다.(모사이야서 5: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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