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막. 눅. 요.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계. TITLE

주석 마태 복음 5장: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11장. 12장. 13장. 14장. 15장. 16장. 17장. 18장. 19장. 20장. 21장. 22장. 23장. 24장. 25장. 26장. 27장.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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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산상수훈. 모세의 율법이 대체됨. 온전하라.

Jesus preaches the Sermon on the Mount—Its teachings replace and transcend some aspects of the Law of Moses—Men are commanded to be perfect like their Father in heaven.

마태복음 5~7장 소개 및 연대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산상수훈과 그 장소인 갈릴리의 언덕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곳에서, 지상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사람이 그야말로 가장 위대한 설교를, 즉 산상수훈을 전하셨습니다.”(“The Way Home,”Ensign, May 1975, 15) 구주께서는 갈릴리에서 성역을 시작하시며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마태복음 4:17) 선포하셨다. 또한 그분은 산상수훈에서(마태복음 5~7장 참조) 자신의 왕국에 속하는 사람들의 삶을 주관하며 행복과 온전함으로 이끄는 의로움의 교리와 원리들을 가르치셨다.

이 설교가 끝나자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태복음 7:28~29; 비슷한 설교를 누가복음 6장 17~49절 제3니파이 12~14장에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그분이 말씀하신 내용과 그분의 태도에 모두 놀랐다. 그분은 서기관이나 랍비처럼 과거의 권위에 의지하고 전례를 인용하며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자로서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5~7장에는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이“가장 위대한 [설교]” (Conference Report, 1941년 10월, 95쪽)라고 불렀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설교는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구주가 하신 다섯 가지 위대한 설교 중 첫 번째 설교이다.(다른 설교는 마태복음 10장, 13장, 18장, 24~25장에 나와 있다.) 이것은 산상수훈으로 알려졌으며, 갈릴리 해변 근처에서 주어진 것이다.

누가는 산상수훈과 비슷한“광야에서의 설교”로 알려진 설교를 기록했다. 어떤 사람들은 산상수훈이 십이사도를 택하기 전에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브르스 알 맥콩키 장로는 칠십인 정원회에서 봉사할 당시에 산상수훈에 나타나는 몇 말씀들은 명확하게 십이사도에게 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말씀을 전했었다. 맥콩키 장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누가에게 주어졌던 광야에서의 설교는 십이사도를 택하여 성임한 직후에 주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산상수훈]에 관한 니파이인들의 기록은 니파이인 열 두 제자가 부름받은 후에 주어졌습니다. 설교의 많은 부분은 분명히 일반 대중에게보다는 사도의 직분을 지닌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제3니파이 13:25) [조셉 스미스] 역 성경에서 선지자는 마태복음의 그 기사에 대해 일반 사람들보다는 십이사도로 부름받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상당한 많은 자료를 더 첨가하고 있습니다.(조성, 마태복음 5:3~4; 6:25~27; 7:6~17) …”

“결과적으로 산상수훈과 광야에서의 설교는 하나이고 똑같은 것입니다.”(신약전서 교리 주해서, 3권 [1966~1973년], 1:213~214)

이 설교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좀 더 높은 차원의 삶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십계명과 산상수훈은 모든 정부와 현재 우리 사회의 문명이 세워진 기본 원리가 됩니다.(출애굽기 20:1~17; 마태복음 5~7장) 그 원리를 무시할 경우 각 개인과 국가는 피할 수 없는 사망과 파멸로 인도될 것입니다.”(에즈라 태프트 벤슨의 가르침[1988년], 677~678쪽)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And seeing the multitudes, he went up into a mountain: and when he was set, his disciples came unto him:

마태복음 5:1~12. 팔복

팔복은 마태복음 5장 1~12절에 나오는, 축복들에 대한 구주의 선언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해롤드 비 리(1899~1973)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자신의 완전한 인품에 관한 것을 나타내 주셨으며 …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 어느 것에도 비길 데 없는 이 산 위의 설교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여덟 가지 독특한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각기 ‘복이 있나니’라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 주님의 이 말씀은 기독교 세계의 문학에서 팔복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 그 안에는 실로 완전한 삶을 위한 헌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해롤드 비 리[2000], 200쪽)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And he opened his mouth, and taught them, saying,

  “이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산상 수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 기쁨을 … 누릴 수 있는 여덟 가지 명확한 방법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선언은 … 팔복으로 알려져 있으며, 성경 해석자들은 하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준비로써 언급하여 왔습니다. … 팔복은 완전한 삶으로 인도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해롤드 비 리, 성공적인 삶을 위한 결심[1973년], 56~57쪽)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해롤드 비 리 회장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궁핍한 사람, 즉 영적으로 너무나 가난하여 간절히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해롤드 비 리, 197쪽)라고 가르쳤다. 제3니파이에는 이 설교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심령이 가난하여 내게로 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제3니파이 12:3; 기울임체 추가)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심령이 가난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영적으로 궁핍하다고 느껴 자기 옷, 음식, 호흡하는 공기, 건강, 생명 등을 주님께 의지하며, 감사를 드리고, 인도와 용서와 매일매일의 필요 사항을 채우기에 충분한 일을 주시도록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지 않고 지나는 날이 하루도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y that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해롤드 비 리 회장은 “애통하는 자”란 자신의 죄를 애통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또 애통하는 자들은 다 복이 있나니’(제3니파이 12:4; 또한 마태복음 5:4 참조) … 주님은 회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누구에게 올 약속에 대해 말씀하고 계실까요? ‘지극히 겸손하여져서’ 침례를 받고 성신의 은사를 받은 모든 사람입니다.(제3니파이 12:2 참조)”(The Teaching of Harold B. Lee, ed. Clyde J. Williams [1996], 112)

이 가르침에 대한 또 하나의 의미가 모사이야서 18장 9절에 나오는데, 이 성구는 교회 회원에게 필요한 한 가지 요건이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기꺼이 슬퍼하고, 또한 위로를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것임을 가르친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여기서 주님이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과 같이 애통하기 위해서는 `회개를 이루는‘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보이고 회개한 자를 위한 죄사함을 받고 다시는 자기가 애통해 하는 그 행위를 저지르지 않아야 합니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로우며, 겸손하고, 가르침을 잘 들으며, 인내하는 것”을 뜻한다. “온유한 자는 복음의 가르침을 기꺼이 따른다.”(경전 안내서, “온유한, 온유”; scriptures.lds.org) 온유함은 나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가 가르친 것처럼, 온유함은 “친절함 부드러움[이]다. 그것은 확신과 힘과 평정을 반영[한]다. 건강한 자존감과 진정한 자제력을 반영[한]다.”(“Meekly Drenched in Destiny” [Brigham Young University devotional, Sept. 5, 1982], 2; speeches.byu.edu)

에이치 데이비드 버튼 감독은 교회의 감리 감독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우리가 온유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온유함은 우리가 영에 의해 가르침 받도록 해 줍니다.”(“거룩함도 더욱”, 리아호나, 2004년 11월호, 99쪽)

예수께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시편 37편 11절을 인용한 것이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마태복음 5:5) 해의 왕국을 상속받는다는 의미이다. 이 지구는 언젠가 “해의 영광을 받을 준비가 되도록 모든 불의에서 성결하게” (교리와 성약 88:18) 될 것이며,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받을(교리와 성약 88:17) 것이다.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온유한 사람이란 해를 입거나 괴로움을 당할 때 쉽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고 잘 참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온유함은 약한 것과 비슷한 뜻이 아닙니다. 온유한 자는 강하고 힘이 있으며, 자신을 완전히 지배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패거리나 동료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도덕적인 확신에 대한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Blessed are they which do hunger and thirst afte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filled.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배부를 것”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또한 “외양간의 가축을 먹이다 또는 살찌우다”라는 뜻이며, 완전히 만족할 때까지 먹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주님은 그들이 완전히 만족할 때까지 영적으로 먹이실 것이다. 제3니파이에는 이 설교에 “그들이 성신으로 충만함을 입을 것임이요”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제3니파이 12:6; 기울임체 추가)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여러분은 고통을 덜어 줄 빵 부스러기 한 조각이나 물 한 모금이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귀중하게 보일 만큼 음식에 굶주리고 물에 대한 갈증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가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찬식에서 성도들과의 우정을 증진하기 위하여 집을 떠난 사람들을 인도하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날에 예배하도록 하는 굶주림과 목마름입니다. 그것은 곧 열렬한 기도를 하게 하고, 우리를 거룩한 성전으로 가게 하며, 우리가 성전에서 경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obtain mercy.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우리가 남을 대하는 방식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구주의 거듭된 가르침이 또 한 번 나타난다.(마태복음 6:12, 14~15; 7:1~2; 18:23~35; 25:31~46)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이렇게 기록했다. “저는 우리의 모든 관계에서 더욱 연민 어린 마음과 강한 자비심을 호소합니다. 우리가 자비롭다면 최후의 심판자께서도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기 때문입니다. …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가 돕고, 먹이고, 돌보고, 양육하고, 축복하는 분들의 모습은 감동을 줍니다. 누군가가 그런 자비를 베풀 때, 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그 후손을 자비로 축복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느낍니다. … 다른 이들에게 자비로운 사람은 어김 없이 자비로 보상받게 됩니다.[마태복음 5:7]”(Standing for Something [2000], 75, 77)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타인을 용서하는 일에서 자비를 베푸는 것에 대해 말했다. “항상 자비의 원리를 실천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려는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우리의 형제를 용서할 준비를 하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형제, 그리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그들이 회개하거나 용서를 구하기 전에 용서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똑같이 자비로우실 것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 392쪽)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비록 보복으로 하는 것일지라도 사람이나 짐승에 대한 불친절하고 잔인한 말, 잔인하고 부정한 행동으로 세상의 또는 하늘의 재판석에서 재판을 받는 날에 자비가 필요할 때, 그러한 말이나 행동을 한 가해자는 자비를 구할 자격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친구로 생각했던 사람의 비방으로 상처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보복하지 않으려고 힘들여 노력했던 기억이 있습니까? 긍휼히 여기는 여러분은 모두 복이 있나니 이는 여러분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제럴드 엔 런드 장로는 칠십인으로 봉사하는 동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마음에 더러움이 없고 성령을 받아들인다고 설명했다. “구주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태복음 5:8] 어떤 것이 청결하다는 것은 그것이 오염되지 않았으며, 불순물로 더렵혀지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청결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감을 받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건들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의 마음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청결하지 못한 것들을 제거하고 마음 가운데 불순물들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가 더욱 노력할수록, 우리는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좀 더 열게 됩니다.”(“우리의 마음을 열어”,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33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마음이 청결한 것과 하나님을 보는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영혼이 청결하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들은 침례의 물에서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며, 침례 후에는 죄 사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생활한 자들이고, 성신의 권능으로 죄가 마치 불처럼 태워 없어진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영혼들이며, 청결하기 때문에 다른 청결한 존재들을 보고 그들과 교제할 자격이 있다. 이 청결한 존재들의 우두머리는 청결하신 주님이시다.”(A New witness for the Articles of Faith [1985], 492)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보려면 청결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저서에는 멀리 있는 것을 본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그것이 짐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차츰 가까워짐에 따라 그는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더 가까워지자 친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접촉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단지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말씀 때문에 그를 술취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악마에게 사로잡혔다고 생각했습니다. 의로운 사람만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청결할 때에만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과 선은 낮은 수준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 사람의 내면에서‘하나님의 속성’이나 선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그에게서 찾은 선 때문에 인하여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나 주님의 성임된 지도자를 비판하고 헐뜯는 사람들을 잘 유의하십시오. 그런 사람은 청결하지 않은 마음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the children of God.

7.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분쟁을 일으키는 자, 법률과 질서에 대항하는 동조자 및 범법자들은 악한 동기로 충동을 받으며, 그들이 중지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탄의 자녀로 알려질 것입니다. 평화를 찾지 않고 혼란을 퍼뜨리기 위하여 거룩한 것을 가벼이 여겨 시끄러운 의혹을 일으키는 사람에게서 자신을 멀리 하십시오. 분쟁을 일으키고 다투기를 좋아하며 진리를 찾는 것 이외의 목적으로 논쟁하는 사람들은 충만하고 풍성한 삶을 이룩하는 데 한 가지 필수적인 것인 주님의 근본 원리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강의 왕의 탄생을 알린 천사의 노래는‘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였습니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가정에서 사소한 불화가 점점 심해져서 결국에는 심각한 문제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볼 때ㆍㆍ이러한 원리ㆍㆍ(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우리 이웃에서도 대수롭지 않은 의견 차이가 골이 깊어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초래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처럼 서로 용서하고 타협점을 찾기를 거부하고 불화를 일으키는 경우는 사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함께 앉아서 서로 조용한 말로 대화를 나눈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데도, 사람들은 원한을 키우고 보복할 궁리를 하는 데 시간을 허비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마음 속으로 남을 증오하는 독소를 키우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주님께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기도하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이와 같은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 곧 회개의 본질이 될 것입니다. 그 일이 단시일 내에 간단히 이루어지기는 어렵겠지만, 진지하게 구하고 그 마음을 계속 가꾸어 나간다면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ㆍㆍ지나간 상처의 아픔을 간직하고서는 마음의 화평을 얻을 수 없습니다. 화평은 회개하고 용서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화평입니다" (성도의벗 1991년 11월호, 4~6쪽)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Blessed are they which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8.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갈채를 받는 왕관을 얻기 위해 금욕, 정직, 도덕의 표준을 양보하는 일을 거부하여 손가락질 당하고 조롱 당하는 모든 젊은이는 어디에 있든지 이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무리들의 조롱과 심지어는 육체적인 폭행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선다면 영원한 기쁨의 축복으로 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옛날처럼 일부의 성도들과 심지어는 사도들까지도 다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쳐야 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 때가 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실패하지 않도록 하실 것입니다.” (해롤드 비 리, 성공적인 삶을 위한 결심[1973년], 56~57쪽)

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Blessed are ye, when men shall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shall say all manner of evil against you falsely, for my sake.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Rejoice, and be exceeding glad: for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for so persecuted they the prophets which were before you.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Ye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have lost his savour, wherewith shall it be salted? it is thenceforth good for nothing, but to be cast out, and to be trodden under foot of men.

마태복음 5:13.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소금은 짠 맛을 내고 식품을 보존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또한 모세의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에도 뿌려졌다. 이렇게 소금은 기쁨, 영구성, 그리고 성약을 맺는 것과 연관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마태복음 5:13) 되라고 가르치셨을 때, 그 말씀은 그들의 삶이 주님과 맺은 성약을 반영해야 하고 세상 전반에서 방부제 역할을 다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칠십인 정원회 회장단의 카를로스 이 애시(1926~1999) 장로는 소금은 오염되면 그 맛을 잃으므로, 우리는 영적인 오염을 피함으로써 우리의 “맛”을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애시 장로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신권 소유자들을 대상으로 전한 것이었지만, 그 내용은 우리 각자 모두에게 적용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학자가 소금은 세월이 지나도 그 맛을 잃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불순물이 섞임으로써 맛을 잃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신권의 권능도 세월이 지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불순물이 섞임으로써 잃게 됩니다.

청년이나 성인 남자가 외설 문학에 생각을 쏟을 때 맛을 잃게 됩니다.

신권 소유자가 거짓말이나 불경스러운 말을 하면 맛을 잃게 됩니다.

우리 중에 대중을 따라 부도덕한 행위나 약물, 담배, 알코올 및 그 밖의 해로운 물질의 사용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맛을 잃게 됩니다.

불순한 생각으로 마음을 더럽히고, 진실이 아닌 말로 입을 속되게 쓰며, 악한 행동에 힘을 잘못 쓸 때 그 사람의 풍미와 특성은 사라져 버립니다. …

저는 특히 청년들이 자신의 맛을 보존하는 수단으로 삼도록 이 간단한 지침을 드립니다. 깨끗하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참되지 않은 것은 말하지 마십시오. 이 아닌 것은 행하지 마십시오.”(“세상의 소금: 그 맛과 인간의 구원자들”, 성도의 벗, 1980년 11월호, 64쪽)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Ye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that is set on an hill cannot be hid.

마태복음 5:14~16.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권유했다.

“우리의 빛을 비추어서 우리를 따라온 사람들이 구주를 따르게 된다면, 그것이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른 누군가를 안전히 집으로 데려오시기 위해 보내신 빛이거나, 영생으로 이어지는 곧고 좁은 길을 보여 주는 횃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빛은 횃불이므로, 타오르기를 멈추거나 집으로 가는 길을 찾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해서는 안 됩니다.”(“That Ye May Be the Children of Light” [Brigham Young University fireside, Nov. 3, 1996], 8–9; speeches.byu.edu

마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Neither do men light a candle, and put it under a bushel, but on a candlestick; and it giveth light unto all that are in the house.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Let your light so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lorify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Think not that I am come to destroy the law, or the prophets: I am not come to destroy, but to fulfil.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For verily I say unto you, Till heaven and earth pass, one jot or one tittle shall in no wise pass from the law, till all be fulfilled.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Whosoever therefore shall break one of these least commandments, and shall teach men so, he shall be called the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but whosoever shall do and teach them, the same shall be called great in the kingdom of heaven.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For I say unto you, That except your righteousness shall exceed the righteousness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e shall in no case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by them of old time, Thou shalt not kill; and whosoever shall kill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But I say unto you,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thout a cause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hell fire.

마태복음 5:22. 라가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가라는 단어는 아람어에서 왔으며 “천치, 바보, 또는 머리가 빈 사람”을 뜻한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이 단어에 담긴 더 넓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불경하고 천박한 표현들은 나라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이 말씀의 의도는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적절한 감정을 전달하는 모든 언어를 꾸짖기 위함이다.”(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1:222)

 

 마태복음 5:22. “노하는 자마다”

조셉 스미스 역, 마태복음 5장 24절에는 “이유 없이”라는 구문이 없다.[영어 성경에는 “without a cause”라는 문구가 있으나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음—옮긴이](또한 제3니파이 12:22 참조) 칠십인 정원회의 린 지 로빈스 장로는 이들 성구를 인용하며 우리의 생활에서 분노를 없애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사탄의] 전략의 교활한 점은 분노를 선택의지와 무관한 것으로 분리시켜서 우리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의 희생자라고 믿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 주님께서는 우리가 화를 내지 않겠다는 선택을 하기를 바라십니다. … 주님께서 ‘이유 없이’라는 구문을 없애신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변명의 여지도 남기시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

화는 우리의 자제력을 포기하고 사탄의 영향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적대적 감정이나 행위를 초래하는 생각의 죄입니다. … 선택의지와 분노 사이의 연관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생활에서 분노를 없애는 첫걸음입니다.”(“선택의지와 분노”, 성도의 벗, 1998년 7월호, 80~81쪽)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은 우리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상기시켜 주었다.

“화를 내는 것은 사탄의 영향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화 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영을 동반할 수 있도록 합당하고 싶다면 화를 내는 것을 삼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

… 우리 모두는 그대로 두면 분노로 이어질 수 있는 감정에 빠질 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불쾌감이나 짜증 또는 적대감이 생길 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통제력을 잃고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그 다른 사람은 종종 우리 가족, 즉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

그러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우리가 분노를 삼가기 위해 이성적인 결정을 내리기를 바랍니다.”(“감정을 다스리십시오, 나의 형제여”, 리아호나, 2009년 11월호, 68~69쪽)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Therefore if thou bring thy gift to the altar, and there rememberest that thy brother hath ought against thee;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Leave there thy gift before the altar, and go thy way; first be reconciled to thy brother, and then come and offer thy gift.

 

마 5: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Agree with thine adversary quickly, whiles thou art in the way with him; lest at any time the adversary deliver thee to the judge, and the judge deliver thee to the officer, and thou be cast into prison.

마태복음 5: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 사화하라”

데이비드 이 소렌슨 장로는 칠십인 회장단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을 고발하는 자와 사화하라는 말은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합의를 도출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구주께서는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마태복음 5:25]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불화를 조기에 해결하여 순간의 격정이 육체적 감정적 잔학 행위로 비화되는 것을 막고 노여움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원리는 특히 우리의 가족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용서를 통해 원한은 사랑으로 바뀝니다”, 리아호나, 2003년 5월호, 11쪽) 

마 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Verily I say unto thee, Thou shalt by no means come out thence, till thou hast paid the uttermost farthing.

 

마 5: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by them of old time, Thou shalt not commit adultery:

마태복음 5:27~28.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음욕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욕이 그토록 치명적인 대죄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육욕이 우리 영혼에 미치는 영향력은 영을 완전히 파괴시킬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필멸의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결하고 거룩한 관계를 더럽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러한 관계는 바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느끼는 사랑이며, 부부가 자녀를 가족 안으로, 영원히 지속되도록 계획된 가족 안으로 데려오려는 소망입니다. … 사랑을 하면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사람들에게 손을 내밉니다. 그러나 육욕은 경건함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자기 탐닉에만 빠져듭니다. 사랑에는 열린 손과 열린 마음이 동반됩니다. 그러나 음욕에는 채울 수 없는 욕구만 있을 뿐입니다.”(“내 영혼의 원수를 위한 자리는 없나니”, 리아호나, 2010년 5월호, 44~45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음욕을 일으키는 주범인 외설물이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설물은 이성 간에 정상적인 감정적, 낭만적, 영적 관계를 누리는 능력을 망가뜨립니다. 그것은 부적절하고 비정상적이거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항하는 도덕적 장벽을 좀먹습니다. 양심이 무디어짐에 따라 외설물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칠 영향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이 본 대로 행동하도록 이끌리게 됩니다.”(“외설물”, 리아호나, 2005년 5월호, 89쪽) 

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But I say unto you, That whosoever looketh on a woman to lust after her hath committed adultery with her already in his heart.
마 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And if thy right eye offend thee, pluck it out, and cast it from thee: for it is profitable for thee that one of thy members should perish, and not that thy whole body should be cast into hell.

마태복음 5:29~30. “빼어 내버리라”

조셉 스미스 역에서는 구주께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글자 그대로 신체 일부분을 베어 버리거나 손상시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구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를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죄에 관한 비유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찍혀 불에 던지우지 않도록 너희 죄를 던져 버리라.”(Joseph Smith Translation, Matthew 5:34 )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던져 버리고 죄를 짓게 하는 장소, 사람들, 상황을 멀리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해 강력한 비유를 사용하셨다.(마태복음 5:29~30; 18:8~9; 마가복음 9:43~48조셉 스미스 역, 마가복음 9:40~48[경전 안내서] 참조)

조셉 필딩 스미스(1876~1972) 회장은 “오른쪽 눈”이나 “오른쪽 손”이라는 말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는 신성한 계명에 정직하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힘써] 이끄는 가까운 친구나 친척들”을 의미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친구나 친척이 한 사람을 계명에서 멀어지도록 이끌려고 노력한다면 그를 따라 악한 행위를 하여 멸망으로 들어가기보다는 그 사람과의 우정과 관계를 버리는 편이 낫다.”Answers to Gospel Questions, 5 vols. [1957–66], 5:79) 

마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And if thy right hand offend thee, cut it off, and cast it from thee: for it is profitable for thee that one of thy members should perish, and not that thy whole body should be cast into hell.
마 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It hath been said, Whosoever shall put away his wife, let him give her a writing of divorcement:

 

마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But I say unto you, That whosoever shall put away his wife, saving for the cause of fornication, causeth her to commit adultery: and whosoever shall marry her that is divorced committeth adultery.

 

마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Again, ye have heard that it hath been said by them of old time, Thou shalt not forswear thyself, but shalt perform unto the Lord thine oaths: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But I say unto you, Swear not at all; neither by heaven; for it is God’s throne:

 

마 5: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Nor by the earth; for it is his footstool: neither by Jerusalem; for it is the city of the great King.

 

마 5: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Neither shalt thou swear by thy head, because thou canst not make one hair white or black.

 

마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But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e have heard that it hath been said,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But I say unto you, That ye resist not evil: but whosoever shall smite thee on thy right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

 

마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And if any man will sue thee at the law, and take away thy coat, let him have thy cloke also.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And whosoever shall compel thee to go a mile, go with him twain.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Give to him that asketh thee, and from him that would borrow of thee turn not thou away.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e have heard that it hath been said, Thou shalt love thy neighbour, and hate thine enemy.

마태복음 5:43.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지만, 구약전서에 원수를 미워하라고 명하는 성구는 없다. 구주께서는 당시에 흔히들 하는 말을 거론하신 것으로 보인다. 1946년에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는 그리스도 당시의 일부 유대인이 실제로 자기 지역 사회의 이웃들은 사랑하되 외부인은 미워하라고 가르쳤음을 밝혀 준다.(Dana M. Pike, “Is the Plan of Salvation Attested in the Dead Sea Scrolls?” in Donald W. Parry and Dana M. Pike, eds., LDS Perspectives on the Dead Sea Scrolls [1997], 93, note 19)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But I say unto you, Love your enemies, bless them that curse you, do good to them that hate you, and pray for them which despitefully use you, and persecute you;

마태복음 5:44; 누가복음 6:12, 14~15.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제일회장단의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은 용서가 갖는 치유력에 대해 가르쳤다.

“[타인이 상해를 가할 때] 우리가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은 분노입니다. 어쩌면 우리나 우리의 가족에게 상해를 가한 누구에게든 ‘그대로 갚아주겠다’고 바라는 것을 정당화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가치관의 실현이라는 주제에 관해 권위자로 알려진 시드니 사이몬 박사는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용서를 훌륭하게 정의했습니다.

‘용서는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원한을 부여잡고 분노를 품으며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덧나게 하는 데 사용되었던 에너지를 더 나은 곳에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가지고 있었던 힘의 재발견이며,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무한한 능력을 되찾는 것이다.’[with Suzanne Simon, Forgiveness: How to Make Peace with Your Past and Get on with Your Life(1990), 19] …

… 그 일을 잊고 우리의 마음을 비워 점점 커지는 분노를 없애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구주께서는 그분의 속죄를 통하여 소중한 평화를 우리 모두에게 주셨지만 이것은 우리가 분노, 악의, 또는 복수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기꺼이 던져 버릴 때에만 올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Joseph Smith Translation, Matthew 6:13], 심지어는 심각한 죄를 범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속죄로 인한 평화와 위안이 오게 됩니다.

… 저의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교리와 성약 64:10]는 구주의 훈계에 따를 때 우리에게 올 수 있는 치유의 힘이 있음을 믿습니다.”(“용서가 낳는 치유의 힘”,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68~69쪽)

용서에 관한 구주의 가르침을 더 알아보려면, 마태복음 18:21~22 주해를 참조한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That ye may be the children of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for he maketh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on the good, and sendeth rain on the just and on the unjust.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For if ye love them which love you, what reward have ye? do not even the publicans the same?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And if ye salute your brethren only, what do ye more than others? do not even the publicans so?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Be ye therefore perfect, even as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is perfect.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 너희도 온전하라”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장로 마태복음 5장 48절에 사용된 온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했다.

온전함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완전한’이라는 뜻의 텔레이오스(teleios)에서 번역되었습니다. … 이것을 부정사로 표현하면 ‘목적지에 도착함, 완전히 개발됨, 성취함, 끝마침’이라는 뜻의 텔레이오노(teleiono)입니다. 이 단어가 실수가 없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멀리 있는 목적을 달성함이라는 뜻임을 주목하십시오. …

온전함을 향한 가장 진지한 노력이 지금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온전함은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온전함은 부활한 뒤 주님을 통해서만 옵니다. 온전함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언젠가는 실현될 온전함”, 리아호나, 1995년 11월호, 86, 88쪽)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여러분이 사다리에 오를 때에는 아래부터 시작하여 한 계단씩 올라가야만 위에 이를 수 있습니다. 복음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시작하여 승영의 원리를 모두 다 배울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들을 모두 배우게 되는 것은 휘장을 통과하고 나서도 한참 후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무덤을 넘어서서도 우리가 구원과 승영에 대해 배울 것은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 , 268쪽)

  “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온전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사실을 나는 믿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완전한 상태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말씀을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모범에 모범을 더하고 이생애에서 뿐만 아니라 무덤을 넘어서도 계속 진보할 때 하나님 같이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곳에서 기초를 쌓습니다. 준비하는 상태인 이 지상 생활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의 진리를 배움으로써 완전에 이르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어제 보다는 오늘이 낫고, 오늘 보다는 내일이 더 낫도록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  우리가 ...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완전에 이르는 길(에) ... 이르게 됩니다. ”    -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 -

“어느 누구도 이 생애 동안 완전해지지는 않습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지는 것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오늘 계명을 지키기 시작하면, 내일은 더 많은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 우리는 어떤 작은 일에 대해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 ”

“우리가 완전해지는 과정을 계획하는 경우, 차근차근 한 단계 한 단계 세상을 극복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은 완전해져 갑니다. 그런 다음, 그것이 무엇이든지 의심할 여지없이 완전하게 보증받게 됩니다. 즉,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우리가 이 생에서 우리의 최선의 능력으로 그 과정을 계획하고 따른다면, 이 생을 마친 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와 똑같은 과정을 밟게 될 것입니다. … ”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으며, 심지어는 무덤 너머에까지도 그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브르스 알 맥콩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심”, 1976년, 올해의 말씀[1977년], 399~4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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