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막. 눅. 요.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계. TITLE

주석 누가 복음 15장: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11장. 12장. 13장. 14장. 15장. 16장. 17장. 18장. 19장. 20장. 21장. 22장. 23장. 24장.

Prev Chap. Next Chap.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소개 잃어버린 양의 비유. 은전 한잎의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 Jesus gives the parables of the lost sheep, of the piece of silver, and of the prodigal son.

누가복음 15~17장. 베레아 성역

누가복음 15~17장에 기록된 구주의 가르침 중 적어도 일부는 요단 강 동쪽에 있는 베레아 지방에서 전해졌으며, 그 기간은 몇 주일에 불과하지만 이 가르침은 이른바 베레아 성역의 한 부분을 이룬다.

이 성역에 대해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이렇게 기록했다. “당시 유대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가졌던 적개심이 너무도 컸으므로,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셨다. 그가 희생될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예수께서 스스로 허용하시지 않으면 적들이 그를 죽일 수 없으나, 그들의 방해가 심하면 주님의 사업이 지체되게 된다. 주님은 침례 요한이 공적 성역을 시작하였던 곳으로 돌아가셨는데, 이곳은 아마 주님이 침례를 받으셨던 곳인 듯하다. 정확한 위치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곳은 분명히 요단강 건너편이었으므로 베레아 지방이었을 것이다. … 그러나 그곳까지도 그를 찾아와 믿는 사람이 많았다.”(예수 그리스도, 491쪽)

누가복음 15~17장 소개 및 연대

누가복음 15~17장에 기록된 사건들은 구주의 성역 막바지에 그분께서 갈릴리에서 베레아 지방 등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누가는 잘 알려진 비유들인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탕자를 포함하여 구주의 몇몇 비유를 기록했다.(누가복음 15장 참조) 이 세 가지 비유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야 하는 우리의 책임, 그들이 그분께로 돌아올 때 맛보는 기쁨, 그리고 당신의 모든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 준다. 구주께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누가복음 16:1~12 참조) 우리가 심판의 날을 끊임없이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주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의 독선과 탐심을 비난하셨으며(누가복음 16:19~31 참조),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태도는 다음 생에서 고통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무익한 종의 비유와(누가복음 17:7~10 참조) 구주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치신 이야기에서(누가복음 17:11~19 참조)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과 우리가 그분에게 은혜를 입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배울 수 있다. 

눅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Then drew near unto him all the publicans and sinners for to hear him.

누가복음 15:1~2.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들이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하셨다며 투덜거렸기 때문이었다.(누가복음 15:1~2 참조; 유대인들은 특히 세리를 혐오했다.) 이 비유들은 자신을 영적인 지도자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들은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고, 그들 중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기뻐하는 것이 마땅했다. 복음서에는 구주께서 잃어버렸거나, 도움이 필요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시어 타인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본보기를 보이신 예들이 무수히 기록되어 있다.(마가복음 5:1~8; 누가복음 5:29~32; 19:1~10; 요한복음 9:35~38 참조)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이 비유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백 마리의 양은 백 명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들이 구주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경멸하는 몇몇 사람들, 혹은 가난한 세리 한 명”을 찾기 위해 양 우리 밖으로 나가셨을 것이다. 그분이 회개하고 구주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그들은 “하늘에서 기쁨”을 누리게 되었을 것이다.(History of the Church, 5:262) 이 해석에 따라, 구주께서 하신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신들도 회개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도록 꾸짖으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어디에 있든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기를” 명하셨기 때문이다.(교리와 성약 133:16; 또한로마서 3:23; 요한1서 1:8; 교리와 성약 18:9, 42 참조) 

눅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And the Pharisees and scribes murmured, saying, This man receiveth sinners, and eateth with them.
눅 15: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And he spake this parable unto them, saying,

누가복음 15:3~7. 잃어버린 양의 비유

십이사도 정원회의 조셉 비 워스린(1917~2008) 장로는 사람들이 주님과 교회 활동에서 벗어나는 이유에 대해 가르치면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 담긴 메시지를 이렇게 적용했다.

“일부는 다르기 때문에 길을 잃습니다. 그들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다르기 때문에, 무리로부터 점차 멀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주위 사람들과 다르게 보고, 행동하며, 생각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때때로 자신이 이 교회에 맞지 않는다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교회에서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연민을 보이기만 해도,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문제와 슬픔들이 가벼워질 것입니다.

일부는 지쳤기 때문에 길을 잃습니다. 너무 벅차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매일 직면하는 모든 스트레스와 시간에 대한 압박과 요구가 있기에, 지치게 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낙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너무 약해서 기여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무리가 앞으로 나아갈 때, 점차적으로 거의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뒤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잃어버린 한 사람에 대한 관심”,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18~19쪽)

브루스 시 하펜 장로는 브리검 영 대학교 교무처장으로 있을 때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비슷하게 적용한 바가 있다. 그는 우리가 모두 삶의 어느 시기에 잃어버린 양처럼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단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만이 잃어버린 양은 아닙니다. … 자녀 출산과 관련하여 어려움을 겪는 어머니도 잃어버린 양입니다. 집에서 멀리 떠나 생활하면서 고독과 유혹을 경험하고 있는 젊은이 역시 잃어버린 양입니다. 꼭 필요한 직장을 막 잃은 사람, 재정적 위기에 봉착한 사업가, 외국 문화를 접한 신출내기 선교사, 갓 감독으로 부름받은 사람, 서로 오해하고 있는 기혼자 부부, 또는 자식이 찾아오지 않는 노인도 잃어버린 양입니다. 저는 잃어버린 양입니다. 여러분도 잃어버린 양입니다. ‘우리는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사야 53:6; 강조체 추가)

길을 잃은 느낌은 우리가 곧고 좁은 길에서 벗어났을 때만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있기를 바라시는 곳에 있음에도 그렇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The Broken Heart: Applying the Atonement to Life’s Experiences [1989], 60) 

눅 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What man of you, having an hundred sheep, if he lose one of them, doth not leave the ninety and nine in the wilderness, and go after that which is lost, until he find it?
눅 15: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And when he hath found it, he layeth it on his shoulders, rejoicing.
눅 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And when he cometh home, he calleth together his friends and neighbours, saying unto them, Rejoice with me; for I have found my sheep which was lost.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I say unto you, that likewise joy shall be in heaven over one sinner that repenteth, more than over ninety and nine just persons, which need no repentance.
눅 15: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Either what woman having ten pieces of silver, if she lose one piece, doth not light a candle, and sweep the house, and seek diligently till she find it?

누가복음 15:8~10.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동전을 잃어버린 것은 소유자의 부주의 때문이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여인은 누군가를 영적으로 돌보고 보살피는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을 상징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교회 회원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적절히 돌보지 못해서 한 교회 회원을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함으로써 구주의 비유를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있다.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특히 교회의 새로운 회원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주님의 사업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우정이 있어야 합니다. 거짓 없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를 표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으로 끊임없이 양육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일은 작은 것들이며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상당히 큰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가장 큰 비극은 교회에 가입했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런 일이 일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 이 교회에 가입하면서 변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전의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합니다. 친구를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귀하게 아끼던 신념을 버리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습관의 변화와 취향을 억제하는 것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고독과 심지어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개종자의 생애에 이런 어려운 시간이 닥치면 그들을 키워 주고 강화해 주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선교 사업”, 성도의 벗, 1988년 3월호, 5쪽)

다른 모임에서, 힝클리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개종자 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실질적으로 잘 도와서 자신의 길을 찾게 해 주어야 합니다. 개종자 한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곧 친구와 책임,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모로나이서 6:4)으로 양육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기회입니다.”(“개종자와 청남”, 성도의 벗, 1997년 7월호, 47쪽)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교회에서 활동적으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왜 손을 내밀어야 하는지를 이렇게 가르쳤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너무나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통해 우리 모두를 구속하시고자 크나큰 값을 치러야 하셨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교회에서 활동적인 회원이 되고자 노력하는 이들을 양육하고 가르치지 못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이 결코 헛되게 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우리는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까?”, 리아호나, 1999년 1월호, 8쪽) 

눅 15: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And when she hath found it, she calleth her friends and her neighbours together, saying, Rejoice with me; for I have found the piece which I had lost.
눅 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Likewise, I say unto you, there is joy in the presence of the angels of God over one sinner that repenteth.

고든 비 힝클리 회장 : “저희 회원들 중에는 고통, 역경, 외로움, 두려움 등으로 절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희들에게는 누군가가 굶주렸다면 먹이거나 돕고 용기를 주며, 진리와 의에 목마른 사람이 있다면 그 영을 양육해야 할 크고 엄숙한 의무가 있습니다. ...

"한 때는 신앙이 뜨거웠다가 차갑게 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대다수는 돌아오고 싶지만 방법을 잘 모릅니다. 이들에게는 따뜻한 우정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조금만 노력을 해도 많은 이들이 다시 주님의 식탁에 돌아와 성찬을 들게 할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 우리들 각자가 도움이 필요하고 또 절망적인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 사랑의 정신으로 그들을 들어올려 교회의 품 안으로 안기게 하겠다고 결심하기를 바라며, 또 간구합니다. 그 곳에서 강한 팔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대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지지하여 행복하고 건설적인 생활을 누리게 하도록 돕기 바랍니다."(성도의 벗, 1997년 1월호, 86쪽)

눅 15: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And he said, A certain man had two sons:

누가복음 15:11~32.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장 11~32절에 나오는 비유는 특정한 명칭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탕자의 비유로 알려져 있다. 탕자라는 단어는 낭비벽이 심하고 돈을 무모하게 함부로 쓰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비유에는 두 명의 아들이 나온다. 하나는 낭비벽이 심하고(누가복음 15:11~24 참조), 다른 하나는 성마른 아들이어서(누가복음 15:25~32 참조) 둘 다 그들의 아버지와 화해할 필요가 있었다. 

눅 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And the younger of them said to his father, Father, give me the portion of goods that falleth to me. And he divided unto them his living.

누가복음 15:12~13.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구주 시대의 관습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야만 유산을 받았다. 아들이 아버지가 사망하기 에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굉장한 모욕이었을 것이다.(누가복음 15:12~13 참조) 이 아들의 요구는 자신의 아버지, 가정, 양육, 심지어 지역 사회 전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눅 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And not many days after the younger son gathered all together, and took his journey into a far country, and there wasted his substance with riotous living.

누가복음 15:13. “먼 나라”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유산을 나누어 준 후 얼마 안 되어, 낭비벽이 심한 아들은 자신의 재물을 모두 다 들고 떠났다. 그는 부모의 보호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뿐 아니라 자신의 미성숙함도 드러내었다. “먼 나라”라는 말은 아마도 이방인의 나라를 의미하며, 둘째 아들의 반항이 극단적이었음을 보여 준다.(누가복음 15:13)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는 이런 상세한 사항을 우리 각자에게 다음과 같이 비유했다. “탕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악한 분위기의 록 공연이라는 ‘먼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먼 나라’에 대한 거리는 킬로미터로 측정되는 것이기보다는 우리의 마음과 뜻이 예수님에게서 얼만큼의 거리가 떨어져 있는가에 의해 측정되는 것입니다! (모사이야서 5:13 참조) 지역적 위치가 아니라 충실함이 하나님과의 거리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 리아호나, 2001년 1월호, 44쪽) 

눅 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And when he had spent all, there arose a mighty famine in that land; and he began to be in want.

누가복음 15:14~17. 탕자가 돼지를 치는 일을 시작하다

모세 율법에서 돼지는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다.(레위기 11:7) 그러므로, 탕자가 모욕적인 돼지 치는 일을 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며, 그것은 또 다른 치욕의 표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마침내 “스스로 돌이[켰다.]”(누가복음 15:17) 이 말은 그가 자신의 범법 때문에 비참한 상황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했음을 시사한다.(모사이야서 2:40 참조) 닐 에이 맥스웰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어쩔 수 없어 겸손하게 되는 것이 효과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스스로 겸손하게 되는 것이 더욱 훌륭한 일입니다. (앨마서 32:13~14 참조) 기근이 영적인 배고픔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세상의 유혹”, 리아호나, 2001년 1월호, 44쪽) 

눅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And he went and joined himself to a citizen of that country; and he sent him into his fields to feed swine.
눅 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And he would fain have filled his belly with the husks that the swine did eat: and no man gave unto him.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And when he came to himself, he said, How many hired servants of my father’s have bread enough and to spare, and I perish with hunger!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I will arise and go to my father, and will say un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before thee,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And am no more worthy to be called thy son: make me as one of thy hired servants.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And he arose, and came to his father. But when he was yet a great way off, his father saw him, and had compassion, and ran, and fell on his neck, and kissed him.

누가복음 15:20~24.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이 비유가 전해졌던 당시에 탕자와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돌아오자마자 대중의 경멸과 조롱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구주의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 아버지의 이례적인 반응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은 그 아버지가 자주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랐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아들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아들이 와서 용서를 구하기를 기다리는 대신 그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었다.(누가복음 15:20) 아버지는 용서와 화해의 행위로, 즉 아들을 공개적으로 끌어안고 입을 맞춘 후, 집으로 데려왔다.

“제일 좋은 옷”과 반지, 신발(종들은 맨발이었다)을 주고, 잔치를 위한 살진 송아지를 잡은(누가복음 15:22~23 참조) 이 모든 행위는 아들의 수치스러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종이나 죄인이 아닌, 아들로 받아들였음을 보여 준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탕자의 아버지가 보인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주는 희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아들을 염려하던 충실한 아버지가 아들을 맞으러 달려나가 수없이 입을 맞추는 애틋한 장면은 거룩한 경전에 있는 모든 이야기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고 애정어린 장면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보호의 팔 속으로 돌아오시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바라시는지를,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그분의 모든 자녀들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또 다른 탕자”, 리아호나, 2002년 7월호, 69쪽)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본질과 속성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제하지 않으실 것이며, 우리가 길에서 벗어나거나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막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의 사랑은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무척 바라시며, 우리가 아직도 “거리가 먼” 곳에 있어도 우리에게로 달려오실 것이다.(누가복음 15:20). 그분은 우리를 잘 알고 계시기에, 아무도 우리를 알아주지 않을 때에도 우리의 더 나은 본모습을 알아보실 수 있으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우리는 모두 이 비유에 나오는 두 아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유는 또한 우리가 죄로부터 돌이키고 구주께로 돌아갈 때,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실지에 대해 가르쳐 준다. 속죄를 통해 그분은 우리에게 달려오시며, 우리가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시고, 우리 혼자서 회개의 길을 걷도록 요구하지 않으신다.

현대에 삶을 “방탕한 생활”로 낭비하고 나서 다시 교회의 활동 회원으로 온전히 돌아오는 길을 찾은 한 청년에 대한 예를 보려면, 누가복음 7:36~50 주해에 나오는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엘 앤더슨 장로의 이야기를 참조한다. 

눅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And the son said un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in thy sight, and am no more worthy to be called thy son.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But the father said to his servants, Bring forth the best robe, and put it on him; and put a ring on his hand, and shoes on his feet: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And bring hither the fatted calf, and kill it; and let us eat, and be merry: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For this my son was dead, and is alive again; he was lost, and is found. And they began to be merry.
눅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Now his elder son was in the field: and as he came and drew nigh to the house, he heard musick and dancing.

누가복음 15:25~32. 첫째 아들

첫째 아들은 충실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역시 자신의 아버지와 멀어져 있었다. 그는 아버지처럼 측은히 여기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잔치에 참석하길 거절함으로써 그도 역시 둘째 아들만큼은 아니지만 공개적으로 아버지에게 수치와 당혹감을 안겨 주었다. 아버지는 그 시대의 문화적 사고방식에 따라 첫째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기보다는 잔치에서 빠져나와 그를 찾아 나섰다. 아버지는 충실한 아들과 덜 충실한 아들 모두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이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는 질투의 자기 파괴적인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 아들은 다른 사람이 집에 왔을 때에는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으나 부모님께서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을 크게 기뻐한 것에는 화를 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서 아마도 필요 이상으로 자기 연민을 느끼며, 이 충실한 아들은, 놀라울 정도로 충실한 이 아들은 잠시 동안 불결함이나 절망, 두려움이나 자기 혐오를 자신이 결코 겪을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잊었습니다. 그는 목장에 있는 모든 송아지가 이미 자신의 것이며, 옷장에 있는 모든 옷과 서랍에 있는 모든 가락지가 모두 자신의 것이라는 점을 잠시 동안 잊었습니다. 자신의 충실함으로 늘 보상을 받아 왔으며 앞으로도 보상을 받게 된다는 점을 그는 잠시 잊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열심히 일을 하여 놀라운 방법으로 그것을 얻었던 그는 자신이 근접해 있던, 주님의 완전한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한 가지를 지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그는 아직 동정심과 자비, 그리고 동생의 귀향이 경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는 넓은 시야와 성숙한 마음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돌아온 사람은 그의 동생이었습니다. …

분명 이 동생은 죄수, 곧 죄와 어리석음, 그리고 불결한 생활 속에 사로잡힌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도 어느 정도 제한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자신의 보이지 않는 감옥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눈이 먼 질투의 괴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무시당한다는 느낌과 동생에 의해 권리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있지도 않은 모욕의 희생물로 빠져 들었습니다. … 이제까지 자신의 삶이 행복했다고 생각하고, 좋은 운명에 만족을 느꼈던 사람이 단지 또 다른 사람 역시 어떤 좋은 운명을 지녔다는 것 때문에 갑자기 매우 큰 불행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또 다른 탕자”, 70쪽) 

눅 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And he called one of the servants, and asked what these things meant.
눅 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And he said unto him, Thy brother is come; and thy father hath killed the fatted calf, because he hath received him safe and sound.
눅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And he was angry, and would not go in: therefore came his father out, and intreated him.
눅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And he answering said to his father, Lo, these many years do I serve thee, neither transgressed I at any time thy commandment: and yet thou never gavest me a kid, that I might make merry with my friends:
눅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But as soon as this thy son was come, which hath devoured thy living with harlots, thou hast killed for him the fatted calf.
눅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And he said unto him, Son, thou art ever with me, and all that I have is thine.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It was meet that we should make merry, and be glad: for this thy brother was dead, and is alive again; and was lost, and is found.

 고든 비 힝클리 회장 : "여러분 모두 이 이야기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부모님들은 모두 이 이야기를 되풀이 해 읽으셔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모든 가정을 깨우치며 온 인류를 깨우치고도 남을만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다 회개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자비로운 용서를 빌고, 그분의 모범을 따라야 할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벗, 1991년 11월호, 5~6쪽)

스티븐 L 리차즈 장로 : "나는 주님이 이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제멋대로 생활하면서 많은 것을 잃었으나 적어도 어느 정도 고통과 오욕으로 거기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을 분명히 하신 것이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의는 그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형벌을 받았을 때, 다정한 아버지의 마음은 자기 아들의 회개와 되돌아옴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회개에 대한 큰 격려입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아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범법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일이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누가복음 15장. 세 가지 비유의 소개

누가는 구주의 매우 유명한 비유 중 세 가지, 즉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탕자(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기록했다.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된 주제는 잃어버린 것에 관한 것이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의 경우, 잃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샅샅이 뒤졌다. 이 세 가지 비유에서, 이 일에 관계된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크게 기뻐했다.

잃어버린 것. 데이비드 오 맥케이(1873~1970) 회장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에서, 양과 동전과 탕자는 각각 서로 다른 이유로 잃어버려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양에 관하여, 맥케이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어떻게 그 양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까? 그 양은 반항적이지 않았습니다. 비교해 보면, 그 양은 지극히 합리적인 방법으로 살아갈 방도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했거나, 아니면 더 좋은 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들판으로 무심결에 이끌려간 탓에 무리에서 벗어나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교회에는 지극히 타당한 이유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 방황하는 …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업적인 성공이나 그들의 전문 분야에서 성공을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교회에 관심이 없어지게 되고 마침내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동전에 관하여, 맥케이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동전을 잃어버린 것은 그 동전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 동전을 맡은 사람이 부주의나 태만으로 그 동전을 잘못 두었거나 떨어뜨린 것입니다.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것은 그저 동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영혼들, 즉 어린이와 청소년과 성인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탕자에 대해 맥케이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이 경우에는 자신의 의지가 작용했으며, 의도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권위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방종한 생활을 했으며, 상속받은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낭비했습니다.”(Conference Report, Apr. 1945, 120–21, 123)

잃어버린 것을 샅샅이 찾음. 양을 잃어버린 목자와 동전을 잃어버린 여인은 둘 다 소중한 소유물을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아다녔다.(누가복음 15:4, 8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도 역시 복음의 축복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야 할 책임이 있다. 칠십인 정원회의 일원으로 봉사하던 알렉산더 비 모리슨 장로는 이 책임에 관하여 이렇게 적었다. “목자로서의 지도자가 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큰길과 덤불 속으로 들어가 신앙과 간증의 불꽃이 희미하게 식은 채로 길을 헤매는 회원들을 찾아 그리스도의 우리 안으로 다시 데려오는 것이다. 지도자들이 잃어버린 회원을 찾을 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강력한 비유에서, 구주께서 너무나도 아름답게 표현하신 그 기쁨을 그들도 누리게 된다.”[3~7절 참조]”(Feed My Sheep: Leadership Ideas for Latter-day Shepherds [1992], 28)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수고의 열매를 맺는 데 수년이 걸렸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한 충실한 가정 복음 교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딕 해머는 경제 공황 당시에 시민 보호단의 일원으로 유타에 왔습니다. 그 사이에, 그는 어느 젊은 후기 성도 여성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가 카페를 개업하자, 그곳은 인기 있는 회합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해머 가족의 가정 복음 교사는 윌러드 밀른 형제였습니다. 전 딕 해머와 친분도 있었고 그의 카페 메뉴를 인쇄해 준 적도 있었던 연고로, 세인트조지 시에 방문할 때마다 제 친구인 밀른 형제에게 ‘우리 친구 딕 해머는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가?’ 하고 물어보곤 했었습니다.

그 응답은 대개가 ‘그럭저럭’이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났고, 재작년쯤에 윌러드 형제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몬슨 형제님, 딕 해머가 개종하여 곧 침례를 받는답니다. 90세의 나이에 말입니다. 오랜 시절을 우린 친구로 지냈지요. 그가 내린 결정에 내 마음이 흐뭇합니다. 여러 해 동안 가정 복음 교사로 있었지요. 아마 15년은 되었을 겁니다.’

해머 형제님은 실제로 침례를 받았고, 그로부터 1년 후에 아름다운 세인트조지 성전에서 엔다우먼트와 인봉 의식을 받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저는 윌러드 형제님에게 물었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가정 복음 교육을 하시면서 낙담한 적은 없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정말 기쁩니다.’”(“가정 복음 교육—하나의 성역”, 성도의 벗, 1998년 1월호, 47쪽)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크게 기뻐함. 기쁨은 이 비유들의 주된 메시지이다.(누가복음 15:6, 9, 23~24, 32 참조) 제임스 이 탈매지 장로는 이렇게 적었다. “[세 가지 비유에서] 잃어 버린 영혼이 스스로 멀리 떠난 양에 비유되었든, 주인의 부주의로 잃어버린 은전에 비유되었든, 혹은 집과 천국같은 삶에서 스스로 떠난 아들에 비유되었든, 그 영혼을 되찾은 기쁨은 마찬가지이다. 죄에 항거한 의로운 영혼보다 회개한 죄인이 우월하다고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 죄는 무조건 나쁜 것이지만, 죄인은 회개하여 의롭게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는 그래도 귀중하다. 영혼을 잃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큰 손실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큰 고통과 슬픔을 느끼시는데, 한 사람이라도 멸망시키지 않게 하려는 것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예수 그리스도, 464~465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이 세 가지 비유에 대해 말씀하면서, 이렇게 가르쳤다. “왜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가르치셨겠습니까?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은 길을 잃더라도 그분의 속죄와 가르침을 통해 누구나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을 수 있도록”, 리아호나, 2012 년 5월호, 100쪽)


Prev Chap. Next Ch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